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세계에 있어 판매량은 곧 성적이다. 이 숫자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은 럭셔리, 하이엔드 심지어 이그조틱 브랜드조차 생존을 이유로 판매 볼륨 유지 혹은 확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제조사들은 한 달이 지나면 판매량 집계를 통해 성적표를 받아드는데, 수십 년간 최상위권을 기록하며 브랜드의 효자로 자리하는 모델도 있고, 노후화와 경쟁력 저하로 브랜드의 골칫덩이로 여겨지는 모델도 있다. 다만 각자의 이유가 있다. 언급했던 대로 상품성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시장에서 외면받거나, 워낙에 가격대가 높고 희소성이 높은 차량이라 판매량이 낮을 수 밖에 없기도 하다.
2017년, 안쓰러울 정도의 판매고를 기록한 자동차들을 살펴봤다. 다만 아직 12월이 다 지나지 않아 12월 집계는 제외했다. 따라서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판매된 차량 중 최저 기록 상위 다섯 차종을 소개한다. (없어서 못 파는 트위지는 제외하였음)
국내 브랜드 판매량 하위 TOP5
5위. 쌍용 체어맨 W - 517대
쌍용차 SUV 라인업이 힘들 때 기둥이 되어주었던 체어맨은 쌍용차가 단종을 예고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최고를 지향하며 등장했던 체어맨 W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상품성 저하가 빠르게 이뤄지며 국산 대형차 시장에서 에쿠스와 EQ900에게 완전히 밀려났다.
여기에 크로스오버 열풍에 더 이상 쌍용차는 한때 효자였으나 이제는 계륵이 되어버린 세단 시장에 손을 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지만, 회장님은 결국 씁쓸한 성적을 남기고 영원히 은퇴했다.
4위. 쉐보레 카마로 - 489대
꼴찌에서 네 번째를 기록했으나, 카마로에게 있어 이 성적은 결코 굴욕이 아니다. 대중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미국산 머슬카가 11개월 동안 500대에 달하는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 오히려 괄목할 만 하다.
다시 한번 카마로 SS를 살펴보자. 5천만 원이 넘는 가격대, 2도어 쿠페 레이아웃, 6.2리터의 대배기량 엔진. 사실상 잘 팔릴 수가 없는 구성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라, 453마력의 강력한 심장에 멋들어진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스포츠카를 5천만 원에 구매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스포츠카 매니아들에 대한 또 다른 축복이다.
3위. 현대 아슬란 - 438대
체어맨에 이어 다시 한번 안타까운 단종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다. 2014년 11월, 당시 현대차 브랜드에 몸담던 제네시스와 그랜저 사이에 투입되었던 아슬란이 결국 3년을 조금 넘기고 단종된다. 다행인 건지 아직은 현대차 홈페이지에 이름을 올리고 있긴 하나, 곧 사라질 운명이다.
현대차 네임밸류 덕에 데뷔 직후 판매량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슬란은 2015년 한 해 동안 8,629대가 팔렸지만, 이듬해 판매량은 2천 대 수준으로 폭락했다. 구형 그랜저를 짜깁기해서 만든 차량인지라, 눈에 띄는 경쟁력 저하가 원인이었다. '사자'를 뜻하는 이름을 지녔던 아슬란은 가죽은커녕 이름도 못 남기고 결국 초라한 성적만 남기고 떠났다. 소비자들은 그렇게 바보가 아니었다.
2위. 현대 i40 - 298대
공교롭게도 판매량 최상위권도 현대차가 모조리 독식하더니, 최하위권 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2위는 한때 PYL로 묶여 프리미엄을 강조했던 i40다. 유러피언 왜건을 지향했던 i40는 컨셉트와 마찬가지로 타겟 시장도 유럽인지라 사실 한국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구석이 많지 않았다.
특히 우리 소비자들은 쏘나타보다 약간 작은데 더 높게 매겨진 가격표에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2015년에 페이스리프트를 이뤘음에도 되려 전년보다 판매량이 하락한 것은 i40의 위상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네 자릿수도 넘기지 못하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곧 라인업에서 이름을 지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1위. 현대 벨로스터 - 176대
한 해 1만 8천 대 한정 판매를 말하던 현대차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성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데뷔 첫해, 판매량 1만 대를 돌파하긴 했으나 해가 지날수록 판매량은 급락했다. 다행히 해외 시장에서의 준수한 성적으로 2세대 모델이 탄생하긴 했으나, 태생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차량은 아니다.
다만 의미가 상당히 깊은 차량임은 부정할 수 없다. 과감한 레이아웃을 지녔던 컨셉트카의 높은 재현율을 보여주었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한국형 핫해치 프로토타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세대는 탄탄해진 기본기를 통해 스타일과 퍼포먼스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할 사명이 있다.
참고로 동기간 내에 포르쉐 911이 한국에서만 452대가 팔렸다. 여기에 이름을 올린 자동차들은 굴욕이 따로 없을 것이다.
번외 - 수입차 판매 최하위는?
수입차 시장은 워낙에 특수성이 넘치는 브랜드들이 많아 사실상 집계를 하는 것이 무의미하긴 하다. 슈퍼 럭셔리 브랜드인 롤스로이스 판매량이 낮다고 질타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재미 삼아 판매량이 가장 낮았던 모델들을 추려보았다.
* 롤스로이스 레이스 / 던 - 27대 / 14대
롤스로이스 고스트는 브랜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린 모델이다. 접근성을 크게 높임과 동시에 볼륨도 엄청나게 키워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레이스와 던은 그 고스트의 파생 모델로서, 스포티하면서 여유로운 럭셔리 쿠페, 컨버터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두 모델의 판매량은 각각 27대, 14대. 와중에 컨버터블보다는 쿠페가 조금 더 대중적이라는 걸 말하기도 한다. 두 모델이 합쳐서 41대 밖에 안 팔렸다고 조롱을 해야 하나? 아니, 이 아름다운 자동차를 선택한 41명의 오너에게 경외감을 표하기만 하자.
* 인피니티 QX70 - 21대
QX70은 포르쉐 카이엔을 잡기 위해 퍼포먼스 SUV로 빚어졌던 FX 2세대 모델의 개명 버전이다. 하위급 모델인 QX60보다 차체는 한참 작은데 상위급 모델로 포지셔닝 된 이유는 다름 아닌 퍼포먼스를 강조했던 SUV이기 때문. 따라서 인피니티가 이런 갸륵한 노력도 알아주는 덕분에 QX60보다 더욱 높은 서열을 가지긴 했지만, 카이엔의 벽은 너무 높았다. 2008년 출시된 모델이라 상품성도 상당히 떨어졌다.
결국 인피니티는 카이엔 잡기를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내년에 QX70을 단종시킬 계획이다. 한국 시장에선 아직 단종된 건 아니지만, 판매량이 집계가 아예 안되는 달도 있고, 월평균 두 대 꼴로 판매가 되고 있긴 하다.
* 렉서스 LC - 20대
올 7월부터 판매를 시작한 렉서스의 플래그십 쿠페, LC는 매달 4대 ~6대를 판매하며 11월까지 누적 20대 판매를 기록했다. LC500, 500h의 가격대가 1억 7천~8천만 원으로 구성되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한다. 프리미엄 쿠페 시장을 점령한 독일 브랜드들의 입김이 워낙에 거센 바람에 존재감을 피력하기가 힘들다.
* DS 5 - 10대
DS5는 시트로엥으로부터 독립한 DS 브랜드의 중형 모델로, DS7이 출시되기 이전엔 브랜드의 플래그십 모델이기도 했다. 해치백치곤 제법 큼직한 4.5미터의 전장에 여기저기 전위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는 독특한 자동차다.
사실 내 외관 스타일이 전위적이며, 이질적인 감각까지 있어 대중적인 선택지라 보긴 힘든 구석 있다. 소개한 차량들 중 수입차 부문에서 가장 저렴한 차종임에도 가격이 10배 이상 비싼 롤스로이스보다 판매량이 낮다는 것은, 상품과 소비자 정서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이런 제품을 한국에 내놓는 것부터 과감한 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시장이든 마찬가지이지만, 판매량이 모든 걸 말하진 않는다. 각각 시장의 특성과 포지셔닝, 컨셉트에따라 타겟도 다를 수 있고, 목표로 삼는 판매량도 다를 수 있다. 소개한 차량들 중에서 진정 노후화되어 상품성이 하락하여 절망적인 판매고를 기록한 차량들도 있다.
그러나 높은 판매고와 이익은 다른 대중적인 모델에게 맡기고, 개성과 스포티한 매력을 발산하며 브랜드의 색다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모델들이 대부분이다. 특수 임무를 위해 투입되는 스페셜리스트들의 판매량이 굳이 높을 필요는 없다. 쓸모없는 사람이 없듯이, 쓸모없는 자동차도 없다.
출처 : 모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