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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9월 1일 오전 예배 설교)
야고보서 1:12-27(신약 371)
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중요한 주제로 기록한 성경이라면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믿음을 나타내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야고보서는 성도들이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키며, 개인적으로 자신의 믿음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또한 기독교 전통 내에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 이라고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가 복음의 은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야고보서는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으로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믿음이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인 야고보가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 13: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갈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언급됩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사도행전 15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초대교회 공동체에 참여했습니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동생들 중에서 야고보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므로 ‘의로운 야고보’ 라고 인정을 받았고 야고보서를 기록함으로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믿음을 삶으로 실천할 때 복이 있다고 말하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일로 인해서 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과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한 것은 아니고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믿음을 증명할 행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 복을 받는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1.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 앞의 말씀에서도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면서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2절에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한 말씀과 연결되는 것으로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는 말씀에서 사용한 시험이란 단어와 12절에서 사용한 시험이란 단어는 같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외부로부터 오는 시련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시련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면서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면류관을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12절을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시험이란 단어의 의미를 시련으로 해석할 때 12절에서 시련을 견디어 낸 자는 곧 앞에서 말한 시험을 참는 자와 같은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 즉 시련을 참는 자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은 구체적으로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복은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받을 큰 복은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면류관은 경기장에서 승리자가 받는 승리의 면류관과 같은 의미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시련도 견디어 내면 마지막 때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면류관만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동안 늘 시련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마귀이기 때문에 마귀는 늘 성도들에게 시련을 줍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들 속에서도 믿음으로 견디어 내면 생명의 면류관을 상이자 복으로 받는 것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말하고 이어서 또 다른 의미에서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13절을 보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사용된 시험이란 단어는 유혹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이 유혹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 즉 유혹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욕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 구절을 공동 번역으로 보면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게 되는 원인은 우리 스스로의 욕심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욕심을 버리면 유혹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할 때 욕심을 갖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마음에 가득할 때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면 유혹을 받지 않고 유혹을 받는다고 해도 욕심이 없으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 육체적인 쾌락에 대한 욕심이 들 때 유혹이 오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유혹이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욕심에서 시작되고 우리의 욕심을 본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15-16절을 보면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야고보는 인간이 욕심을 갖기 시작할 때부터 죄가 싹이 트고 결국에는 사망에까지 이른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잉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는 문자적으로 ‘함께 붙잡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임신을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죄의 단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욕심’ 그 자체가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란 욕심에게 굴복당하는 시점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순수한 욕심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욕심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죄가 점점 커지게 되고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 만삭이 되면 아이를 낳는 것처럼 죄가 점점 커지면서 결국은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와를 유혹할 때처럼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로 유혹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의 그런 거짓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속이는 자입니다. 마귀의 거짓된 속삭임에 넘어가면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시련을 견디어 냄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참빛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더러운 것과 악을 버리라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속해서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이 남아 있으면 우리의 그릇이 더럽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우리의 영적 그릇에 채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먼저 온갖 좋은 은사와 선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말씀합니다. 17절을 보면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좋은 은사’는 일반 은총이 아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특별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반 은총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일반 은총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세상을 보존하고 선을 추구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특별 은총은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일반 은총과 달리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주시는 은총입니다. 특별 은총은 죄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은사는 바로 이 특별 은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선물’ 은 성도들을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영화로운 상태에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와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온전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혹에서 범죄치 않도록 도와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과 온전한 것을 주십니다. 그 은혜와 선물을 받은 성도들은 말하는 것과 성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합니다. 18-20절까지를 보면
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모든 곡식의 첫 소산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선택되어서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첫 열매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속히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듣는 것을 속히 하라는 말은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되는 것으로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좋은 조건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말하는 것은 더디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말을 천천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성급하게 자기의 의견만을 주장하거나 자기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기만 말하거나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논쟁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겸손히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고 다른 사람하고 말을 할 때에 항상 신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말의 실수가 많으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도 같은 의미의 말을 바울 사도를 통해서 하셨는데 성도는 성내는 것을 더디 해야 합니다. 화를 내기 보다는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성을 잘 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성도가 화를 잘 내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고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더러운 것과 악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능히 구원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기 위해서 그리고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이 있으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겨 질 수 없기 때문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더럽고 추한 것들을 우리 마음에서 철저하게 내 버리고 우리 마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말씀과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원래 옷이 붙어 있는 더러운 것이나 몸에 난 불결한 상처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 더러운 것은 도덕적인 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답지 못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악은 위선과 더러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야 할 마음에 부도덕한 것과 욕망과 위선을 담는다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 도덕적인 악과 위선과 욕망을 버리고 말씀을 마음에 담는 것이 복된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3.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하는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복을 주신다고 야고보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일이 책망과 저주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행한 일에 복을 받기 위해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2절을 보면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나태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과 결과적으로 자신이 믿음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면 아무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 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생활로써 증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듣는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성경을 듣고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면서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정한 믿음의 삶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는 속히 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통해서 실천하는 삶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23-25절까지를 보면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표현했는데 당시의 거울은 유리가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지만 희미한 모습으로 비춰 질 뿐 확실하게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단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열심히 주의하여 말씀을 들었다 할지라도 행하지 않으면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현대적으로 본다면 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과 몸이 뭔가 더러워진 것이 있는데 깨끗이 닦거나 자신을 잘 가꾸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울을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말씀을 읽고 듣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금방 잊어버리거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바로 잡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온전히 깨닫고 믿음 안에 살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더러운 것을 말씀을 의지해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말씀에 약속한 복을 받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는 것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26-27절을 보면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경건하다면 스스로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는 것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은 경건하다고 하지만 경건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다운 말을 하고 하나님의 언어와 성경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이 경건한 성도의 삶입니다. 또한 우리가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려움 당하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경건이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도와주되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남을 돕는 것을 자신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세속에 물든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관점이 아닌 성경적인 관점에서 나누고 베풀고 오직 믿음으로 실천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복을 받게 됩니다.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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