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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말씀/ 마가복음 2:18-3:6 요절/ 마가복음 2:22 | 2024. 4. 14 | |
마가복음 제 4 강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뼈 속 깊이 박혀 있는 자기 생각을 바꾸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의 생각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깨닫고 겸손한 자세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첫 자리에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초대 받아 배 부르게 먹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 다시 말해 월요일과 목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금식이 그들의 경건을 나타내는 중요한 종교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기적인 금식이 행해지는 그 날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그런 행동을 사회 기강을 깨는 나쁜 짓으로 여기고 비난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들은 자기들의 잣대로 제자들의 행동이 나쁘다고 판단하고 어찌하든지 금식의 전통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몇 가지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이 당시 관행대로 금식하지 않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습니다. 혼인 집 잔치에 초대 받은 손님들이 금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신랑을 무안하게 하는 것이며, 혼인잔치의 분위기를 깨는 것입니다. 혼인 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으며, 잔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즐거워하며 신랑을 축하해주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의 친구들이며 예수님이 베푸시는 하나님 나라 잔치의 손님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셨고, 레위는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으며 그 잔치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잔치 집에서 금식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금식 자체를 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금식은 좋은 것이며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의 새로운 기준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20을 보십시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 예수님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며, 그 날에는 금식해야 합니다. 신랑 예수님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는 제자들은 금식하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는 우리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입니다. 환난 앞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에 빠져서 예수님을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내 마음 첫 자리에서 예수님을 빼앗길 때 우리는 애통하며 금식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다시 얻고 예수님으로 충만해지기까지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습니다. 새 것과 낡은 옷은 어울리지 않고,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 것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낡은 옷과 낡은 부대는 율법주의와 자기 생각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의 기준을 정해 놓고 그대로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 규정대로 하지 않으면 경건하지 않는 사람으로 여기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금식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규정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로부터 비난받고 핍박이 따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금식 규정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금식의 기준을 제시하시고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율법주의와 나의 생각을 고집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옛 것과 새 것을 섞어서는 안 되며, 내 자신을 비우고 내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내려놓으면 자기가 망할 것으로 여기고 어찌하든지 자기의 생각을 고수하고자 합니다.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옛 것을 지키고 거기서 자기의 존재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옛 것을 고집하고 자기의 생각을 지키고자 하면 그런 인생은 진짜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은 새 것, 새 포도주로서 가장 좋은 것이며,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나의 삶이 어디서부터 빗나갔는지 깨닫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변화의 능력자이시며, 혼인잔치의 신랑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주님이십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는 낡은 부대입니까? 새 부대입니까? 낡은 부대는 딱딱하고 늘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있습니다. 새 부대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요 배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입니다. 다음으로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자기 생각, 율법적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자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 율법적 사고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애통하며, 겸손한 마음과 배우는 마음을 가진 자들만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들은 모두 겸손의 사람들이요 회개하는 데 빠른 사람들입니다. 시카고의 안마리아 선교사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회개제목을 바로 들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선교사님은 늘 자기 사랑과 자기 중심을 회개하고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하셨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안마리아 선교사님의 아름다운 삶에 큰 감동을 받아 목자님과 같이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마가복음 10장 45절을 평생요절로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겸손과 온유와 사랑으로 섬겨주신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자기 사랑과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죄인입니다. 제가 낡은 부대와 같은 마음을 날마다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과 배우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고 품고 섬기는 좋은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제자들은 잔치 집에 초청받아 잘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 날은 제 때 식사하지 못하여 배가 고팠습니다. 평일에는 말 이삭을 잘라 먹어도 괜찮지만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제자들도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함께 하다보니 율법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인 줄 알면서도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삭을 잘라 먹을까 하며 감자빵이라고 챙겨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그들은 또 ‘어찌하여’ 하면서 안식일 규정을 범한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일이요, 비비는 것은 타작하는 일이라고 보고 제자들을 안식일을 어긴 범법자로 몰아부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중요했고 그 날을 잘 지키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요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 규정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죄인 취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난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한 때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피난 길에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성전에 들어가 먹을 것을 구했고, 그때 아비아달 대제사장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떡을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떡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에 대해서 제사장이나 다윗을 문책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배고픔의 고통을 이해하시고 법보다도 다윗과 그 부하들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스토리를 통해 예수님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법의 정신은 사랑이요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율법주의에 빠져 마음이 딱딱하고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의미가 왜곡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 날을 더욱 스트레스가 많고 피곤한 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다시 말해 사람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일 법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안 되고, 안식일에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마음 첫 자리에 모시고 예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육체적으로도 휴식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주일이 되었습니다. 주일의 의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새롭게 하고 영육간에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통해 나의 마음과 삶이 치유되고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한 주를 청년의 스피릿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1-6은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충돌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은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회당 한 구석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또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쪽 손 마른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법정에 고소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들이 정해 놓은 안식일 규정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들의 올무에 걸리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자에 대한 치료 행위를 하지 말고 다른 날로 미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면 돌파를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손 마른 사람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자 했을 겁니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자의식이 들고 얼굴이 화끈거릴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신뢰했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 가운데 섰습니다.
이번에 예수님은 회중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린아이들도 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너무 뻔하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 침묵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한 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일을 다음으로 미룬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 되거나 죽이는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요, 생명을 살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보고도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그들은 딱딱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미워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는 일어나서도 마른 손은 감추고 있었을 겁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른 손만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용기를 내어 마른 손을 내밀었습니다. 내밀기 어려운 손을 내밀었을 때 놀랍게도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손에 피가 돌고 힘이 솟구치고 마음껏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손을 높이 들어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의 마른 손을 치유해 주시고 온전케 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마른 손이 회복되었을 뿐 아니라 상처 난 마음이 회복되고 기쁨과 생명력과 희망이 넘치는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마른 손이 있습니다. 드러내기 싫은 인생사가 있고 가정사가 있고 약점이 있고 죄가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나의 마른 손을 믿음으로 내밀어야 합니다. 나의 문제와 약점과 죄를 감추지 말고 주님께 내밀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면 주눅 들고 더욱 감추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용기가 생기고 담대해집니다. 주님은 나의 마른 손을 치유하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오늘 나를 찾아오십니다. 오늘만 있나 내일도 있지 하며 다음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네 손을 내밀라!” 말씀하실 때 즉시 나의 마른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나의 마른 손을 내밀기만 하면 주님은 나의 마른 손을 치유해 주시고 회복해 주시고 새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는 내가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세상 가치관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과 배우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고 마른 손이 치유되고 생명력이 충만한 청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