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설교]
오늘 본문에서부터 마가복음 13장까지는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시기 전까지 예루살렘 근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 첫 시작으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입성하시기 전, 먼저 여리고라는 지역을 지나가셨습니다. 그곳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단지 그냥 지나가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길가에서 바디매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아마도 그곳에는 유월절을 앞두고 찾아온 수많은 순례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바디매오는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께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변의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고 그를 꾸짖었습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당시 맹인이요 거지는 그야말로 천대 받는 신분이었습니다. ‘네가 뭔데 감히 예수님께 말을 거느냐?!’ 이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한 번 더 예수님께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가복음에서 처음으로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이 사용된 장면입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도 ‘다윗의 자손’이란 호칭은 가장 먼저 맹인들에 의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맹인이 대체 뭘 알 수 있겠나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렇듯 영화로운 호칭은 가장 먼저 누가 사용했습니까? 맹인들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말 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사무엘하 7장, 그리고 구약의 선지서 등에서 계속해서 말씀했던 바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께서 친히 그의 나라를 이루시리라!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먼저 기억하고 고백했던 사람들, 곧 ‘맹인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천대받고 조롱받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지만,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곧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먼저 된 자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디매오의 외침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십니다. 본문 4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를 자신의 곁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본문 5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에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본문 5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바디매오는 그 즉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바디매오는 곧바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서, 그분이 걸어가실 길을 그대로 쫓아갑니다. 누가복음 18장 43절에서도 바디매오는 눈을 뜨자마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곧 바디매오가 무엇이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좇았다?!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오늘 말씀을 보면 바디매오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바디매오를 앞선 제자들과 비교하게끔 위치시켜놨습니다. 우리가 어제 말씀에서 보았듯이,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자리에 연연했던 자들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7절,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섬김을 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자들로서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자리에 연연하며 겸손히 주님을 좇지 못했지요.
그러나 반대로 맹인 바디매오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가장 천대받고 외면 받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끝내 그는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맹인으로서 살아간다?! 그것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로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사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하죠. 차라리 맹인이었으면 그래도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빈털터리였으면 그대로 더 간절하지 않았을까?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으면, 그래도 평온할 때보다는 더 많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 삶에 고난이 있고, 환난이 닥쳐오고?! 그런다고 해서 사실, 우리 중 누가 과연 하나님을 찾을까요? 평소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평소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사실 갑자기 환난이 닥쳐온다고 해서 진득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것, 믿음이란 것은 결코 마술처럼 깜짝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 그에 걸맞은 과정이 있고, 묵상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이처럼 담대하게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을까요? 그가 어떻게 이처럼 아름답게 예수님을 좇아갈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결코 마술이 아닙니다. 느닷없이 반짝 믿음이 생겨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맹인 바디매오, 그가 가졌던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평소에 삶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바라고 소망했던 것,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 그분께서 속히 나를 구원하시리라!’, 이러한 소망을 게속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바디매오는 이처럼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간절할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 절대 깜짝 마술이 아닙니다. 곧 믿음은 우리의 삶이요 우리 안에 품은 참된 소망을 기어코 끝까지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속 이러한 바디매오의 믿음을 잘 묵상해보시며, 오늘 하루도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며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