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부터 하지 마
“참깨를 좀 심었더니 제법 잘됐어.”
“어, 그래? 많이 심었는가?”
“어쩌면 깨 가마께나 할지 모르겠어.”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해댔다.
그랬더니 미리부터 한 말만 팔라는 주문이 쇄도한다. 집에 와서 또 자랑이다.
“나 참깨 서 말 주문 받았어.”
“ 아직도 멀었는데, 자랑부터 하고 다녔어요?”
“미리 홍보하는 거지. 그 많은걸 우리가 다 먹을 것도 아니잖아.”
“그랬다가 홀딱 망하면 어쩌려고.”
“망하긴 왜 망해. 재수 없는 소리 마.”
“농사란 끝까지 봐야 하는 거야. 자랑부터 하는 거 아니야요.”
정말이지 얼치기 농군으로서는 과분할 정도로 참깨가 잘됐다. 키도 알맞게 자라고 깨 송아리가 다닥다닥 앙증맞게 많이도 달렸다.
작년 이맘때는 참깨를 베어 도로변 가드레일에 기대 세워놓은 것을 많이도 보았었다. 내 밭도 도로변이긴 하나 이곳엔 가드레일이 없다.
참깨를 베어 어떻게 말려야 하나. 말리는 과정에 비라도 맞는다면 때깔이 안 좋을 것 같아 고민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참깨 말리는 공상을 하다가 늦게 서야 잠이 들곤 했다.
참깨 밭 옆은 고추 밭이다. 고추를 따면서 참깨 송이를 유심히 본다. 삼일후면 수확이 적당할 것 같다. 그런데 날은 왜 이리 더울까.
이것 참 큰일이다. 참깨 벨 날이 내일인데 이렇게 더워서야.
햇살 퍼지기전 많은 일을 해 치워야 한다. 새벽 세시에 차를 몰고 나섰다. 밭에 도착하니 네 시가 넘었다. 아직 캄캄하다. 어둠속을 더듬거리면서 일을 시작했다. 오전에는 산 밑 밭에 가서 옥수수도 따고 들깨 밭 잡초도 뽑아주다 보니 한나절이다. 새벽 네 시부터 정오까지 일을 했으니 8시간 노동이다. 숨이 탁탁 막히는 더위를 이기며 이만큼 했으면 익숙지 못한 솜씨에 많이 한 것이다.
어쩌나 오늘 중으로 참깨를 다 베지 못하면 송아리가 더욱 벌어져 많은 양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새벽부터 참깨 베는 일에 몰두 했어야 했다. 나무그늘 아래서도 이처럼 더운데 이글거리는 태양아래서 저놈에 참깨를 어이 벤단 말인가?
1.5미터짜리 고추 대를 1.5미터 간격으로 줄맞춰 박고 적절한 높이에 줄을 띄워 참깨 세울 준비를 마쳤다. 이제 참깨를 베어 두 단씩 상부를 묶은 후 아래를 벌려 줄을 사이에 넣고 세우면 어지간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으리라.
준비를 마치고 참깨를 베어나가는데 다리가 천근처럼 무겁다. 잠시만 앉아있다 일어서도 어찔하다.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이 눈으로 흘러든다. 어쩌다가 수건 하나도 챙겨올 줄 몰랐을까?
해가 질 때까지 사력을 다해 모두 베어서 준비해 놓은 줄에 걸쳐 세우고 비닐을 씌웠다. 이만하면 줄도 튼튼하고 지주대도 촘촘하게 박았으니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없으리라.
몸은 늘어졌으나 마음만은 홀가분해서 돌아왔다.
이틀 후 깨도 좀 털 겸 다시 갔다. 내일은 비가 온다기에 서둘러 간 것이다. 그런데 이게 뭔가. 안전하게 세웠다고 자신했던 깨 단이 한쪽으로 모두 쏠려 있고 지주 대는 힘없이 누어 버렸다. 조심스레 비닐을 벗기고 깨 단을 들어내는데 뽀얀 깨알이 땅 바닥에 우루루 쏟아진다.
“아이고. 이 아까운 깨를 어쩌나.”
야물게 해 놨다고 믿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천만 다행인 것은 이틀 만에 다시 온 것이다. 하루라도 더 늑장을 부렸더라면 큰 손해가 날 뻔 했다. 조심조심 한 단씩 들어내어 1차 털이를 마쳤다. 오늘 털어낸 것은 극히 적은 양이다. 앞으로도 몇 차례는 털어야 수확이 끝난다. 깨 단을 다시 세우기 위해 지주 대를 더욱 촘촘히 세우고 줄도 하번 더 띄웠다. 이번에야 틀림없겠지.
이번에는 3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갔다. 과연 이번에는 깨 단들이 온전하게 서있었다.
커다란 천막을 깔고 깨를 털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끼어있어 더위도 한결 덜하다. 일기예보도 오늘은 비가 없을 것이라 했다. 마음 놓고 여유롭게 일을 했다.
털어낸 깨 단을 다시 세우고 비닐을 덮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비닐을 끈으로 단단히 묶어 나갔다. 아내는 털어놓은 깨에서 검불과 잎을 걷어내고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다. 갑작스레 돌풍이 몰아쳤다. 태풍 때도 그렇게 무서운 바람은 겪어보지 못했다. 쓰고 있던 매꼬자는 저만치 날아가 버리고 세워놓은 깨 단은 비닐과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군다. 아내는 털어놓은 깨가 날릴까 천막을 급이 덮고 있다. 나는 날아가려는 깨 단을 부등켜안고 나 좀 도우라고 아우성 쳤으나 이 자리에 아내 외에 누가 있는가? 아내역시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엎어진데 덮친다는 격으로 갑자기 소나기가 무섭게 쏟아진다. 비라는 것은 천천히 시작되어 점차 강해지는 게 보통인데 이 비는 숨 쉴 여유도 주지 않고 갑자기 폭포처럼 쏘다 붙는다. 이런 갑작스런 폭우는 칠십 평생에 처음이다. 털어놓은 깨는 바람 때문에 덮어 놓았으니 다행한 일이나 비닐과 함께 비벼버린 깨 짚은 대책이 없다.
폭우는 계속된다. 개천에는 흙탕물이 범람하고 밭에도 물이 흥건하다. 깨알을 말아놓은 천막만을 겨우 트렁크에 우겨넣는데 천막에서 물이 와르르 쏘다진다.
차 유리라도 부숴 버릴 듯 빗줄기는 여전히 강해도 차는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동안 비는 점차 약해지더니 삼마치 터널을 지나자 도로는 뽀얗게 말라있다.
춘천에 와서 이웃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곳엔 비 한 방울도 안 왔단다. 원 이런 일도 있나. 하늘이 나를 망치려고 내 머리 위에만 물 폭탄을 떨어트린 것인가. 차고 바닥에 천막을 펼쳤다. 천막 속에 물이 들긴 했지만 조금만 말려주면 괜찮겠다.
턴 깨는 일부에 불과하다. 비바람에 날아가 버린 깨 짚 속에는 훨씬 많은 깨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깨 단을 물에 말아버렸으니 어이할고. 아깝고 원통하지만 깨끗이 포기하고 말았다.
“자랑부터 하지 마.” 아내의 충고하던 말이 가슴을 두드린다.
첫댓글 푸히핫-전형적인 부부의 대화시네요. 감동 ㅎ 옳 깨풍년 도토리 풍년,대추 풍년이지요?
풍년이면 뭐합니까? 물속에 비벼 버렸는데. 이병옥 선생 수필집을 보니 나하고 비슷한 경험을 했더군요. 농사 정말 힘들어요.
아이, 아까워라. 내 마음이 이렇게 안타까울 때 본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아주 잘 됐으면 나두 좀 살건데.....
한선생님 너무 오래 못뵌것 같습니다. 별일은 없으신지 전화 드려 보고 싶었는데 여기 꼬리글을 달아 주셨군요. 반갑고 감사합니다.
예, 그 안타까운 마음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저희집도 그럴때가 종종 있었거든요.
비에젖어 색깔이 누렇게 변한 적도 비둘기 좋은 일만 한 적도... 실감나게 잘 읽었습니다.
춘주산행 이끄시느라 수고가 참으로 많으시지요? 님이 게시기에 춘주인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고생하신 보람도 없이...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것도 아니고 어찌하겠어요.
속상하시겠지만...내년을 다시 기약하시길 바랍니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페에서는 자주 뵙는데 얼굴은 언제 보여 주실건가요? 감사합니다.
저는 내년 2월 말쯤 귀국을 할 계획입니다. 계획대로 된다면 3월부터는 문화원 수업도 가고 모임도 나갈 수 있을거 같습니다. ^^
반갑습니다. 춘주인들 가슴이 넉넉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것입니다.
시몬 형제님 등단 동기님 명칭이 많습니다. 힘 내십시오. 다가오는 날은 늘 새롭습니다. 그날이 그날 절대 아니지요.
선생님 글 감사하면서 틈틈이 일고 있습니다. 가슴아픈 사연도 많고 고생도 많이 하셨군요. 선생님 한평생이 책속에 다 녹아 있는것 같아 감동입니다.
깨농사 실감나게 잘 쓰셨군요.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짐작이 갑니다. 덕분에 좋은 글 한 편 건졌습니다.합니다.
그날 고생 엄청 했어요. 늙은 주제에 왜 고생을 사서하나 한심 했답니다. 그리고도 내년 농사를 또 얘기하고 있으니 어쩔수없는 바보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