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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죽국의 왕자, 백이와 숙제 |
?중국 상말주초商末周初 시기에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알려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사기]<백이열전>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 고죽군의 아들이다. 부친은 작은 아들 숙제를 왕으로 세
우려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자 숙제는 왕위를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는 부친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고 하면서 달아났다. 숙제 또한 왕위를 계승하지 않고 달아나자 중간 아들(中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둘은 주 문
왕을 만나러 서쪽으로 가던 중 은나라를 토벌하러 가는 무왕을 만났다. 그들은 무왕에게 신하로서 군주를 살해하
는 것은 인仁이 아니라며 만류하였다. 그 후 무왕이 주나라를 세우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굶어 죽
었다는 것이다.
| 상의 제후국 고죽국의 위치는 하북성 노룡현 |
일반적으로 고죽국은 상대商代 제후국으로서 북경 및 하북성 연산燕山 일대를 세력권으로 춘추시대까지 존속했다
고 이해한다. [사기]<주본기>에서는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에서 남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은나라
의 제후국으로 성은 묵태墨胎씨다” 라고 하였다. 또 “백이 숙제는 고죽에 있다” 라고 하였는데, <사기집해>에서는
이를 “고죽은 요서군 영지현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제왕세기>에는 “탕은 특별히 묵태씨를 고죽에 봉하였다” 라
고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 [한서]<지리지>‘요서군’ 조에서는 “영지令支에 고죽성이 있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백이국으로 고죽성이 있다” 라고 하였다. 춘추시기에는 산융과 영지와 인접한 하북성 노룡 일대를 주 근거지로 보
고 있다. ([사기]<제태공세가>, [국어]<제어>)
그리고 상나라 일대의 고죽국의 세계世系는 모두 11세를 전하였다고 하나 문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백이 숙제와
그 부친인 초 2세대뿐이다. [사기]<백이열전>에서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백이와 숙제의 부친 이름은 초初, 자
는 자조子朝이다” 라고 하였다. 1973년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에서 상말주초의 고죽기孤竹器가 출토됨에 따라 고
죽국의 ?영역이 노룡을 중심으로 요서 일대를 포함한다고 여기에 되었다?. 하지만 고죽국에 대해서 문헌 사료도 부
족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 수양산의 위치는 어디인가? |
또 백이 숙제가 숨어 살았던 수양산을 고려나 조선조 유학자들은 황해도 해주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왕사립은 “[사기]<백이열전>에서 제가들을 인용한 주석에 의하면, 수양산은 모두 6곳이 있는데,
① <사기집해>에서 마융은 ‘하동 포판 화산 북쪽과 하곡 가운데 있다.’ 고 하였고
② <사기정의>에서 조대고는 <유통부>에서 ‘농서수에 있다’ 고 하였고
③ 대연지의 <서정기>에서는 ‘낙양 동북쪽에 수양산과 이제사夷齊祠가 있는데 지금의 하남 언사의 서북쪽에 있
다’ 라고 하였고
④ <맹자>에 이르기를 ‘백이 숙제가 주왕을 피하여 북해의 물가로 가서 살았다’ 라고 하였고
⑤ <장자>에 의하면 ‘백이 숙제가 서쪽으로 기양으로 가서 주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이 두 사람이
북쪽으로 수양산으로 가자마자 굶어 죽었다’ 고 하였다. <채미가>의 첫 구절인 ‘저 서산에 오르다’ 와 서로 호응된
다. 이는 섬서성 청원현의 수양산으로, 기양岐陽(지금의 섬서 기산岐山) 서북으로, 서주西周 본토 안에 위치하게 된다” 라고
하여 섬서 기양설岐陽說을 지지하고 있다.
| 갑골과 금문에 나타난 고죽국 |
갑골, 금문에는 상의 제후국인 ‘죽竹’ 으로 나타나는데 죽이 고죽과 같은지 의문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죽을 고죽의
생략이나 지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갑골문 중에는 고죽 관련 기록이 많지 않으며 상나라와의 관계도 다
양하게 나타난다. 복사에는 고죽을 후侯로 호칭하거나 상에 공물을 납입하기도 하였고, 복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 왕사王事에 근로하였고 상과 혼인 관계를 맺기도 하며 상 왕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때
로는 소방召方과 같은 세력과 함께 상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왕사립은 수양산의 위치에 대하여 섬서성 기산설을 지지하고 있다.? 갑골과 금문으로 볼 때 상말의 고죽
국은 하남성 언성현 부근에 있었다...>
| 고죽국은 상나라와 가까운 곳에 위치 |
한편 갑골문에서는 고죽의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데 소방召方, 북단北單과 같은 방국方國 명이나 염炎과 같은 지명
과 함께 나타난다. 소방은 상과 지속적인 전쟁을 벌인 국가로 그 위치를 현재 하남성 언성현?城縣 동쪽에 있었다
고 본?다. 따라서 고죽국이 소방과 함께 상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서로 인근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또
상이 소방을 정벌한 복사가 많다는 것을 보면 소방은 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고죽 역시 소방이나 상의 부근
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배진영, ‘출토자료로 본 고죽’,<이화사학연구>제 33집, 286쪽)
염炎은 연燕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재의 연산燕山산맥 지역으로 보지만 염炎이 연燕이 된다는 것은 근거가 희박하
다. 그리고 “고대의 연산燕山이 현재의 연산산맥이 아니라 북경 서남쪽 방산房山 지역의 대방산大房山, 백화산百
花山 등?을 연산이라 지칭한다?(常征, 召公封燕及燕都考- 兼辨燕山, 燕易王, 燕召王)” 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
기되고 있다(진광안 편, <연문화연구논문집>, 133-134쪽). 또 <춘추좌전> 양공 4년에 “겨울 10월에 주?와 거?
나라 사람들이 증?나라를 침략하였다. 장홀(노나라 대부)은 증나라를 구원하려고 주나라를 쳤지만 호태에서 패
하였다” 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염炎을 산동 남부의 등현藤縣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염충 ‘서주춘추시기연국
경내급기주변각족고략’,<중국고고집성> 화북 권7).
이처럼 갑골문에서 고죽의 위치를 찾기란 쉽지 않고 당시 상의 정치구역은 상구商丘를 포함하여 현재의 하남성 일
부와 산서성 남부를 가로지르는 황하를 중심으로 태항산太行山 서쪽을 넘지 못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대부분의 갑
골문?에 나오는 방국도 이 범위 안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함께 소방이 하남성 언성현 속탑하시에 있었다고
보면 고?죽도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
또 객좌를 중심으로 한 요서 일대에서 발견된 고죽기孤竹器가 이 지역을 고죽 세력권으로 보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었?지만 일반 묘장이 아닌 임시 저장 구덩이인 교장에서 출토되었다는 점과, 연대도 상말주초의 기물에 한정되
어 있고 ?고죽관련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고 보기 힘들다??.
<중국 요녕성 객좌현 북동 2호 유적에서 발견된 ‘기후箕侯’란 이름이 새겨진 사각형 청동솥인
‘기후방정箕侯方鼎’과 새겨진 문구...>
| 이형구, 고죽과 기자는 계승관계 |
이형구는 요령성 객좌현 북동北洞 유적에서 출토된 고죽명뢰孤竹銘?와 기후명방정箕侯銘方鼎이 두 제후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은대의 고죽과 상말주초의 기자가 시간을 달리하여 같은 지점에서 나타난 점은 양자
사이에 선후先後(殷末周初)하여 계승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죽국의 중심 위치는 대릉하 중류 객좌현 현성縣
城, 대성자大城子를 중심으로 오늘날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는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였다. 중국사
에 보이는 고죽국의 위치는 문헌상의 기록과 잘 부합하며, 기자동주箕子東走의 초기 지리적 위치에 해당한다는 것
이다. 고대의 문헌기록이나 고고학적 발굴 성과에 따라서 고죽국과 기자와의 관계는 서로 계승관계라는 것이다.
(이형구, ‘발해연안북부 요서, 요동 지방의 고조선’, <고조선단군학> 12, 63-65쪽)
| 고죽국의 위치에 관한 여러 설들 |
현재 노룡 일대에는 백이 숙제와 관련된 전설과 이제의 고향(夷齊古里), 이제정夷齊井, 이제묘夷齊廟, 청풍대, 이
제夷齊독서처 등과 같은 유적이 있다. 이곳에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민요 중에서는 ‘난수?水의 북쪽 이제
리’ 라든가 ‘난수의 동쪽 고죽성’ 등의 구절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고죽의 옛 성은 노룡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보기도 한다.
[사기]<제태공세가>에는 “제환공 23년(BCE663)에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급박함을 제나라에 알리니
마침내 제나라 군사가 고죽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라고 하여 고죽국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수서]<배구전>
에도 ?“고죽국은 고구려 땅이다(高麗之地, 本孤竹國也)” 라고 하여 고죽국의 영토가 후에 고구려의 통치 영역이 되
었음을 ?주장하였다??.
중국의 왕옥량은 “강역이란 뜻이 담긴 국가는 춘추전국 즈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상나라, 주나라 때는 아직
강역이란 개념이 없었다. 고죽국은 절대로 넓은 강역을 갖고 있을 수 없으며 관할하는 지역은 다만 노룡, 천안遷安
이 있는 분지라고 생각한다. 고고학적으로도 요서에서 발견된 고죽국의 청동기는 시간상 하가점 상, 하층문화 사
이에 있어 상나라 말기보다 빠르지 않고 서주 초기보다 늦지 않다. 고죽국이 하북 노룡에서 요서의 객좌와 조양 등
지역으로 이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산융의 남하로 귀족들은 달아나고 일부 고죽인들은 현지에 계속 남아서 생
활했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은 요서를 고죽국의 땅으로 여기고 있다.” 라고 하였다(왕옥량, ‘시론고죽적지망급 ’
강역‘- 겸론요서출토 ’고죽‘ 기물지원인’, <심양교육학원학보>, 58쪽).
염충은 “상나라 말에 주왕紂王이 동이를 치자 고죽군은 주왕을 피해 북쪽으로 난하 하류 지역으로 옮겨갔는데, 이
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백이가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기거하였다’ 이다?. 북해는 곧 지금의 발해다. 북쪽으로
옮겨간 고죽군은 지금의 노룡 일대에도 거주하였으며 그 활동 범위를 난하 하류 지역까지 넓혔다. 주나라 때 고죽
은 연나라의 관할에 속하였으며 BCE664년 제나라 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징벌하면서 고죽도 큰 타격을 입어 그
후부터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라고 주장하였다(염충, ‘서주춘추시기연국경내급기주변각족고략’, <중국고고
집성> 화북권7, 164-165쪽).
| 고죽국은 요서 지역에 잠시 거주하였다 |
따라서 요서 일대는 고죽국이 오래 영유한 지역이기보다는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의해 이동하여 잠시 거주하
였을 가능성이 크다? . 그리고 객좌 지역은 상 문화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으로, 하상夏商 시기에 대릉하를 중심으로
하는 연산 남북지역의 대표 문화는 하가점 하층문화였다. 하가점 하층문화 이후에 위영자문화가 발생하였다. 또
북경 일대는 장가원 상층문화가 나타나서 영정하 남북지역을 포괄하였다. 이처럼 상주商周 시기에 요서 지역은 하
가점 하층문화 계보의 문화가 형성되어있었기 때문에 상의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본다면 상주商
周 시기에 이 ?지역에서 세력 집단의 존재가 확인된다 할지라도 이 세력이 상대商代의 상문화를 가진 제후국이나
방국으로 존립할 ?여지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 객좌현 고죽기 출토는 지리적 위치만을 반영 |
그런데 이 난하 유역에 위치한 노룡 지역은 고고문화 유형이 장가원 상층문화에 속하는 지역이다. 한편 고죽이 통
괄하던 또 다른 지역은 고죽 청동기가 출토된 객좌 지역을 포괄하는 요서 지역으로 위영자 유형에 속한다. <통전>
에는 “영주 유성현은 옛 고죽국이다(營州柳城縣, 古孤竹國也)”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역의 고고문화
의 계보는 앞서 살펴본 고죽국의 세력 범위에 두 종류의 고고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죽이 요서 지역을 통괄
하였다고 할 경우, 고죽국이 통괄하는 상대 말기의 이 두 지역은 고고문화 유형이 동일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
이는 혈연 유대를 기초로 하는 씨족 방국이 동시에 두 개의 다른 고고문화 유형으로 나눠질 수 없다는 점에서 상대
에 이 지역은 고죽국의 세력 범위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상대 고죽국은 객
좌를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에 오랫동안 존립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서 객좌에서의 고죽기 출토는 단지 서
주 이후 ?고죽국의 지리적 위치만을 반영할 뿐이라 할 수 있다?(배진영, ‘갑골, 금문으로 본 상대 북경지역 정치체’,
<중국사연구> 47, 13-18쪽).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206-20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