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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22
12월27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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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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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21X5f4mtzg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176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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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가정(聖家庭)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 필요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훌륭한 선생님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인간극장에 소개되어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주인공입니다. 선천성 시각 장애를 딛고 일반 중학교 비장애 학생들의 국어 교사로 당당히 교단에 서신 강신혜 선생님이십니다.
장애인으로서 일반학교 교사로 임용되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훌륭한 부모님과 든든한 안내견 미래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 때 하고 싶은 말을 몇십 번이고 반복해서 예행 연습하는 모습,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감동을 준 것은 첫 출근날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따님이 안내견 미래와 함께 잘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인사하며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수없이 예행 연습을 한 길이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출근길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을 나서자 마자 계단도 내려가야 하고, 횡단보도도 건너야 하고, 지하철도 탔다가 내려야 하고, 여간 복잡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첫 출근인데 늦으면 어떡하나? 미래가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컸지만, 씩씩한 미래의 도움으로 별탈없이 선생님과 미래는 학교 정문을 통과합니다. 선생님은 무사히 잘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환한 얼굴로 교무실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서부터 전철, 그리고 학교까지 20~30미터 뒤에 몰래 숨어서, 계속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출근길 내내 조마조마했던 어머니는 따님과 미래가 교문을 통과하자마자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행복한 얼굴로 뒤돌아섰습니다.
첫출근길 시각 장애인 따님의 뒤를 멀리서 조심조심 쫓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우리 인간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가까이는 아니더라도 저 멀리 뒤에서 우리를 따라오시리라 믿습니다. 여차하면 달려오시려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훌륭한 부모님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따님에게 확신 갖고 강조하셨습니다. 장애는 불행의 단초가 아니라는 것, 장애는 조금 다른 것일뿐이라는 것, 극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높은 벽 앞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항상 함께 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세상 안에서 결혼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모든 분들, 너나할 것 없이 세상 안에서의 교회, 성가정(聖家庭) 꿈꿉니다. 그러나 희망사항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엄청나다는 것을 매일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고 계실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초단기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확인하며 절규합니다. 한때 목숨바쳐 사랑했던 그였는데,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변하는 모습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외치며 울부짖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요 전부라고 여겼던 자녀들이 이제 머리가 커졌다고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심장을 찌릅니다.
성가정 건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한한 인내와 너그러움이필요합니다.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여유가 요구됩니다. 인간적인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시각,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나자렛 성가정의 멤버들도 순탄한 길만 걷지 않았습니다. 워낙 특별한 가정,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신비스런 가정, 영적인 가정이었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가서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성전에 있던 시메온 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을 팔에 안고 감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해 특별한 말 한 마디를 건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복음 2장 34~35절)
성가정의 주요 구성원이셨던 마리아 역시 성가정을 꾸려가는 동안 수시로 영혼이 칼에 꿰찔렸습니다. 물론 행복했던 순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가정 안에서 천국 체험도 앞당겨 맛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상처와 희생, 각고의 노력과 헌신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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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가정은 석탄에서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는 곳>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VYKcMTH0g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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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은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 아드님의 양부, 이렇게 셋입니다. 어마어마한 집안입니다. 이렇게 세 분이 모두 엄청난 분들이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세 분이 가정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모두 무엇이 되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그릇입니다. 예전에 철로 금을 만들려는 등의 연금술이 성행했는데, 어떠한 재료에 그렇게 변형될 수 있는 촉매제와 결합하는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그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공동체가 가정입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우선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성장하고 완성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석탄이 다이아몬드와 같은 원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석탄의 원소 구성은 매우 2차원적이기에 불안정하고 다이아몬드의 탄소 원자는 3차원적으로 매우 결속력 있게 뭉쳐져 있습니다. 2차원적인 분자구조를 변형시켜 3차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석탄도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3천℃ 이상의 열과 3만 기압 이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우선 3천도의 열과 3만 초고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대부분 물질은 이 열과 기압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지하 200km 이하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일을 해냈습니다. 1955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 연구소에서 처음으로 탄소를 이용해 인공다이아몬드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공다이아몬드는 현재 유리 칼이나 다른 금속재를 깎는 연마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자연산보다야 그 아름다움과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겠지만 흑연과 같은 것으로 보석과 버금가는 다이아몬드를 만들어내고 있기는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석탄으로 태어납니다.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잃었지만, 그 가능성만은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다시 하느님과 닮아지기 위해서는 엄청난 열과 압력이 필요합니다. ‘열은 은총’이고 ‘압력은 진리’입니다. ‘은총은 사랑이고 진리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과 진리가 인간 분자구조를 바꾸기 위해 생성하는 힘은 ‘믿음’입니다.
항상 예로 드는 것이지만, 늑대에게 자란 아이를 생각해 봅시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석탄의 상태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아직 인간이라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았기에 인간이란 분자구조를 가질 수 없습니다. 아직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이상 그 아이는 절대 두 발로 걷는 일은 없습니다. 몸만 인간이지 본성은 동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늑대 가운데 살고 있다면 절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행복하다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늑대라는 믿음을 이미 실현하였기에 행복합니다. 인간 눈으로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인간에게 발견된다면 인간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과 가르침, 즉 은총과 진리가 3천℃, 3만 기압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아이는 바뀌지 않습니다. 분자구조를 바꿀 믿음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발견된 늑대에게 키워진 이 아이들은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습니다. 머물기는 하되 그들의 믿음을 바꿔줄 사랑과 가르침이 그 정도를 채우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인간이 되려면 그 아이들의 친부모와 버금가는 사랑과 가르침을 지닌 공동체를 만나야 합니다. 그 공동체가 3천℃의 사랑과 3만 기압의 가르침을 가졌다면 그 공동체의 모든 인간은 반드시 자신들이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공동체가 이 아이들을 참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석탄을 보석으로 만드는 그릇입니다.
이런 면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를 참 인간으로 만들어줄 부모를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낳은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하는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믿음을 생성할 온도와 기압이 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 손에서 큰다면 그곳에서 머무는 것은 그저 허무한 고생일 뿐입니다. 가정은 이렇게 석탄에서 보석으로의 새로운 창조가 이뤄지는 공동체이고 그래서 부모는 이 세상의 작은 하느님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은 이보다 더 나아갔습니다. 어머니가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란 믿음을 지니신 분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위의 단계가 있다면 바로 성모 마리아가 그런 분이십니다. 여기서 실제로 새로 태어나는 분은 예수님이라기보다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과 하느님의 어머니가 여보, 또 아버지라 부르는 그 분위기에서 산다면 요셉 성인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꼭 부모가 자녀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자녀들 속에서는 그 사람이 부모라도 자녀들의 믿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믿음으로는 자녀가 부모의 부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 안에서 보석의 가능성을 보아야 하고, 교회는 새로운 가정으로서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흩어지지 않도록 잘 보존해야 합니다. 교회 자체가 자신을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면서 신자들 가정에서 자녀를 올바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가정이 참 인간이 태어나는 곳이라면 교회는 참 하느님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인간의 자녀들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 수 있는 온도와 압력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새고 있다면 막아야 합니다. 성가정은 한 가정의 믿음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교회 또한 어떤 믿음을 지켜나가야 하는지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그 온도와 압력을 품을 수 있는 수준이 안된다면 그 가정이나 교회는 누군가를 머무르게 만드는 것이 고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머물기만 한다면 석탄과 같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만드는 다이아몬드 제조 공장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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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8부 내 주일을 성가정축일로 지내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오늘 축일은 사실 성탄축일의 연장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도구 역할을 한 마리아와 요셉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에서 나자렛 가정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가정’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해준다. 우리는 나자렛 가정을 통해 자신들을 재발견할 수 있을 때, 올바른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 나자렛 가정이 항상 모든 가정의 모델로 제시되는 것은,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할 수 없는 사랑이 타오르게 하는 능력(에페 5,25-33 참조)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가정의 근본이다. 사랑이 없는 가정은 그 기능을 잃고 만다. 사랑은 가정을 하나로 만들고 그 안에 하느님을 모시는 교회가 된다.
제1 독서는 제4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공경을 드려야 할 때와 그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부모에 대한 공경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숭고한 인간성의 표현이며 신앙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즉 부모공경은 바로 자기의 죄를 벗는 길이며, 자기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보증이 된다. 그것은 가정이 주님께서 원하신 제도이며, 그분의 사랑 계획에 들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2,22-40: 아기는 자라면서 지혜가 풍부해졌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가정축제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은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생활, 즉 우리와 같은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 일상의 가정생활을 거쳐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신비스러운 잉태와 그 때문에 은밀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마음(마태 1,18-25 참조)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자렛 가정은 가정이 근본적으로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바로 요셉의 행위는 사랑에 근거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 봉헌으로 이해하는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행위’(22-24절)이다. 이 봉헌은 장차 십자가 위의 봉헌을 예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머니의 태중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그 생명을 사랑과 감사의 ‘봉헌’으로서 그분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라고 하더라도 막 피어나려는 생명을 질식시켜버린다면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불경죄까지도 범하게 된다.
셋째는 마리아가 아들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한다. 이것은 교육적인 가르침이 있다. 즉 가정을 이루는 사람 각자가 다른 가족들을 위해 살고 또한 그들의 문제를 자기 문제로 알며,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특성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39-40절). 이제 성가정은 단순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간다. 즉 모든 가정의 모범이 되기 위해 다른 가정들과 같은 평범한 가정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마 그 가정은 물질적으로 넉넉지 못한 가정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부족하지 않았던 것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는 무한한 사랑을 가졌고, 하느님께서 그 “아기”에 대해 특별히 쏟으신 사랑이 있다. 그러기에 그 가정은 하느님과 대화할 줄 아는 가정이었고 하느님의 은총과 빛을 향해 모든 것을 개방한 가정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나자렛 가정을 향한 영적 여행을 하여야 한다. 거기서 ‘가정’의 본질을 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자렛 가정이라고 해서 특별한 가정이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고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었던 그런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무에 충실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른 사람이 하느님 안에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을 우리도 본받아 닮아간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 앞에 승화시켜 계속적으로 봉헌할 수 있는 삶으로 그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가정을 이루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이러한 가정이 되도록 또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사도 바오로는 남편과 아내의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 의무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사랑의 기본적인 의무와 결부시켜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 존재의 본질이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이기 때문이다(콜로 3,12-14 참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당시 가족들의 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콜로 3,18)이라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의 사랑이다. 사랑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등 각 사람의 품위와 인격을 평등하게 인정케 한다. 그러면서 사랑으로 가족들 간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족들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19-21절 참조). 그러면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가정 공동체에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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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대공황 때에 미국의 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남편과 아내 그리고 여덟 살 난 아들은 서로에게 줄 성탄 선물에 관한 대화를 나눕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들은 받고 싶은 선물을 서로 그림으로 그려 주기로 하였습니다. 성탄 전야에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아내는 남편을 위하여 멋진 자동차를,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아들을 위하여 많은 장난감을 그려 주고받았습니다. 서로 그림 선물을 받고 기뻐하던 가운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엄마는 왜 저에게 선물을 달라고 하지 않으세요?” 그러면서 아들은 자신이 그린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위에는 ‘아빠’와 ‘엄마’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아들의 손을 꼭 쥔 부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큰 글씨로 ‘나의 가족’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 성탄 뒤 오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에 따라 맏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러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의 맏아들을 살려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자 바쳤던 이 예식을 통하여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 아기 예수님께서 선물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언자 시메온과 한나도 아기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시작을 인식하고, 이를 찬미가로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먼저 가정 안에서 펼쳐집니다.
아이들은 단순하지만 때때로 심오한 방법으로 문제의 핵심에 이르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 예화의 아들도 아기 예수님께서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가족의 삶에서 서로 지킬 것들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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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정, 가족>
1) 바리사이들이 혼인과 이혼에 관해서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부부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가족’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주신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가족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가족을 자기의 소유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착각에서 많은 비극과 불행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배우자를 선택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을 자기가 자신의 의지로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맺은 일’을 자기가 했으니 ‘푸는 일’도 자기의 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이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들은 부부의 만남은 ‘인연’이라고, 또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정을 이루는 일은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신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혼인과 가정을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믿는 우리는 그 ‘신의 일’과 ‘신의 힘’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곧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2)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말씀의 ‘형제들’을 ‘사촌형제들’로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가족을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신앙인의 가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하고,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이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 또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말은, 가정은 ‘내 마음대로(내 욕망대로)’ 해도 되는 세속의 집단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정생활’은 언제나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과 가정생활이 하나인 사람입니다. 가정은 가족으로 이루어진 ‘작은 교회’이고, 교회는 신앙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큰 가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곧 여러분이 불륜을 멀리하고 저마다 자기 아내를 거룩하게 또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1테살 4,3-5)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더러움 속에서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1테살 4,7) 이 말은 남편들에게만 하는 권고가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모든 사람에게) 하는 권고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통해서, 또 가족과 함께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가정은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3) ‘버림과 따름’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겉으로만 보면, “가정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공동체”라는 앞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은 가족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가족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고, 가장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족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이고, 신앙 여정의 동료입니다. 만일에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으로 간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4) ‘따름과 보상’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루카 18,29-30)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가족을 버려야 한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애착심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가족이 여러 곱절로 늘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 ‘영원하고 참된 사랑’으로 완성되고 충만해진다는 뜻입니다.
5) 부활에 관해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부활 후에는 가정이 해체된다는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모든 가정이 영원하신 하느님 안에서 하나의 가정으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가정생활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성된 가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들을 초월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가족부터 먼저 사랑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되고, 그 사랑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증폭되어야 하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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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12월 27일은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그러나 오늘이 주님 성탄 다음에 오는 주일이기에 사도 요한의 축일 대신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 가정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요한 사도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요한 사도는 기꺼이 자신의 축일을 성 가정 축일에 양보하는 것 같습니다. 전례력으로 요한 사도의 축일을 지내지는 않지만 축일을 맞이하는 모든 분들에게 축하를 드립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저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양보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성 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화목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화목한 가정은 가족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이 아프면 맑은 날에 먹구름이 끼듯이 걱정과 근심이 생깁니다. 정신적으로 아픈 가족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습니다. 모두가 건강하면 좋겠지만 뜻하지 않게 아픈 가족이 생기곤 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궁핍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이 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직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실직은 가정에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대화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같은 취미활동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가는 것도 좋습니다. 추억이 있으면 대화할 수 있는 소재가 됩니다. 화목한 가정은 같은 신앙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감사드리고, 슬픈 일이 있으면 함께 위로하고, 가족들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같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있는 가정과 신앙이 없는 가정은 어려운 상황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나자렛의 성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 가정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성모님은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순명은 성 가정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성 가정의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비록 가족이 건강하지 못할지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대화가 부족할지라도, 신앙이 서로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성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 성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 소경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나병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육상 경기는 항상 출발선이 있습니다. 이 출발선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사회생활, 경제생활, 국제 경쟁력을 키우는 모든 것의 출발은 바로 가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요, 교회입니다. 이 가정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와 윤리를 배우게 됩니다. 인류의 구세주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도 바로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에서 출발했습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기도하는 가정, 이웃을 돕는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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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가정>
루카 2,22.39-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예수님의 유년 시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성가정>
내가 나일 수 있는 곳
네가 너일 수 있는 곳
내가 나이어도 되는 곳
네가 너이어도 되는 곳
내가 너를 너이게 하는 곳
네가 나를 나이게 하는 곳
내가 나이기에 네가 되는 곳
네가 너이기에 내가 되는 곳
나도 있고 너도 있지만
나와 나 없이 우리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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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요소의 집합체>
+ 찬미예수님
재작년 이맘 때 즈음 저는 알프스 남부의 꼬모 호수가 있는 지역에서 고해성사 전담 사제로 성탄을 보냈습니다. 한 주간 동안 하루 종일 고해소에 앉아 수 없이 많은 신자분들의 고해를 듣는 일정이었는데,
그 당시 만난 주임신부님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나이가 너무나도 많이 들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던 신부님은 성탄절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 저를 초대하시며, 그날 특별히 하느님이 우리 가족들에게 주신 빛나는 존재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이 다가왔고 가족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저는 신부님이 말씀하신 그 소중한 존재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쓴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선 것이었습니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거동이 힘들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다운증후군으로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어린 아이. 아마 이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분들은, 얼핏 생각만 해도 여러 가지 수고로움이 필요하겠다며 고개를 저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식사자리는 제가 초대받은 어떤 곳보다도 밝고 아름다운 식사자리였습니다. 아이를 위해 온 가족이 함께 노래로 식사 전 기도를 바치는 모습,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어머니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자녀들과 손주들의 모습, 기타를 들고 캐롤을 부르기 시작하자 가운데에서 신나게 춤을 추던 다운증후군 아이의 모습, 그 아이를 지켜보는 가족들의 웃음 소리. 그 모습들 하나하나가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며 왜 그렇게 그들이 아름다워 보였을까 곱씹어 보았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가정에 초대를 받았지만 왜 그들의 가정이 특별하게 보였을까에 대해서 말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평범하지 않은 요소들, 즉 우리가 불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 때문이었습니다.
세속의 눈으로는 불행이라 여길 수 있는 구성원들을 그들은 장애물이라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도 당연한 듯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들은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이리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에 대한 수고는 당연한 것이 되고 자칫 짐처럼 여겨지기 쉬운 상대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성가정이 이루어집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원하는 성가정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가정이라고 했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거룩하고 평안하며 행복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이 이룬 가정은 과연 어떠했을지요.
사실 이 가정은 우리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과 매우 다릅니다. 세속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요소의 집합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를 정리해 보자면, 첫째로 이 가정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집안이었습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는데 당시 목수란 막일을 하던 사람들에 속하는 계급이었습니다. 이는 곧 농사지을 땅이 없음을 의미했으므로 이 가정은 재산이 없는 노동자 계층의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가정은 불신과 오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으므로 요셉은 마리아를 오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롭게 살아온 요셉이 남몰래 파혼하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의 불신과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 가정의 자녀는 그야말로 부모의 속을 뒤집어놓는 자녀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잃어버렸다가 겨우 찾아내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들은 이 아들을 두고, 먹보요 술꾼이며 죄인들하고만 어울린다고 수근댑니다. 아들을 찾아간 어머니에게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로 마치 어머니를 부정하는 듯한 이야기마저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가정은 처절한 고통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요셉은 아들의 공생활 전에 죽음을 맞이하여 마리아는 일찍 과부가 되고 그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눈앞에서 처절히 죽어갑니다. 우발적인 사고도 재해도 아닌 사람들의 질투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불행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가정을 우리는 성가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이 모든 불행의 요소를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받아들였으며 이에 따르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가난이 그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고, 불신과 오해는 천사의 도움을 통해 말끔히 씻겨집니다. 아들의 모든 언행이 하느님을 위한 일이었음을 부모는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느님의 사업을 위한 영광스러운 과정이었음을 마리아는 이미 순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 그 모두를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하느님의 섭리와 도우심이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되며 실제로 주님께서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 코로나로 인하여 모두가 힘든 시기, 이 안에도 우리가 배워야할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시기를 모두가 힘을 합쳐 잘 이겨 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일어난 이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사라지길 오늘도 내일도 함께 기도하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사회에 협조하며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지금 이 순간, 세상 안에서 서로의 건강을 지키고 바이러스를 몰아내는 일이 하느님의 사업을 위한 영광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이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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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홍헌표 베드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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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시작되는 가정 공동체>
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정하고 이 주간을 가정성화 주간으로 보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이 시기에 정작 가장 중요한 기본 공동체인 가정을 소흘히 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시다.
우리 가정의 주인이 바로 하느님이신지,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희망 안에 우리가정이 세워져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참된 신앙인이 되었을 때, 바로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모두 ‘무엇인가 되려고만’ 합니다. 어른들은 자녀에게 말합니다.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라’, ‘너는 커서 판검사가 되어라’ 모두가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서로 경쟁을 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기보다 나의 경쟁상대로 여기기도 하고, 나의 이용 가치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과 성모님께서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 아니라, 무엇이 되어 주기 위해 한 생을 사셨습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노력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구원을 가져다주실 분의 어머니가 ‘되어주는’ 일생을 사셨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줌’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을 완성한다는 것을 성모님과 요셉께서는 가르쳐 주십니다.
의사가 되는 것보다 아픈 이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판검사가 되는 것보다 의로움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아내를 얻었는가 하는 것보다 그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좋은 남편을 만났는가 하는 것보다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어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내 말을 잘 듣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어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가정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 혹은 자녀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 가정을 거룩한 성가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가정의 시작은 다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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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교구 김한기 시몬 신부님]
<나자렛의 성가정>
미국 샌디에고 교외의 큰 저택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저예요. 저 지금 돌아왔어요."
전화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들의 목소리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들이 제발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빌어온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거렸다.
"어머니,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런데 엄마, 친구 하나를 데리고 왔어요. 그 친구는 몹시 다쳤어요. 하지만 딱하게도 그 친구는 갈 집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동안 소식이 없었던 아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무렴, 그래라. 우리와 당분간 같이 살자꾸나. 지금 어디 있니. 빨리 오거라."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당분간이라는 말을 듣고 그 친구와 떨어질 수 없다며 늘 함께 살겠다고 했다. 아들의 억지에 못이긴 어머니는 할 수 없이 한 일년쯤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그 친구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요. 그 친구는 몹시 불쌍한 친구예요. 외눈에, 외팔에, 다리도 하나밖에 없어요."
몇 년 만의 통화였지만 성급한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말했다."얘야, 너는 너무 감상적이구나. 넌 지금 전쟁터에서 돌아왔어. 그 친구는 결국 너의 짐이 될 거야." "짐이 된다고요?" 아들은 어머니가 채 말을 잇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애타는 마음으로 어머니는 아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들의 연락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군본부에서 전보 한 장이 날아왔다. 아들이 샌디에고 호텔 1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집으로 아들의 시체가 돌아오던 날, 어머니는 그만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아들은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였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떤 고통과 시련 앞에서도 가족들은 서로를 따뜻이 감싸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잘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가족으로부터 고통을 위로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마지막 주일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지내도록 한 것은 가정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는 원초적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 흐르는 따뜻한 혈연의 정이 우리 사회를 지키는 근간이 되기에 가정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부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가정을 작은 교회(Domestic Church)라 하지 않았습니까?
가정공동체야말로 최초의 배움과 삶의 터전, 못자리인 것입니다.
이 터전 안에서 우리의 삶은 성숙되어가고 온갖 고통과 괴로움 중에 위로를 받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 기도와 가족 간의 대화의 부재로 인해 많은 가정이 깨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물어 가는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가족들끼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서로 서로에게 마음 아프게 한 모든 것을 용서 청하고 화해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마리아, 요셉 세 분이 보여주셨던 나자렛 성가정을 본받아 오늘 하루만이라도 가족들이 모두 함께 주일 미사에 참석하여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고 "새 하늘, 새 땅"(묵시록 21,1)을 열어가는 성가정을 이루어나갈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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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신동걸 바오로 신부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며 완성되는 성가정>
사람의 삶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 사람,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은 관계 속에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좌절, 우정과 배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참된 행복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관계는 계산하고 따지는 이기적인 관계가 아니라 내어주고 덮어주며 보듬어주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첫 자리는 바로 가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족들 안에서 큰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며, 또 희망과 기쁨을 크게 누리고 소중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도록 우리에게 가르치고 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께서 이루셨던 성가정을 가정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에 대해서 성경은 단편적인 사실만 증언하기에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의 관계는 정말 계산 없는 사랑의 관계였음이 분명합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인한 성자의 잉태, 혼인,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이집트로의 피신 등 그 모든 것을 당신들의 삶 안으로 받아들이신 것은 단지 천사의 알림 때문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분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결코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혼인 전에 목숨을 걸고 성자를 잉태해야만 되는지, 또 그런 약혼녀를 왜 부인으로 맞아들여야 되는지, 그리고 왜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굿간에서 출산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결혼 전에 임신한 부인과 아기를 위해서 왜 마음을 졸여야 하는지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결코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두 분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그리고 하느님을 너무나도 신뢰하셨기에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성탄으로 성가정이 되었다는 이해보다는, 두 분의 소중한 사랑의 관계를 성부 하느님께서 선택하셨고 그 사랑의 관계 안에 성자의 잉태, 성탄, 성장 그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도 요셉 성인과 성모님처럼 서로 사랑하기에 만났으며 사랑하기에 계산이 없는 가족이 된 것이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자녀들을 성부 하느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고통과 시련을 겪으신 것처럼 모든 가정도 나름대로의 아픔과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모든 시련들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섭리와 성자의 성탄을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지켜야 됩니다. 모든 가정은 소중합니다. 성가정은 하느님과 가족들에 대한 계산 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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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길가에 붕어빵을 파는 노점상이 있었습니다. 이 노점상에는 가격을 알리는 푯말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나에 300원, 세 개에 천 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 개를 사면 더 싸야 하는데, 이 가게는 여러 개 사면 더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이 가격 푯말이 너무 이상해서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서 이렇게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세 개를 살 만큼의 돈이 없거든요.”
이런 이유로 적게 살수록 오히려 이득이 될 수 있도록 가격 책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라서 실제로 이런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전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배려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합리적이지 않더라도 배려하는 마음이 드러난다면 함께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떨까요? 가족 안에서 합리적일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줬으니, 나도 하나를 받아야 한다는 철저히 계산적인 사고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유일한 법칙이 있다면 사랑의 법칙이지요. 받은 것이 없어도 기쁘게 모두 줄 수 있다고 하는 사랑의 법칙입니다. 사랑만 있다면 어떤 불합리도 인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가정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만든 성가정을 기념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이 가정 안에 세상의 합리적인 기준들이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순간부터 세상의 합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랑 때문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지켜야 할 사랑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메온의 예언처럼, 성모님의 영혼이 칼에 찔리는 아픔도 있었지만,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는 사랑이 충만한가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 보면, 그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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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
어느 형제님께서 신부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계속 성당에 나와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신부님 강론을 계속해서 듣고 있지만, 단 한 편도 기억하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기억도 하지 못하는데, 굳이 성당까지 나와서 시간 낭비를 해야 할까요?”
이 말을 듣고서 신부님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형제님, 혹시 일주일 전에 드셨던 저녁 메뉴가 기억나십니까?”
“아니, 일주일 전에 먹었던 것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오늘 아침에 먹은 것도 기억나지 않는데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형제님, 메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굳이 식사를 왜 하십니까? 식사하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으셨습니다. 이 형제님은 “신부님, 식사하지 않으면 제가 살 수 없잖아요.”라면서 당연한 것을 뭘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음식 메뉴를 기억하지 못해도 내가 살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처럼, 강론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성경 말씀이 기억나지 않아도 성당에 나오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영적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나가야 하는 이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이유.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억나지 않아도 반드시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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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가정>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 성가정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각 가정에 행복을 더해주시길 희망합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를 기억해 봅니다. 포드는 대기업을 일으킨 후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지었습니다. 그 집은 대기업의 총수가 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호화롭지 않더라도 생활에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걱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얼굴에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하였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닙니다.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이 넘친다면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집이지요. 가정이지요.”
지금도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 가면,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가졌기 때문에 자동차를 만들었고 그의 성공 뒤에는 꿈꾸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함께 이룬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가정의 핵심은 바로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느냐? 기도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회서를 보면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 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3,4).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새서 3,3,12이하)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 된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들볶지 않는 가운데 화목함을 이루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알렐루야를 노래하실 때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하셨는데 이 외침이 하나의 공허한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고, 말씀이 마음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정을 보십시오. 아버지 요셉은 목수 일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의 말을 믿고 마리아를 받아들였으며 거기에서 오는 어려움을 묵묵히 잘 견디어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을 하였고, 아들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랐으며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 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때가 되기까지 나자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사랑을 받았고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어려운 처지와 상황, 예기치 않은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신뢰와 순명, 그리고 사랑이 넘쳤습니다. 각기 고유한 역할 안에서 한마음 한뜻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성가정의 모범입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서로 간에 기대를 채우지 못해 상처를 주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벽을 쌓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찾기는커녕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기까지 합니다.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손해 보는 일, 희생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식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당신도 이만큼은 해야 되지 않느냐며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13,8)
요한 사도도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 3,1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우리 삶의 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이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가정이 성가정입니다.
우스갯 소리가 있습니다. 똑똑한 아들은 나라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이랍니다. 그리고 골치 아픈 아들은 평생 내 아들이래요. 초등학생 때까지는 일촌이지만, 아이들이 커서 중학생이 되면 벌써 사촌이 되고, 대학을 가면 오촌 아저씨가 됩니다. 장가를 들면 8촌이 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사돈의 팔촌이 된답니다. 이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남이 되어가는 것은 사랑의 끈이 그만큼 느슨해지는 탓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행복의 원천이며 모든 해답이 거기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말씀과 함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하느님을 내 마음 안에 모셔 들이면 육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고 생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생활양식이 바뀌고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고 행하는 성 가정이 되길 기도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파수가 헛되리라”(시편127,1).고 했습니다.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행복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부족했던 모든 것에 대해 자비를 간구합니다. 아울러 새해에는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실천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내년은‘코로나19’가 종식되고, 평화로이 서로의 만남을 이룰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를 자유롭게 봉헌하고, 참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희망의 2021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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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가정 공동체>
-중심, 기도, 공존, 사랑-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자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또 오늘부터 한주간은 가정성화주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공동체의 기초이자 보금자리 품으로서의 가정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공동체의 파괴와 분열, 불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결정적 상처를 입는지요. 결손가정의 아이들만 봐도 그 결핍된 사랑의 피해는 평생 갑니다.
모든 공동체의 원형이자 모범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새벽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과 아름다운 찬미가로 성가정 축일을 시작한 우리 요셉 수도 가정 공동체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공동체의 모습을 닮아가려 노력하는 우리 요셉 수도원 공동체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온유하고 겸손은 순종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역시 순종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이어지는 아름다운 찬미가 2절까지만 인용합니다.
“나자렛 오막살이 순박한 예배 얼마나 감미로운 기억일는가
나자렛 예수님의 고요한 생활 그 생활 기억하며 노래들하세
요셉의 비천한일 배우시려고 숨어서 청년기를 지내신 예수
묵묵히 일하시는 아버지닮아 목수일 동반자가 되시었도다.”
새삼 가정 공동체에서 부모를 보고 배우는 신앙 교육이 자녀들의 인성, 감성, 영성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번 미사는 노래하지 못하지만 해마다 오늘 축일 미사중 노래했던 제1독서후 화답송은 얼마나 흥겨웠던지 오늘은 수도원 산책시 맘껏 부르려 합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자 얼마나 행복되리”
마침 어제 성가정 축일을 앞두고 믿음 좋은 40년전 초등학교 제자로부터 받은 지리산 꽃감 선물도 잊지 못합니다. 원장수사가 집무실 앞에 대형 박스의 선물을 갖다 놓았고 열어보니 제자의 편지와 함께 작은 꽃감 박스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제자가 택배로 보내준 꽃감 선물 문앞에 갖다 놓으셨네요. 감사합니다.”-
원장 수사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제자와도 사랑의 메시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너무 큰 선물 고맙다. 수도공동체 형제들과 잘 먹겠다!”
“오늘 도착해서 너무 다행이예요. 늘 저희 가정을 위해 축복기도해주시고 동현이 아들도 기억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저는 선생님께 매일 강론 선물을 받고 있는데요.”-
선물중의 선물이, 하느님 최고의 선물이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모두가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이런 성가정 공동체는 말 그대로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완성된 이상적 하늘 나라 공동체는 없습니다. 받은 선물 공동체를 부단히 사랑과 정성의 노력을 다해 가꾸고 돌볼 때 하늘 나라 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사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보금자리 성가정 공동체를 밝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저는 온갖 순교적 열정과 노력을 다해 지혜롭게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가는 부부들을 보면 지체없이 성인이라 부르며 격한 찬사와 더불어 구원을 선언합니다.
“형제자매님은 성인부부입니다. 가정을 잘 지키며 자녀를 잘 키우는 일보다 더 숭고하고 중요한 일은 없으며 그 책임의 일을 다할 때 구원입니다.”
참으로 ‘졸혼’이니, ‘비혼 출산 법제화’니 요상한 말마디들이 난무하는 시절에 한결같이, 충실히 성가정 공동체를 꾸려가는 거룩한 자매들을 대하면 저는 감격과 감사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녀, 자매님!’이라 부르며 격려 멧시지를 보내곤 합니다. 저에게 선물을 보낸 제자 역시 이런 훌륭한 자매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가정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지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중심을 잡으십시오.
함께 모였다 하여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유기적 생명의 공동체가 진짜 살아있는 공동체입니다. 모래알 집단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실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형제들이 됩니다. 혈연공동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끊임없이 성가정 공동체로 업그레이드 되어야 비로소 하늘 나라 공동체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봉헌합니다. 철저히 하느님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임을 입증합니다. 역시 하느님 중심의 의롭고 독실하게 봉헌의 삶을 살다가 탄생하신 주님을 만나 감격스럽게 찬미가를 바치는 시메온 성인입니다. 이 시메온 찬미가는 우리 수도자들이 끝기도때마다 바치는 찬미가이기도 합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던 한나 성녀 역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하느님 중심의 삶에 헌신하다 탄생하신 구원자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모두는 개인의 삶이건 공동체의 삶이건 주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서로 좋아서, 성격이, 취향이 같아서 살기로 하면 얼마 못가 공동체는 공중분해됩니다. 참으로 다 달라도 바라보는 방향의 중심인 주님이 같기에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살아갈수록 주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성가정 공동체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 중심을 잃어, 중심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표류하는 공동체요 무너지고 파괴되는 공동체입니다.
둘째, 말씀 공부와 기도에 항구하십시오.
주님 중심의 삶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견고해지는 주님 중심의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부단한 기도가 부단한 회개에로 이끌고 공동체 형제들은 기도와 회개의 은총으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와 겸손의 주님을 닮아갑니다.
참으로 기도없이 주님 중심의 공동체 형성은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성공적 성가정 공동체를 살기 위해 기도는 필수입니다. 바로 이것은 제 수도공동체생활 40년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요셉수도원에서의 32년 공동체 생활이 가능했던 것도 순전히 매일 평생 한결같이 함께 바쳤던 공동전례기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주변에서도 성공적 성가정 공동체를 이뤄 사는 분들을 보면 가정 기도가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저절로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먹어야 비로소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하여 저는 주저없이 성가정 수도공동체의 보이는 중심은 성당聖堂과 식당食堂 둘이라 말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제2독서에서 말씀과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역시 말씀공부와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이렇게 주님 중심으로 기도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비로소 주님 반석위에 튼튼한 공동체로의 성장과 성숙이 가능합니다. 이런 기도의 수행 부족으로 중심을 잃고 무수히 부서지고 무너지는 사상누각砂上樓閣 같은 개인이나 공동체는 얼마나 많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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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복음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루카 2,22)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명한 대로 아기를 주님께 봉헌합니다. 율법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질서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지요. 이 모두를 행하는 선량하고 소박한 부부의 모습을 관상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참되고 순수한 이들입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성령께서 의롭고 독실한 시메온을 성전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만남의 순간은 그가 평생을 걸고 기다려온 "주님의 때"입니다. 그간 성전을 스쳐갔을 무수한 권력자와 학자, 부자들에게서가 아니라, 가난한 부부가 안고 온 작고 여린 아기에게서 주님의 구원을 볼 수 있는 영의 시력이 놀랍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께 일생을 의탁한 이의 바람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시니, 성삼위 하느님의 비밀, 그 신비를 그에게는 감추지 않으십니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아기를 안고 기쁨에 차서 올리는 시메온의 찬미는 아기와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으로 가득합니다. 이 내용은 아기의 부모가 천사에게서 들은 그대로이니, 그들은 마음속에만 품고 있던 비밀을 예언자의 입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하지만 시메온는 듣기 좋은 덕담으로 그치지 않고 진정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이니까요. 아마도 성모님께는 이 귀한 아기가 반대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다는 말이, 당신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는 예언보다 더 놀랍고 아프셨겠지요.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36-37)
이 은총의 순간에 한 사람이 더 초대됩니다. 성경 안에서 이곳에만 잠시 등장하는 예언자 한나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눈에는 박복하고 불쌍한 인생일지 몰라도 하느님과 일치를 누리는 복된 여인이지요. 이렇게 성전에서 주님이 봉헌되는 순간은 두 증인을 통해 세상 역사에 새겨집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루카 2,39)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래아, 그중에서도 작고 소박한 고을 나자렛에 성가정이 둥지를 틉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여정에 함께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성가정 축일은 예수, 마리아, 요셉께서 꾸리신 성가정의 모범을 기억하고 본받고자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가 성가정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노력하면서도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체험으로 알지요. 저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성가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1독서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듣습니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집회 3,6)
오늘 집회서의 권고는 누가 누구에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일방적 명령이 아니라 관계성의 근원을 이야기입니다. 부모, 자녀가 맺는 관계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분의 모상인 사람을 짓밝을 수는 없지요. 혹 그런 이가 있다면 그가 주장하는 하느님과의 관계는 거짓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가 존중하는 "사람" 범주 안에 부모도 있고 자녀도 있으며, 형제자매와 이웃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는 이 관계성을 유지하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콜로 3,12)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하게 창조된 사람인지 아는 이는 "~~다움"을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요! 이 앎이, 여러 모로 부족한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경외하게 하고, 사랑받는 존재답게 살도록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콜로 3,14)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이는 주어진 모든 것을 사랑으로 엮어갑니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와 이웃, 일면식 없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까지 사랑의 울타리를 넓혀가지요. 성가정은 이 사랑의 확장을 통해 가정에서 공동체, 사회, 민족과 국가를 넘어 온 세상을 하나의 공동체로 아우르는 신비입니다.
관계적 어려움 속에서 성가정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관계성의 근원을 되짚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인 하느님, 어머니인 성모님, 형제인 예수님, 그리고 나. 우리의 관계는 어떤가요? 하느님을 경외하고 성모님을 사랑하며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나"답게, 이 관계성에서 솟아나는 사랑의 에너지로 가족과 공동체의 구성원을 바라보고 대하는 과정 안에서 성가정이 형성되어 갈 것입니다.
작고 여린 아기 예수님이 우리 품에 안겨 당신을 우리에게 온전히 맡기시니, 부성과 모성을 총동원해 조심스레 사랑하고 아껴드립시다. 하느님처럼 자비로이 다독이고, 요셉 성인처럼 묵묵히 보호하고, 또 마리아처럼 헌신하며 사랑을 엮어갑시다. 성가정의 신비가 기적처럼 나에게서 시작될 것입니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자녀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을 통해 온 세상이 성가정이 되어갈 것이니 감사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우리 가정과 공동체를 돌보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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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가정”은 모든 생활과 관계의 기초이며,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파괴되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파괴되고, 가정이 새로워지면 사회도 국가도 공동체도 교회도 새로워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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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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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했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2,40)
오늘은 '성가정 축일'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이 성가정을 이룬 것처럼, 우리도 성가정을 이루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성가정'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참가장으로 머물러 있는 가정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가정 안에 있고, 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있는 가정입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초석이며, 성소의 뿌리이며 기틀입니다. 가정은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는 첫 스승이 되는 자리이며, 사랑의 학교입니다.
때문에 가정의 행복은 세상과 교회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면 그것을 기초로 해 서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3월 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에 반포하신 세 번째 권고문인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을 통해서 혼인과 가정의 중요성을 강하게 언급하시면서, 개인주의와 물질주의 속에서 무너져 가고 있는 가정,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가정, 잠시 머무는 기숙사와 같은 가정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리자고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성 요셉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반포하신 교서 '아버지의 마음'(Patris corde)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셉 성인을 사랑받는 아버지, 온유한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 순종하는 아버지, 용감하고 창의적인 아버지, 노동하는 아버지, 그늘에 가려진 아버지로 묘사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려면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버지가 살아나야 합니다. 성 요셉이 간직하고 있었던 모습을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아버지가 살아나고 어머니가 살아나고, 가족 모두가 살아나는 성가정! 서로가 서로에게 순종하고 사랑하는 성가정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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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FQc4Lnd3B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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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 2, 13)
나자렛 성가정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성탄은
이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헤쳐나가는
성가정의 탄생입니다.
구원의 첫 시작 또한
성가정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개인주의를
치유하는 공동체로
우리를 이끌고갑니다.
하느님의 모상 대로
창조된 우리들은 결코
소외된 존재가 아닙니다.
가식과 위선이 아닌
사랑과 믿음의
자녀들입니다.
믿음의 성가정은
크고 작은 일상에서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공동체입니다.
성가정의 가치는
공동체의 가치입니다.
공동체의 가치는
공동체적
삶의 모습으로
바꾸어주는
가정교육에 있습니다.
성가정의 교육이란
하느님을 향하는
반성과 변화
함께하는
실천의 삶입니다.
다시금 기본과
신뢰로 돌아가는
성가정 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행복을 나누고
삶을 배우는
인격의 여정이
바로 성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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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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