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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홀로 서신 이유 (시2-75)
2026년 4월 3일 (금요일)
찬양 : 주의 꿈을 안고 일어나리라
본문 : 시75:1-10절
☞ https://youtu.be/NPKQH4lKZDk?si=YSG7aB1aSnsYvtmC
목회사관학교 5주차 어느 때보다 수업 분위기가 좋다. 모든 사관생도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사실 어제 컨디션이 최악으로 쉬어야 하지만, 사관생도들의 열정 가득한 눈들이 나로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강의시간 학생들의 열의에 찬 모습에 나는 아픈 줄도 모르고 강의를 마쳤다. 기대가 되어 나도 이들의 다리가 되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자꾸 일을 벌인다.
이것이 진정한 천국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은 금요 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박종오 부대표의 홀로 이리저리 애쓰며 묵묵히 감당하시는 헌신이 참으로 감동이다. 오늘도 진행하는 시간 헌신으로 준비하신 소중한 말씀이 모두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기를 기도한다.
오늘 나는 무조건 쉼을 가져야 한다. 주일 사역을 위해 온전히 쉼을 가지며 체력을 회복하며 준비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은 시편 75편을 묵상한다.
75편은 ‘아삽의 시’로, 표제어에 ‘알다스헷(Al-tashheth)에 맞춘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알다스헷'은 "멸하지 마소서(Do not destroy)"라는 뜻이다.
국가적 위기나 전쟁의 공포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할 때 부르던 곡조다.
학자들은 이 시의 배경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사건(기원전 701년경)
혹은 그와 유사한 국가적 존망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하나님 멸하지 마소서>란 고백을 올리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시작부터 나온다. 1절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이 상황을 감사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위기 상황을 감사를 반복하면서
주의 이름이 가까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히브리 사상에서 '주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곧 그 존재 자체, 성품, 권위, 그리고 '임재'를 뜻한다. 그리고 <가깝다 (히브리어: קָרוֹב, 카로브)>는 관계적인 친밀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당장 개입하여 구원하거나 심판하실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고백은 하나님은 우리 삶 한복판에 함께 계시며 구원을 이루신다는 고백이다. 위급한 상황에 이들이 부르는 첫 고백이 이것이란 사실이 매우 울림을 준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공동체와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바로 공동체의 자리에서 고백되는 것이다. 공동체의 중요성을 오늘 아침 깊이 묵상한다.
근자에 나는 이 구절이 깊이 묵상된다. 전4: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위기의 순간은 자신의 작음과 약점, 부끄러움과 수치가 드러나는 자리다.
그러기에 홀로 숨으려는 욕망이 크다.
그러나 이 순간 기억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이면 패한다는 것이다.
사단은 어찌하든지 우리가 혼자가 되게 한 후 패배하게 만들려 다양하게 우리를 격리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이런 공동체적인 자리에서 공동체가 하나님을 다시금 기억하며
그분의 말씀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이 시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혼자는 위험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서 해결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약점과 부끄러움조차 하나님앞에 그리고 그 공동체안으로 가져와야 한다.
시인은 이렇게 혼자의 싸움으로 절망해야 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초대하며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2절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여기 <정한 기약>이란 히브리어는 '모에드(מּוֹעֵד)'로 '지정된 시간'을 뜻한다.
세상이 요동치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아도,
심판의 주도권과 타이밍은 온전히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는 자책과 절망에 휩싸여 언약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때 그리고 함께 격려하면서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기억하면서 일어설 힘이 나는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공동체로 찬양하며 분명한 사실을 고백한다. 6-7절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고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세상의 점장이는 귀인이 항상 동쪽, 서쪽, 남쪽에서 온다고 한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의지했던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 기대는 우리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참된 의지와 소망이 되지 못한다.
오직 우리의 소망은 유일한 재판장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그분이 우리를 높이실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공동체로의 이런 경험을 통해 오늘 시편은 마지막 9-10절에서 외친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라고 고백하며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라는 위대한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오늘 아침 시편을 묵상하며 공동체의 예배와 공동체와의 만남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신 그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은 우리의 죄악과 실수와 수치를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 그 십자가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셨다고 선포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시며
철저히 혼자가 되셔서 사망의 자리로 가신 예수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시려고 그렇게 짐을 져 주시고
우리의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 되신 것이다. 할렐루야 ~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절대 절대 너를 혼자로 두지 아니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외치시는 주님의 외침을 듣는 아침이다. 온몸이 아픈 날, 나는 혼자가 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 있던 절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주님이 함께하고 계시며, 누군가 우리와 함께하며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고난주간의 최후 정점에서 던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외침이 저를 울립니다. 저도 라마나욧이 되어 절대 혼자로 작은교회를 두지 않는 종이 되길 원합니다. 저를 사용하소서.
한줄 묵상 :
<주님이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으심은, 나를 영원히 고립시키지 않으시려는 가장 뜨거운 사랑의 증명이다. 누구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적용 질문 :
1.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나는 내 약점과 수치를 숨기기 위해 혼자만의 동굴로 숨어 들어가는 편입니까? 아니면 은혜를 구하며 공동체 안으로 내 연약함을 가져가는 편입니까?
2. 세상을 살며 문제 해결을 위해 '동, 서, 남, 북(돈, 인맥, 세상의 방법, 미신)'을 기웃거리던 나의 모습은 없었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 나를 영원히 혼자 두지 않으시려고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오늘 외로움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