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5월 8일 부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16,1-10
복 음 : 요한 15,18-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20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21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이덕무(1741~1793)는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출세에 제약이 많은 서자 출신이었지만,
정조대왕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의 학문은 훗날 정약용, 김정희 등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이런 학문적 깊이를 갖게 된 것은 그가 엄청난 독서광이었기 때문입니다.
온종일 책만 읽어도 될 정도로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책 읽은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많은 이가 책 읽는 분위기를 신경 씁니다.
조용해서 책에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집에서 주로 책을 읽었고,
그의 집은 당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종로 사거리였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가장 시끄러운 곳이었지만 책 읽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는 것만 그러할까요?
사실 많은 상황에서 안 되는 이유를 찾는데 익숙한 우리입니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이유, 공부 안 되는 이유,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 취업이 안 되는 이유….
이런 식으로 안 되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찾고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실학자 이덕무처럼, 위대한 위인들은
모두 안 되는 이유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되는 이유를 찾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되는 이유가 참 많았습니다.
‘안 한다, 못한다.’ 등의 결론을 미리 내리고 보니, 되는 이유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햐면 세상이 주님을 먼저 미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미워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또 세상의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의 일을 좋아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표징과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해주셔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움’이라는 감정으로만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미움으로 가득 찼던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직접 보이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는 우리는 어떠할까요?
우리가 더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힘을 넣어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서, 세상이 미워해도 사랑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이유를 말하며 사는 나 자신인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되는 이유를 찾고 있는 나 자신일 때,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이번 주 내내, 관계 안에서의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에서,
제자들과 제자들이 관계에서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세상의 관계에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게 될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신원과 사명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로부터 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과 제자들의 관계에서도 제자들의 사명 역시 사랑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이유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택한 사람들이기 때문”(15,19)이며,
또한 “내 이름 때문”(15, 21), 곧 “내 제자라 해서”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 속한다.’는 것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는 것과, ‘예수님 이름’,
이 세 가지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되는 <제자들 편>에서의 이유입니다.
사실, 이는 우리 존재의 의미요, 우리 삶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 편>에서의 이유는
“그들 곧 세상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모르기”(15,21)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에게 선택받았는지?
제자로서의 신분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세상의 미움과 박해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꿋꿋이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비록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지라도 당신께서 하셨던 것처럼,
당신을 보내신 분을 알게 하여야 하는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해 있다면,
미움과 박해는 당연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 해당한 것입니다.
이 특권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명과 함께 고난의 특권도 부여받았습니다.
한스 큉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오직 당신을 보내신 분인 아버지께만 믿음을 두셨던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요한 15,19)
주님!
세상에 속하지 않기에, 세상의 사랑을 구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 속하니, 당신의 사랑에 목마르게 하소서!
고난을 겪는 특권을 받았으니, 그 속에서 당신을 만나 뵙게 하소서!
그 어떤 미움과 배척에서도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처음으로 성지순례를 갔던 것은 1982년 여름입니다.
당시 성소국에서는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도보성지순례를 기획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절두산 성지에서 함께 기도를 한 후에 대부분의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미리내, 양지, 솔뫼, 해미, 갈매못, 나바위, 치명자 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모두 순례자들을 맞이할 수 있는 성지로 조성이 되어있지만
40년 전에는 대부분 빈 공간에 성지라는 안내표시만 있었습니다.
본당신부로 있으면서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를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학역에서 내렸습니다.
구학역에서 베론 성지까지는 도보로 순례하였습니다.
성지는 순례하는 사람이 없으면 잊혀지게 됩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하였던 곳,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하여 묻혔던 곳을 찾아
순례하는 것은 우리들 또한 신앙의 선조들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려는 다짐입니다.
올해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분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 했습니다. 다른 한분은 길 위에서 신앙을 증거 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주춧돌을 놓았고, 최양업 신부님은 주춧돌 위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유럽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상해와 연길로 성지순례를 가는 것도 좋습니다.
상해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연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이 부제품을 받은 성당이 있습니다.
두 신부님은 만주벌판을 지나서 그리운 조선으로 오는 길을 찾았습니다.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신부님들도 만주벌판을 지나서 조선으로 입국했습니다.
말이 좋아 만주 벌판이지 크기가 조선의 8배라고 합니다.
도중에 사나운 짐승도 있고, 도적 때도 있고, 살을 에는 추위도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압록강물이 어는 추운 겨울에 조선으로 와야 했습니다.
순례의 여정에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글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당 입구에 있던 글입니다.
“만일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가가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만일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로 나가는 순례의 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지 못하고,
세상의 것들에 취해서 여행객으로 머물다가 떠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가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선조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된 것처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비록 순례의 길에 고난과 유혹이 찾아오지만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많은 고통과 박해가 있었지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디모테오와 같은 좋은 협조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마케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천상에서의 삶을 희망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비록 병고에 시달릴지라도, 비록 일찍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가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버이 날이다.
조건 없는
부모님의 사랑에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은총이다.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이다.
뒷걸음질 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주님께서
직접 뽑으신
우리들이다.
우리를
뽑으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신앙은 확신이다.
확신은
착각을 걷어낸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뽑으셨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기쁠 수 없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뽑으신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미움과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보다 더 크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 모두를
살리시는 것이다.
뽑힌 이들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이다.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사랑이
우리 모두를
더 좋은 사랑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모두가 소중하며
모두를 철들게 한다.
하느님 사랑으로
성장하는 우리들이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두려워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기 때문에 사랑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세상,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원수지간입니다.
요한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그러나 악마는 교묘하게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허물려는 시도를 벌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은 나쁘다고 하며 통합을 강조합니다.
저도 처음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미워한다고 하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할 수 있도록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를 미워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허전했습니다. 이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지 못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내가 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미움 받지 않는 것을 두려워했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사랑하면 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막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독침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참으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자신의 머리를 짓밟는 이들에게는 더욱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전갈 한 마리가 개구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개구리들은 모두 전갈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워낙 착한 전갈처럼 보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구리들은 전갈이 자기 꼬리의 독침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의 개구리들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
그 전갈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곧 다른 고을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고을과의 사이에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개구리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무기인 그 전갈을 자신들의 등에 태우고 개울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갈은 수영도 못하는 자기가 개구리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본성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태운 개구리를 독침으로 찔러 자신도 죽고 개구리도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마치 이런 전갈처럼 오셨습니다.
그리고 등에 업은 사람을 당신 십자가에서 흐르는 피로 죽이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자신의 지배 아래에 있는 백성을 빼앗아가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세상은 악의 욕망, 즉 세속-육신-마귀의 지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본성, 즉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본성과 반대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미움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영화 ‘그린 존’(2010)은 2003년에 발생한 이라크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생화학무기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라크를 무력침공 합니다.
미군 해병대 팀장 ‘맷 데이먼’은 해병대원들과 화학무기가 있다는 지역을 타격합니다.
그런데 매번 화학무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에 의문을 품은 팀장은 한 집을 습격하던 중
그곳에 이라크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를 추격합니다.
그 이라크 장군이 미국에 잘못된 정보를 주는 대상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장군을 찾아내어 왜 잘못된 정보를 주느냐고 하지만
사실 그는 미국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그가 처음 미국에 주었던 정보는 이라크에 생화학무기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원전을 자신들 소유로 만들고 싶었던 미국에게는 이 정보는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화학무기가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고 속이고 일단 이라크를 침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공대원들을 시켜 그를 찾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맷 데이먼이 그를 찾게 만들어 그 뒤를 쫓아 장군을 살해하려고 합니다.
맷 데이먼은 미군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결국엔 자기 나라 사람에게 사살당하고 맙니다.
그 사람들도 장군이 미국에 정보를 주어
미국이 자신들을 침공하게 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맷 데이먼은 미국이 승리한 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내각을 구성하여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들에게 맞서려고 하지만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화학무기도 없는데 그것을 빌미로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흘리고
그렇게 전 세계가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이라크를 침공한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이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진실을 말하는 이들이 미움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싫어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을 좋아하고 편안함만을 찾습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곧 진실하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에 속하지 않았음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고 증거하면 개구리 마을의 전갈처럼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리 떼 가운데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과 세상 백성은 그 본성상 통합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 백성은 세상을 미워하지 않지만, 세상은 하늘 나라 백성을 미워합니다.
우리가 사는 교회 안에도 세상에 속한 이들이 속해있습니다.
그들을 구별하는 법은 쉽습니다.
성당에 다니면서도 돈과 먹고 마시는 것과 권위와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 세상 사람입니다.
이 경계선을 통과하는 것이 저는 ‘십일조’라고 생각합니다.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면 경계하십시오.
나도 교회에 속한 척하며 실제로는 세상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길을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은 영의 세계와 구분되는 영역일 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에 마음을 여는 이는 세상의 지배 아래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세상과 별개로 살아갈 수는 없지요.
이천 년 전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인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려고 돈과 권력을 탐하며
불법과 불의도 마다 않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에 철저히 역행합니다.
가진 바를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약하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스스로 가난을 택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여기에 계시니까요.
그러니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나 신자들을 불편해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발맞추지 않으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의심과 무시의 눈초리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까지 일삼지요.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5,21)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에 대해 세상이 저지르는 미움과 증오의 이유를
"무지"라고 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모르고, 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사랑도 모르니 그런 것이라고 여기시지요.
만일 세상이 아버지와 그분의 사랑을 알았다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서 응당 아버지를 섬기고 아드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이 지닌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거룩함을 믿어주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의 선교 여행이 어떤 원동력으로 이루어지는지가 드러납니다.
"그 고장에 사는 유다인들을 생각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베풀었다."(사도 16,3)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이 정한 규정을 신자들에게 전해 주며 지키게 하였다."(사도 16,4)
사도행전 저자는 이방 지역에서 바오로가 행한 이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합니다.
전통이라는 예민한 쟁점에 대해, 그 고장의 유다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누구에게는 할례를 베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기로 한
예루살렘 회의의 규정을 알려 주지요.
이는 바오로의 사명이 단 하나의 목적, 구원을 향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습일 겁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이러한 모순처럼 보이는 선교 방식에 대해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합니다.
"유다인들을 얻으려고 유다인들에게는 유다인처럼 되었습니다.
...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율법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19-23 참조)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틀을 넘어섭니다.
그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무지를 깨고 비로소 알게 된다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전통과 관습, 기득권과 평판이라는 세상의 틀을 과감히 뛰어넘는 그의 원동력은 복음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식별을 하고 방향을 잡았을까요?
"성령께서 막으셨으므로"(사도 16,6)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사도 16,7)
사도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철저히 성령께 의지해 나아갑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의탁하고 순종하여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며 움직였습니다.
막으시면 멈추고 열어 주시면 담대히 발걸음을 옮겼지요.
세상의 방식으로 인간적 기대와 욕심이 앞섰다면 계획이 틀어진 것을 불편해하고
고집을 부려 강행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순히 따릅니다.
그들은 복음 선포의 주도권을 오로지 성령께 일임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도록
잘 가꾸어 나가며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터전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를 끌어당기는 세상 논리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세상은 크고 강하고 높고 많은 것을 추구하느라
작고 약하고 낮고 미소한 것을 착취하고 무시하며 소외시키기 일쑤니까요.
거기 하느님이 계심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무지"한 세상이 하릴없이 지배당하고 있는 물질 논리와 힘의 논리는
선하고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더라도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성령께 이끌려 살아갈 때 유지됩니다.
물론 거센 세속의 물살을 역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거고요,
주위에서도 그런 우리가 불편해서 그냥 대충 살라고 끌어내리기도 할 겁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는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해 나아가는 영의 사람들인 것을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겸손, 나눔을 통해 얻는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선물입니다.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순종하며, 복되고 복된 기쁨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소유한 영의 사람들인 벗님을 이렇게 만나고 함께 나아갈 수 있어 행복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