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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구덩이에서 부르는 이름 3:55~59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
대적들의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3:60~66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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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레미야는 깊은 구덩이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가 주님께 아뢴 날에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의 원통함을 풀어 주시고 생명을 속량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비방하며 모해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보응하시고 저주를 내리시며 그들을 멸하시길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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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구덩이에서 부르는 이름 3:55~59
성도에게는 절망 중에 부를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대적들의 집요한 공세에 예레미야는 절망합니다. ‘심히 깊은 구덩이’(55절)는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위기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여’, ‘주여’라고 주님 이름을 외치며 간구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위기 상황에서 주님 이름을 찾으면 주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현재 고난 가운데서 주님 이름을 부릅니다. 과거에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위로하시며 그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지금 백성이 당하는 분하고 억울한 일 또한 주님이 풀어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도의 소망입니다. 과거에 공의로 행하신 하나님은 현재도 공의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레미야는 절망의 상황에서 누구의 이름을 불렀나요?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며 내가 하나님께 간구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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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들의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3:60~66
하나님은 사람들의 언행을 다 지켜보십니다. 예레미야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대적들의 조롱과 모해하는 말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을 주목해서 보시고,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64절) 그들에게 보응해 저주를 내려 주시길 탄원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진노로 대적들을 뒤쫓으셔서 그들이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교훈(마 5:44)에 익숙한 성도에게 예레미야의 고발은 낯섭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요청은 개인의 복수를 위함이 아닙니다. 공의의 심판에 대한 요청입니다. 즉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대적들에게도 분명히 알려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대적들의 조롱과 모해로 인해 예레미야는 어떻게 기도했나요?
사람의 언행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금할 것은 무엇인가요?
한절묵상:예레미야애가 3장 57절
위기 때에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찾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문제라도 하나님께 가져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당면한 문제보다 더 큰 위기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20). 어떤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하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믿음의 성도는 오늘도 기도로 그 문을 엽니다.
기도는 영혼의 안녕을 위한 초석이다. - 마르틴 루터
오늘의 기도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음성이 삶 구석구석에 울리기를 간구합니다. 깊은 구덩이 같은 고난과 슬픔이 지속되어도 하나님이 제 기도에 귀 기울이고 계심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모든 인생을 보시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80 나의 생명 되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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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 선지자가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여호와께 간절히 구원을 호소하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덩이에 서너 번 빠진바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의 미움과 질투를 사 투척된 것입니다.
한 번은 그가 예루살렘 성에 머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는 예언을 합니다.
그 말에 진노한 백성과 장로들이 합세하여 그를 깊은 우물 같은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하지만 당장은 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물이 없는 진흙탕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곳을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홀로 그곳을 탈출할 수 없는, 사나운 짐승들을 잡으려고 파 놓은 구덩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들 도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워낙 사람들이 싫어하는 말들을 예언했기에 예루살렘 거민은 모두 그를 증오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주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 당시 리더급 내시가 구스(고대 이디오피아)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왕에게 직언하여 예례미야를 구출해 주었던 것입니다. 유대 나라 전체에 사리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이방인 한 사람이었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 구출된 예레미야는 사역을 계속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고생을 하면서도 그가 선지자의 험난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주 젊은 나이에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태에서 나오기 전에 구별하였고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야하며, 무엇을 말하든지 말하라고 합니다. 아울러 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입니다.
그가 결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권리마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포기할 수 있던 것은 그에게 지속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돌보시는 섭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들을 아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훈련하시고 간섭하십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체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 갑니다.
예레미야가 예레미야가 된 것은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 크고 작은 체험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알아 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처럼 단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그런 삶이되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뜁니다.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을 만날 것이니까요.
믿음이 왠지 앞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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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실현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의를 말할 때 어려운 이유는 자신을 향하지 않고 정의를 행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불의의 크기를 비교하고 잽니다. 그리고 더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죄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크기 측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또 서로 싸웁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정의는 밖으로보다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항상 제일 먼저이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의를 지키는 것은 씁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먼저 정의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파괴라는 엄청난 심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그들은 이웃한 다른 나라들보다는 죄를 조금 범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옆에서 조력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정의를 말할 때 항상 자기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남은 여력으로 이웃에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웃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도 응답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심판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이웃의 모든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믿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한 일에 대해 이웃에게 하나님께서 정의를 물어 심판이 일어나는 일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웃에게도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임한 심판은 정의는 이루어질지언정 그래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눈뜬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한 이웃에게 임하는 심판이 없을 때가 많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와 동반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정의의 칼은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할 때가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마7: 3.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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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모든 환난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원수들의 조롱 때문에 마음이 더욱 괴로웠습니다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애3:63)
그들은 온갖 비방과 모욕으로 조롱했습니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애3:61~62)
이러한 조롱은 최소한의 마지막 겨우 남은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다윗도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시22:6)
예수님도 조롱 당하셨고 멸시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그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우리도 조롱 당할 것입니다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믿음을 조롱할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그러나 그들은 세상 악인이요 성령 없는 자에 불과합니다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8~19)
그러므로 우리는 조롱하는 자들에게서 눈을 돌려 오직 더 큰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며, 담대한 마음으로 잠잠히 우리 주님의 긍휼을 기다리기 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그리하면 주께서 우리의 모든 억울함을 돌보시고 원통함을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애3:59)
조롱하던 자들은 여호와의 하늘 아래 있지 못하게 불로 멸하실 줄 믿습니다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애3:66)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시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 피하여 안전할 줄 믿습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5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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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사야 43:14, 47:4-5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 구속자라는 말은 ‘가알의 명사형 ‘고엘’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포로된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실 ‘기업 무를 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주께서 진노하셨고 매를 치셨다고 원망하던 시선에서 이제는 구속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고엘이 되셔서 속량하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주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9절부터는 주께서 보셨사오며 들으셨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보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며 그들이 나를 비방하고 모해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해서 보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확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롱의 말을 모두 듣고 계시고, 그들의 모든 행사를 훤히 꿰뚫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소망이 되어 치유와 회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절망에 찬 탄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공의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보다 더 심한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그분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슥 1:15절입니다.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그럽니다. 즉, 이스라엘을 공격한 원수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임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거만한 마음을 주셔서 그들을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3장은 애가의 중심입니다.
3장은 이스라엘이 범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을지라도,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새로운 회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 관점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보시고 들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되어 속량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애가 3장은 변화의 장이며 믿음의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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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고난(3:55~59)
선지자는 자신과 백성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전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깊은 구덩이에 던져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절망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간구를 들으시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에 위로를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과거에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선지자는
이제 국가적 탄식과 절망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자신과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오늘의 고통을 헤쳐 나가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성도는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간구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선지자는 깊은 구덩이에 갇혔을 때 어떻게 했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어떻게 하셨나요?
- 적용 질문: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의 구덩이,
사방이 막힌 것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보응을 바라는 기도(3:60~66)
유다 백성은 원수들에게 비방과 모해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 분노하며 스스로 복수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선지자는 원수들의 악행과 악담을 하나님이 다 보고 들으셨음을 믿기에 그들의 처분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유다 백성을 조롱하는 원수들을 주목하시고, 원수들이 행한 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응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원수들은 도에 넘게 유다를 억압하며 짓밟았습니다.
이에 선지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로 원수들이 완전히 파멸되길 간구합니다.
이러한 탄원은 모든 것을 살펴보시는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원수 갚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스스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원수에게 보복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선지자는 어떤 믿음으로 원수들의 처분을 하나님께 맡겼을까요?
- 적용 질문: 나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존재에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방식일까요?
오늘의 기도
제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귀를 막지 않으시고 저를 가까이하실 것을 믿습니다.
힘들 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응답해 주시고,
억울할 때 ‘너와 함께한다!’라고 위로해 주심으로 제 온 삶에 주님의 발자취가 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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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구원하소서
55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절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주목하여 보소서
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절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절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절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절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보응하고 멸하소서
64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절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절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전체: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시은 비록 지금 주님이 침묵하시고 진노의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셨지만, 자기 백성의 절절한 탄원을 듣고 처참한 고난의 현장을 보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옛 경험’이 그를 굳은 신뢰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삶에서 경험했던 크고 작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 어떤 고난과 위기에도 부서지지 않을 바위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나의 마음에 새겨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은 무엇입니까?
57절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오셔서 위로하십니다. 사방에 적과 약탈자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롱하며 업신여길 때, 우리가 바라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늘 아버지뿐입니다. 비천한 처지가 되어 사랑하는 자도, 친구도 떠날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곁에 계시며 위로하시고 “샬롬”을 주십니다. 나는 주님께 가까이 머물며 날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찾습니까? 혹 너무 멀어져 그분의 존재조차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58,59절 억울한 자, 억압당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악한 자의 흉계에서 약한 자를 구하시고, 그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위와 돈을 권력으로 삼아 약자를 핍박하는 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재판정에 서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나보다 못났다고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대하지 맙시다. 혹 억압당하고 있다면, 내 편에 서서 변호하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억하며 당당히 맞섭시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60~66절 시인은 하나님께 대적자들의 ‘말’과 ‘행위’를 모두 듣고 보셨으니 이제 그들의 행실대로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시라는 요청입니다.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잘못한 일을 합당하게 처벌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범법과 악행을 은혜와 용서라는 ‘미명’으로 덮어버리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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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수치, 조롱과 사망의 위협 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사방으로 피할 길이 없고 멸시의 손가락질 가운데 땅에 곤두박질한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울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호와를 향해 부르짖고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코 그의 자녀들과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인 것을, 또한 그 긍휼이 끝이 없고 그 인지하심이 무궁하신 분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기다리시며 그 진노를 더디 하시며 날마다 새롭게 그의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변호하시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을 향한 칼을 칼집에 넣고 오직 전쟁은 여호와께 있고 주권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음을 인정하는 복된 주님의 제자로 걸어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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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함으로 괴로울 때 의지할 하나님”
예레미야는 애가를 쓰면서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고통보다도 자신의 고통을 더 깊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깊은 구덩이에 빠질 때마다 절망하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짖었습니다.
선지자는 탈출구가 남아있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빠질 때 하나님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구덩이 빠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의 원통함을 풀어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선지자가 억울함에 울부짖는 슬픔의 길은 기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은 슬픈 길이 아니라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원통하고 억울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원래의 길을 되찾게 해 주시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오직 목격자가 되시고 증인이 되어 원수들을 심판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원수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저주를 내리시고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시고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여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사를 주관하시고 모든 일들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모든 일들을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무너뜨렸던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오늘 하루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반드시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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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안고 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며
모든 죄악과 불순종을 회개의 영과 독생자의 피로 덮으시는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그늘 아래 날마다 긍휼을 간절히 구하며
구원의 복된 소식을 열방 가운데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도록 선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억울함과 원통함을 풀어주시길
간곡하게 아뢸 때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원수를 갚아 주심으로 허락된
만족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음 전하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의 현장에 함께 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베풀어주시고 구석구석마다 하나님의 생명과 평안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심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