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가을 분위기가 나는 아침, 박물관 뜨락이 완연 청초하다.
오늘 주제는 그리 관심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김현화 선생은 1961년 생으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숙명여대 교수란다. 몇 분 약간 늦은 시간에 들어가니 화면에는 그뤼네발트의 제단 성화그림과 놀데의
<십자가책형>이 양쪽으로 대비되어 비춰지고 구상/추상 그림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1999년에 <20세기 미술사>라는 책을 써서 이름이 알려진 선생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감기에
절어 거의 잠겼고, 연거푸 물을 마시며 가까스로 강의를 이어가는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오늘 강의를 위해 어제 하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원래는 낭랑한 목소리라는
말도 했다.
요약문에서는 왜 추상인가? 하는 설명부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년), 피에트 몬드리앙(1872-
1944년), 말레비치와 절대주의, 러시아 구축주의(Constructivism,구성주의)로 모홀리-나기(1895-1946
년), 파블로 피카소(1881-1973년)와 같이 작가 설명 위주로 되어 있고, 피카소에서 그쳐 있다. 하지만
강의에서는 20세기 후반 미국의 신표현주의나 앵포르멜 설명까지 잠시 하다가 마치게 되었다.
우선 강의자는 추상미술을 "20세기 현대미술의 가장 커다란 성과"라는 입장에서 여러 번 20세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 5가지 가운데 하나로 회자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딱 누구랄 것도 없이
"추상은 1910-1913년 사이에 탄생"하였다며, 첫 시간은 주로 추상미술이 탄행하기 전까지의 미술의
흐름을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르네상스기의 다빈치나 카라밧지오의 그림들과 놀데의 <최후의 만찬>이나 <의심하는 도마>를 대비하며
화가가 상상에 의한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고통이나 구원의 약속을 그렸다며 화가의 주관을 강조한
그림이라고 하였다. 피카소는 "추상은 미친 짓"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며, 그림은 대상에서 출발하지만
그 재현이 아니라 회화라는 형식의 리얼리티를 중요시하여 화면 배치라든가 평면성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였다. 요약문에는 피카소의 아래와 같은 말이 크게 인용되어 있다.
"예술의 관점에서 볼 때 형태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상적인 것도 아니다. 형태란 단순히 형태일
뿐이다. 추상미술이란 없다. 화가란 언제나 구체적인 대상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에
현실의 모든 흔적들을 제거할 수 있다."
이때 보여준 그림이 <십자가 책형>(1930년)이었다.
원근법이나 명암은 무시되고 무슨 도형처럼 기하학적 형태로 구성된 그림이다.
특히 인체는 서양에서 미의 전형으로 여겨져 많이 그려져왔는데, 이제 누드조차 대상의 재현보다는
회화 그 자체로서 캔버스 안의 세계, 독립된 평면의 세계가 중요하게 된 것이다. 3차원의 명암을 가진
둥근 지구의 세계가 아니라 독립된 평면 안의 세계다. 하얀 살결의 누드를 많이 그린 부그로의 그림과
세잔느의 <목욕하는 사람>(1884년)을 대비하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1814년)와 마티스의 <푸른
누드:비스크라의 추억>(1907년)을 대비하여 설명하였다. 후자의 그림들이다.
마티스는 여기서 인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기하학적 입방체로,분석적으로, 다시점으로 그린 것이란
설명이었다. 강의자의 설명은 없었으나 이 그림에는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었다.[19세기 초 프랑스
에는 '호텐토트 비너스'라 불리는 남아프리카 코이코이족 출신의 노예 사라 바트만이라는 여성이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다가 29세의 나이로 죽었다. 1789년생인 그녀는 노예로 팔려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가서 프릭(freak) 쇼에 나왔다. 그녀의 유난히 커다란 엉덩이와 생식기가 유럽인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해주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팔려왔고, 자연사박물관의 호기심으로 여러
비인간적인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가 매춘으로 생활하다가 사망한 뒤에 그녀의 두개골, 생식기, 뇌 등은
1974년까지 파리 인류박물관에 전시되었다.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그녀의 유골을 반환해달라고
공식요청하자 프랑스는 2002년에 반환해주었다고 한다. <뉴스투데이>에 연재한 '이미경의 명작의 비밀'
이란 글에서는 마티스의 이 그림이 사라 바트만을 떠올리게 한다며, "인체 각 부분에 대한 묘사에서
조화와 비례보다는 아프리카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희화화하고 비하시켰다. 마티스의 시도는 호텐토트
비너스로 대변되는 19세기 식민지 열풍에 대한 노스탤지어적 감성을 담고 있었다"고 혹평하였다.]
이런 추세 속에서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년)을 그렸다. 이는 "입체주의의 서막으로서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이 나아가는 길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되는 그림이다.
브라크 등과 함께 한 입체주의는 전쟁 전까지 이어졌다.
피카소는 누구나 아는 바처럼 프랑코 독재 아래서 틀러 나치에게 요청하여 게르니카를 폭격하게 한
일을 비판하며 <게르니카>(1937년)를 그렸고, 40년대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한국
전쟁을 보며 미국인들에 의한 한국인의 학살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로 남겼다. 강의에서는 보여
주지 않았으나 이 대목에서 꼭 봐두고 넘어가야 할 작품들이다.
최초의 추상화로 여겨지는 그림은 1910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탄생되었다고 말한다. 이 그림에 제목은
없다.
이 그림에선 그야말로 자연 형체란 없다.
강의자는 추상미술의 화가들은 지식인으로서 특히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묵시록
적인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면모를 많이 보이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널리 알져진
몬드리안의 <구성>(1930년)에 대해서는 한참 설명을 하였다.
직접 그림 가까이서 보면 선들에는 붓터치를 느낄 만큼 미세한 떨림이 보인다고 한다. 어느 학생은
이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미술사를 공부하려고 결심하였다는 말도 들려주었다. 몬드리안은 사선을
극도로 싫어 하고 수평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현실의 격동 속에서 평화를 추구하였다고
설명하였다. 회화에서의 이런 추구는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결국 이로써 모더니즘 미술은 엘르트화하게 되었다고도 하였다.
새로운 회화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일련의 실험미술들로 말레비치의 그림 정도만 더 보도록 하자.
<검은 사각형>(1915년)이란 그림이다.
비구상이고 비대상이다.
이런 파격적인 면모는 당시 실제로 볼셰비키 혁명에서 화가들이 선두에 선 것과 마찬가지였단다.
오브제가 부재하는 세상을 추구한 이런 화가들은 사회주의도 "뺏었다 나눠주는 물질 중심"의 혁명이
아니라 정신의 혁명으로 이해하며 절대주의, '종교에 가까운 교리'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추상미술을 하는 화가들을 스탈린, 히틀러, 북한 모두 통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도 하였다.
강의에선 더 이어서 전후 미국의 추상미술 운동들로 개념주의나 신표현주의 등을 지나가며 잠깐씩 설명
하였으나 여기서 그 이하는 생략토록 하겠다.
현대미술은 아무리 보아도 보는 그림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그림이고, 그래선지 미의 경계 자체도
흐려져 보인다. 적어도 내 눈에는 화가의 독특한 자기주장일 뿐, 아름다운 그림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오늘 강의에서도 추상미술을 이해할 순 있게 하였지만 이런 선을 넘어서게 하진 못하였다.
- 제11회 강원서학회전 -
23일에 전시회를 둘러봤다. 중관 황재국 선생이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셨다. 중관선생은 1960년대 초에
서울에서 일중 김충현에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학계에 있어서 계속 매진하지는 못하였다고
하셨다. 여초 김응현 생존시에 만들어진 중진 서예가들의 전시다. 박물관에서 소장품 가운데 미수
허목의 편지글 하나가 유리관 안에 전시되었고, 이와 함께 중관선생을 비롯하여 춘천에서 활동중인
안종중, 황선희, 박경자, 윤용연 등의 작품들 전시를 주목해서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