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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여대 이승만 학살자 전 대통령 석상 건립 말썽
최인진 기자 ijchoi@kyunghyang.com
경인여자대학교가 교내에 이승만 전 대통령 전신 석상을 세워 논란이 일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측이 학생들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교내 한복판에 흉상도 아닌 전신상을 세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경인여대는 25일 오후 교내 기념교회앞 잔디 광장에서 김길자 경인여대 총장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 전 대통령 전신상(높이 3m) 제막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학교측은 학교 도서관에 석상 제막식을 기념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진전을 열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석상 건립은 김길자 경인여대 총장이 주도하는 사업으로 전해졌다. 김 총장은 경인여대 학교법인 태양학원 설립자다. 김 총장은 2008년부터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석상 건립 사업은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며 그를 대한민국의 국부로 추켜세우고, 그 연장선에서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일을 대한민국 건국일인 건국절로 기념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학생들은 학교측의 제막식을 반대하는 대자보를 교내 곳곳에 내걸며 석상 철거를 촉구했다. 경인여대 총학생회, 총대의원 등으로 구성된 학생자치기구는 대자보에서 ‘석상 건립과 제막식에 사용된 경비에 대해 많은 학우들의 부정적인 의견이 있다’면서 ‘이승만 박사의 제막식에 반대하며 석상을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1학년 박모씨는 “학생들 동의없이 저 석상을 왜 세웠는지 모르겠다”며 “솔직히 다른 독립투사 등 애국인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논란 많은 이승만 전 대통령 석상을 세운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인천지역의 한 시민단체도 경인여대 앞에서 철거를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 단체 관계자는 “대학은 총장 개인의 정치적 취향을 실현하는 곳이 아니다”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독재자이자 친일 청산을 거부한 친일파 비호자다. 한국전쟁때 국민을 버리고 도망갔다. 석상은 건립은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이승만 동상만큼은 학교내에 건립은 절대않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단순 간결’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권력욕의 화신
1945년 해방의 해는 이념을 초월한 혹은 이념을 포괄한 ‘단일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시점이었습니다. 1947년 이전까지 냉전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루즈벨티즘을 바탕으로 미국 중심의 통합적 세계상에 공산사회까지 통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국무부는 미·소공동 위원회를 통한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당연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미군정의 반발을 지속해서 누르며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 등을 후원했던 것이 바로 미국의 세계 정책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위해 적극적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최초의 남한 정치인입니다.
1946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과로 수립된 미·소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을 당시, 국내는커녕 세계적으로도 ‘분단’은 생각지도 않았던, 바로 그 시점에 이승만 스스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이야기하며 ‘반공(反共)’이라는 주제를 정치 논쟁에 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에 잠시 미국으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북한의 김일성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적극적으로 ‘단정 정부 수립’을 실천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김일성이 조소앙을 제거하고 이후 지속해서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를 제거했던 것처럼 이승만 역시 매우 적극적인 정치 행보로 자신의 이득을 관철해 나갑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차라리 ‘냉혈한 정권 쟁탈자’라는 표현이 적합합니다.
비단 헌법을 뜯어고치고, 독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었습니다.
친일파를 용납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친일파를 처리했다 안 했다는 얘기는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는 대한민국이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만을 고민할 뿐입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어떻게 전후 처리를 했는지에 비교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이승만 정부 당시 정무위원의 상당수, 군의 주요 사령관, 경찰의 거의 전부 그리고 한민당으로 대표되었던 각종 친일 경력의 사회 세력이 모두 이승만 정권과 함께했습니다. 물론 이승만 본인이 능동적으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킨 것은 상식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것이죠.
이승만은 철저하게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우선순위로 삼고 권력을 운영합니다. 독립운동 시절 하와이에서는 의형제 사이였던 박용만을 무력으로 쫓아냈고, 좌우합작운동을 권유해놓고 이를 통해 김규식을 몰락시켰고, 안두희를 통해 김구를 죽음에 몰아넣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이 증거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후 안두희의 행적을 보십시오. 이승만 정권 내내 비호받고 출세를 누리던 그 특혜는 어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승만이 아니라 그 집단이 문제다? 이승만은 그 집단을 창출한 대표입니다. 대표와 집단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심지어 민족청년단이나 한민당과 같이 자신의 동지세력까지 무차별적으로 짓밟았습니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이범석이 몰락했고, 한민당은 철저하게 권력을 잃은 채 민주당이 돼버리고 맙니다. 모든 것은 ‘일민주의’, 이승만 유일 체제로 운영되던 것이 당시 아닌가요? 학급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붙어있고, 이승만 숭배 노래를 불러야 했던 시대. 대체 왜 이 시대를 향수하는 거죠?
‘건국’은 왜곡되고, 한편으로는 미화된 표현입니다. ‘결과’를 바탕으로 한 ‘배제’의 또 다른 전형입니다. 1948년은 어떤 상상을 가져다 붙여도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1945년에 2차 대전이 끝나고, 조선이 광복하면서 새로운 현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방과 광복의 의미 이전에 세계사적, 한국사적 분기점이기 때문에 이 시기를 기준으로 역사를 구분하는 겁니다. 삼국통일, 고려건국, 조선시대, 임진왜란, 강화도 조약. 이렇게 역사의 변화가 총체적으로 일어나는 바로 그 시기를 역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1948년? 로마제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를 배우나요? 프랑스 건국일은 며칠인가요? 미국인들이 기억하는 것은 독립혁명이지 워싱턴 대통령 취임식이 아니지 않나요?
평양의 우익 민족주의자 조만식, 남한의 우익 민족주의자 안재홍, 김규식, 초기 이승만과 꼭 같은 궤적을 걸었던 우파 김구, 그리고 여운형, 백남운을 비롯한 수많은 중도파 혹은 타협적 좌파. 그 모두가 ‘당시’에 소망했던 것은 ‘남북한 단일 정부’ 즉, ‘통일 정부’에 대한 이상이었습니다. 즉, 당대 거의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소망은 냉전 이후를 사는 우리가 ‘건국’이라 부르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냉정히 되묻고 싶습니다. 자꾸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어찌 됐든’식으로 말을 돌리지 마십시오. 누가 결과를 알고 있고, 누가 미래를 알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증오입니까, 평화입니까? 적개심입니까, 대안입니까? 미워한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경계할 것을 경계하되 대범하고 담대하게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승만과 달랐던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의 가치 있는 분투였고 그로 인해 역사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금일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하는 소위 ‘이승만 띄우기’는 매우 정치적이고 정략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학문은 ‘입장과 주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일이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의 학문적 저급함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수많은 연구 업적을 ‘종북, 좌빨’ 식으로 멋대로 짓밟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수준을 가지고 어떻게 ‘건국의 아버지’라는 말을 쓸 수 있겠습니까?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가 다양한 이념을 흡수하면서 지극히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을 벌여왔습니다. 안창호는 철저한 기독교 반공주의자였으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좌우합작’을 주도하다 해방 전에 죽었습니다. 김원봉은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활동을 하다 중국 관내에서 무장 부대를 만들었고 결국 필생의 라이벌 충칭 임시정부에 합류하며 해방을 맞았습니다.
신채호는 언론인으로 출발해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고대사 연구의 영역을 개척했고 무정부주의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의 울타리를 넘나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그들의 국가가 만들어졌고 수많은 사람이 그 나라를 선택했습니다. 이 민족 구성원 하나하나를 주워담을 역사가 어떻게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따위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까.
한국 전쟁 중에 보여주었던 그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리더십과 거창 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제주4.3사건, 여순반란사건에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던 그를! 어떻게 단순히 ‘상황을 내다보는 기민하고 노련하며 리더십 있는 정치가’라 쉽게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
좋으냐, 나쁘냐가 아닌 좀 더 진지하며 보다 객관적이고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여건이 하루속히 마련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승만정권의 민간인학살의 실태
그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인사들과 지식인 노동자.학생.부녀자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가차없이 목숨을 빼앗았다.
학살 유형별로 구분하여본다면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재소자.예비검속 좌익혐의자. 민간인희생자. 부역혐의.사상의심자.빨치산 출몰지역주민.개인감정밀고자등 여러가지 이유같지 않는 혐의를 뒤집어 씨워 즉결처분하였다.
또한 1950년에 제정되여1951년에 창설된 國民防衛軍(국민방위군)에 소속된 이들은 훈련소 갈때마다 '돌려치기'식으로 당하면서 아무런 군수품도 보급품도 못받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거나 혹은 훈련소에 입소하지만 보급품이나 식량도 없이 아무것도 못받고 훈련소안에 갇혀 지내듯이 지내게 된다.
국민방위군은 1951년 1.4 후퇴당시 (서울~부산) 혹한의 추위속에서 아사자와 동사자가 무더기로 속출하였고, 이 비극적인 상황에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은 군수품이나 보급품을 횡령하거나 부정 착복해서 빼돌린 돈으로 장부상으로 '병사들을 위해 젤리공장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무능한 정부에 의해 굶주린 병사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는 등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으로 징집(17세~40세)된 이들은 가는 곳마다 凍死者(동사자) 餓死者(아사자)가 대량 발생했으며 참혹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게 된다.1951년12월부터 2월사이에 추위에 굶어죽고 얼어죽은 국민방위군의 희생자는 9만~12민명에 이른다는 학계의보고가 존재한다. 이는 단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였던 이승만정권은 적과 동지도 구분하지 못하였다.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한국인의 생명은 하나의 微物보다 못한 야만적인 미개인에 불과하다는 편견이 밑바닥에 깔려있어 한국인을 멸시하고 무시하였다. 미군정청은 3년동안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인권을 유린하고 살인을 일삼았고 이승만정권의 축을 이루고있는 군과경찰 간부들의 구성원 대부분이 일본제국주의에盡忠報國(진충보국)하겠다 는서약을 했던 賣國者(매국자)들이었기떄문에 애국지사들과 민중들을 학살하였던것이다.
그들은 독재권력의 그늘아래 동족에 대한 잔혹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에 이르며 바로 戰爭(전쟁)과 反共(반공)이라는 두가지 命題(명제)로 이승만으로부터 虐殺免許(학살면허)를 받아 殺生簿(살생부)를 작성하여 손가락총을 들이대며 그들만의 기준에 의하여 민족 대학살극을 자행하였다.
그들의 眼中(안중)에는 국민은 없었다. 국민들이 나라를 지키라고 손에 쥐어준 총칼로 적군과 大敵(대적)할 의사는 눈꼽만큼도 찿아볼수없었다. 후퇴를 거듭하면서 경찰서. 양곡창고, 학교,지서유치장,면사무소.동네공터등에 비무장 민간인들을 집결시켜 폐광산.논과 밭. 산과바다 계곡에서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않고 살륙을 하였다. 아군도 적군도 없었고 오직 그듷의 눈에 거슬리는자들은 학살의 대상일따름이었다.ㅇ약130만명이상의 비무장민간인이 이승만정권에의해서 학살되었다. 유족들은 지금도 진실규명을 외치면서 고통과 한숨으로 날을 지새우고있다.
온몸에는 철사줄과 새끼줄로 꽁꽁 묶어 트럭에 실어 총알세례를 퍼부었고 총알이 부족할때는 칼과 낫과 죽창으로 亂刀(난도)질을 하였고 구덩이를 파고 생사람을 암매장하고 시신에 불을 지르것도 서슴치 않았다.
屍身(시신)은 暗買場(암매장)되었고 학살장소는 불태워지고 屍身들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바다와 강에 水葬(수장)되고 폐광산에 遺棄(유기)되고 길가에 버려지고 그야말로 강산이 피로물든 생지옥의 현장이 금수강산 조선의 강토에서 벌어졌다. 바다에 버려진 시신들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열도및 대마도까지 떠내려갔다.
한마을의 주민전체가 몰살당하고 그사실은 은폐하기위해 마을 전체에 기름을 뿌려 불을 질러 마을전체의 모습이 형체마져 사라지게만들기도하였다. 이를 두고 학살자들은 堅壁淸野焦土化(견벽청야 초토화)작전이라 하였다.선량한 국민을 불순분자로 간주하고 저질러진 虐殺首魁(학살수괴) 이승만의 작태인것이다. 어찌 筆舌(필설)로 다 이야기 할수있으리요
어찌 이런자를 백주 대낮에 자라나는 학생들의 배움터에 동상을 건립할수있단말인가.
김길자 총장은 교육자의 이름으로 양심도 부끄러움도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학생들앞에서 이사장 행세를 한단말인가 . 즉각 이승만동상을 자진철거하고 국민들과 학생들앞에서 석고대죄하기바란다. 만일 자진철거하지않고 방관한다면 그이후 발생할 모든책임은 김길자 경인여대 총장이 책임져야할것이다.
2016년3월25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일동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
경인여자대학교 이사장은 이승만동상을 철거하여 교육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회복하기바란다. 배움의현장에서 독재자와 살인마의 모습이 학생들에게 투영되어서는 결코있어서는 않된다.
독재자 이승만 동상이라니 경인여자 대학교 이사장 그돈 어디에서 출연 되었나요
이사장 주머니 돈이라 해도 학생들을 지도하는 자로써 옳바른 자세가 아닌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