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루카 1,39-56 참조)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31일을 축일로 정한 것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6월 24일) 사이에 기념하기 위해서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를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도록 이끄셨으니
저희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 살며
마리아와 함께 언제나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소서.
제1독서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 스바니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18
14 딸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크게 소리쳐라.
딸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5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16 그날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하리라.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힘없이 손을 늘어뜨리지 마라.”
17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18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
나는 너에게서 불행을 치워 버려 네가 모욕을 짊어지지 않게 하리라.
복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는 게 이런 거구나!’를 느끼며 사는 법
메릴린 먼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습니다. 나는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이 많습니다. 나는 사랑에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의 팬레터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래에도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이렇게도 공허하고 이렇게도 불행합니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이유 없이 불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마지막 말에 힌트가 있습니다.
“나는 폐장한 해수욕장처럼 외롭습니다.” 사실 축하를 가장 많이 받는 생일파티가 가장 외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있지만, 자신의 마음까지 들어온 친구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그 아픔이 더 큽니다. 우리는 해수욕장과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까지 누군가 들어와야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까요? 내가 먼저 방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아내까지 죽고 더는 살 의미가 없어 자살하려다 결국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결국 살아가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영화 ‘오베라는 남자’가 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희망은 자살이었는데 이웃이 귀찮게 해서 도와주면서 자살을 미룹니다. 특히 새로운 이웃인 파르바네와 그녀의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 오베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서 큰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베가 여자 아이를 차에 태우고 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하는 하나의 대사가 있습니다.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늦은 나이에 나에게 사람들이 들어온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가 몰고 있는 차는 바로 자기 자신을 의미하고 그 아이는 이웃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렇다고 무작정 방문하면 될까요? 성모님은 그렇게 방문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땅을 점령하고 유배지에서 외롭게 죽어가던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정복했지만, 나의 왕국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죽임을 당했지만, 그의 사랑의 왕국은 나날이 번져 가지 않는가? 그와 우리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영웅들과도 다르며 성자들과도 다르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점령하는 게 아니고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참다운 방문은 나의 이익이 아닌 상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나를 방문하게 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보험 판매원으로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클레멘트 스톤이 자기 위주의 마인드에서 고객 위주의 마인드로 변화하게 된 구체적인 사건과 과정은 그의 자서전과 그가 남긴 글들에서 잘 드러납니다.
클레멘트 스톤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 함께 보험을 판매하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판매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에게 보험 상품의 장점만을 강조하고, 때로는 과장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고객이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고, 판매 실적이 저조했습니다.
어느 날, 스톤은 한 고객에게 보험을 판매하려다 거절당했습니다. 고객은 “너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팔고 있지 않아. 너는 단지 너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팔려고 할 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스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스톤의 삶은 완전히 변화됩니다. 먼저 고객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진정한 성공의 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농부 고객은 가뭄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스톤은 이 고객에게 고액의 보험 상품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상황에 맞는 소액 보험 상품을 추천했습니다. 농부는 스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동했고, 결국 장기 고객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가장 비천한 이들과 사귀기 이전에 이렇게 하라고 권고합니다.
“형제 여러분,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엘리사벳도 오늘 성모님께 이렇게 소리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방문하기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랑이 내 안에 자리 잡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의 기쁨과 평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방문하지 않으면 방문 받지 못하고, 무조건 방문하면 그건 침범이 됩니다. 그래서 먼저 행복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방문하십시오. 그러면 사는 맛이 무엇인지 느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연극에서도 제일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역이 좋았습니다. 구연동화 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 때, 한 번은 선생님께서 책의 어느 부분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제일 자신 있었던 책 읽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벌벌 떨면서 간신히 읽었던 그때의 기억이 오랫동안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두려움이 제게서 언어를 빼앗았습니다.
제게 이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가 믿지 못합니다. 지금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전혀 어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언제 사라졌을까요? 다시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서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이 사람들로 인해 치유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았다면서 사람들 곁을 떠나는 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떠나 혼자 있다고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상처는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늘 놓여있습니다. 특히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얻는 두려움에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나 혼자 극복하기란 너무 힘듭니다. 의지를 세울 수 있는 것도 사람들을 통해서이고, 지금과 다른 변화도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그 안에 계시는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친척이며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하시고 성모님께서는 큰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부담이지요. 하느님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편하고 쉬운 삶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 성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것, 또한 뱃속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았고 이 아기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는 만나십니다. 분명히 배 속의 아기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배 속의 아기가 서로 만나면서 그들은 큰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십니다.
큰 어려움이 함께하면서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인 '꽃' 중에서).
사진설명: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