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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순금에서 질항아리로 4:1~5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 더미를 안았도다
소돔의 죄보다 큰 시온의 죄 4:6~10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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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금이 빛을 잃고 성소의 돌들이 거리에 쏟아지며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질항아리같이 여겨집니다. 백성은 광야의 타조 같고 젖먹이가 목말라하며 어린아이가 떡을 얻지 못합니다. 존귀한 자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이 막대기같이 마릅니다. 토지소산이 끊어져 그들은 점점 쇠약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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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순금에서 질항아리로 4:1~5
하나님의 심판은 고귀하던 모든 것을 ‘가치 없음’의 상태로 전락시킵니다. 네 번째 애가인 4장은 포위된 예루살렘이 겪은 참상을 서술합니다. 예레미야는 순금이 변질한 듯 예루살렘이 비천한 상태에 있다고 탄식합니다. 황금빛으로 눈부셨던 성전은 파괴되어 그 잔해가 거리에 흩어집니다. 보배로웠던 시온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는 노예가 되어 ‘질항아리’(2절)처럼 초라한 신분이 됩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굶주림으로 인한 참상이 극심합니다. 알을 낳고 사막에 방치하는 타조처럼, 유다 백성은 자녀를 돌보지 못하고 굶주려 죽게 합니다. 진수성찬을 먹고 값비싼 옷을 입던 귀족들도 구걸로 연명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니 영광이 떠나고 생명 보존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맙니다.
● 더 깊은 묵상
순금이 빛을 잃고 변질되었다는 예레미야의 탄식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내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옮겨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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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죄보다 큰 시온의 죄 4:6~10
예루살렘의 패망은 지속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레미야는 타락과 멸망의 상징이 된 소돔의 죄보다 예루살렘의 죄가 더 무겁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외치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오랫동안 들었음에도 돌이키지 않았기에 소돔보다 그 죄악이 심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깨끗하고 빛나던 ‘귀족 예루살렘’은 숯처럼 검은 얼굴에 마른 뼈만 남은 비천한 존재가 됩니다. 백성은 자녀의 인육을 먹을 만큼 심각한 굶주림에 처했기에, 예레미야는 차라리 칼에 맞아 죽은 자가 굶어 죽는 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는 불순종에 임할 저주로 경고해 주신 말씀의 성취입니다(신 28:53).
● 더 깊은 묵상
예루살렘의 죄가 소돔의 죄보다 무거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계속해서 경고하시는데도 내가 순종하지 않는 일은 무엇인가요?
한절묵상:예레미야애가 4장 2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받은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순금처럼 값지고 보배로운 이스라엘이 토기장이의 질항아리처럼 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비극은 달콤한 죄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죄는 잠깐의 기쁨과 만족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와, 더 크고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합니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죄가 주는 기쁨'을 경계하고, 영원한 기쁨을 주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모든 불행과 좌절의 근원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 벤 패터슨
오늘의 기도
하나님, 세상의 화려함과 부유함만 좇다가 믿음에는 굶주리고 말라비틀어진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철저히 돌이키게 하소서. 하나님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고 가르치는 저와 교회 공동체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79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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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비참함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이스라엘의 결과입니다. 그 교만함은 예루살렘 성벽의 벽돌 한 장도 지켜낼 수 없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심판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진짜 신앙이 들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쉬운 대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깊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잔인한 심판을 거울삼아 정결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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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빛을 잃은 예루살렘(1-6)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큰 영광을 누리며 살던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빛을 잃은 순금처럼 되었음을 한탄합니다. 아름다운 성전은 이방의 발에 밟혀서 더 이상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높임 받던 사람들은 질항아리처럼 되어버렸고 백성들은 광야에 뛰어다니는 타조와 같이 먹을 것을 찾아 헤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소돔보다 더 큰 그들의 죄악 때문임을 고발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남다른 영광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함으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내게 허락되어 있을 때에 더욱 겸손함과 진실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지금 내 손에 있는 것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는가?
2. 몰락한 귀인들(7-10)
처음부터 이들이 죄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귀인들이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행하였고 그들의 삶은 눈보다 더 희고 보석보다 빛난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큰 복을 더하셨고 예루살렘은 평안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락하였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힘을 자신들의 배를 불리며 정의를 짓밟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입니다.
어떠한 힘과 권력도 하나님을 떠나 사용할 때에 그 힘을 그곳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의 그릇됨은 결국 백성들에게 고통으로 주어집니다. 그들은 가난에 힘겨워 하였고 심지어 어머니가 자녀를 먹는 일까지 생길 정도로 그 사회가 굶주리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경제적인 위기는 바로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지도자로 세운 모든 중의 종들이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사회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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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관찰>
여호와의 진노로 예루살렘이라는 금은 변질되었고, 질항아리처럼 여김을 받고, 광야의 타조 같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사람이 없게 되었음을 슬프게 노래한다. 여호와께서 분을 내시며 진노를 쏟으셔서 시온의 터를 불사르시고,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가게 하시며, 흩으시고 돌보지 않으셨도다. 헛것에 도움을 구하므로 눈이 상하였음을 노래한다.
<해석 및 적용>
여호와의 진노로 멸망하게 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진노는 예루살렘의 죄악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시고, 수없이 많은 선지자를 보내 말씀하셨음에도 돌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참아주실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이 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고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징계의 채찍을 드신다.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잘못했으면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 아버지께서 참아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빨리빨리 돌이키고 회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 계속해서 오만방자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게 은혜를 주옵소서. 죄를 품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참아주셨으니 앞으로도 계속 내버려 두실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 않게 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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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보면 극렬하게 대조되고 있는 두 모습이 있습니다. 순금과 같이 귀한 시온의 백성들이 흙 항아리처럼 취급됩니다. 진수성찬을 먹던 자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으며,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고 사파이어 같던 자들이 숯보다 검고 가죽이 뼈에 달라붙어 앙상한 막대기 같이 됩니다. 마치 흑과 백처럼, 왕과 거지처럼 비교되어 같은 사람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일인들입니다. 다만, 과거의 고상한 모습과는 현저히 다른 흉한 몰골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선민도 아니고 인간의 기본적인 삶도 누리지 못한 채, 먹을 것이 없어 마치 좀비와 같이 됩니다. 자신들이 이런 처참한 모습으로 변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곧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이 마무리될 줄 알았고, 랍비들과 제사장들은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을 반드시 도우실 것이라고 위안하고 있었으며, 선지자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고 낙관적으로 예언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각자 자신들이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그들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들 편에 서서 그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어이없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워하고 증오할 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용서의 하나님으로만 아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사랑받고 싶어서, 그리고 우리 죄를 용서받고 싶어서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도 되지만 공의의 하나님도 됩니다. 용서는 하시지만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예가 다윗과 밧세바가 낳은 영아가 죽은 일입니다. 마음 아픈 일이라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되는지 의아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할 때 무릎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해 착각하거나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뒤돌아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 나갈 때, 건강할 때 돌아볼 것은 돌아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지만 장차 오실 때는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히 그리고 소홀히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 속에 갇혀있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싶은 하나님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신성모독이요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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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의 때에 적나라한 우리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애가 4:7–8)
존귀한 자들은 파멸 전에는 척 보아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멋있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파멸 이후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나 별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 높고 낮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비참한 것이 나옵니다.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애가 4:10)
1절부터 9절까지는 파멸 이후의 모습에 대해 말하였는데
10절에는 파멸할 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멸망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는' 일이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너무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무너져도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마지막 보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포위당하였을 때에 먹을 것이 없어 일부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자신의 자녀를 삶아 먹었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행한 여인들 중에 누가 전에 자신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주변의 어떤 사람이 그 여인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추측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악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한 극한 일을 만났을 때 사람 깊은 곳에 있는 악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이 때의 처절한 악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도 있을지 모를 악을 생각하면서 철저히 하나님 앞에 깨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날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예루살렘 멸망의 때와 그 이후 일어났습니다. 사실 그것이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전에는 단지 부요함과 외부적인 것에 의해 감추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껍질이 벗겨지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철저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더욱더 믿음으로 훈련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깊은 모습이 드러날 때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드러나도록. 그 길은 멀고 험합니다.
루터는 자신의 시대에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 이 땅에서 그 믿음을 위해 우리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가하게 세상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만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믿음의 길을 더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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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지위를 잃다 1~2절
굶주림이 만든 참상 3~10
도움말
3절) 타조는 고대 근동 여러 지역에서 서식했는데, 모래에 알을 낳은 후 새끼를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고 여겨졌다(참조. 욥기 39장 16절).
5절) 붉은색 옷감은 왕실이나 귀족의 의복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2절 하나님이 거하실 때 성전은 거룩하고 존귀하며,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성도는 금보다 보배로운 존재가 됩니다. 화려한 건물과 많은 성도를 자랑할지라도, 주님이 떠난 교회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고,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이 거하시고 붙들어주시는 공동체는 든든히 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모습을 꿈꾸며,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까? 주님이 거하시기에 손색없는 모습을 갖추었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3~5절 기성세대의 무책임하고 악한 행위가 다음 세대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와 어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의 미래와 삶이 불타버렸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젖먹이와 먹을 것을 구하는 아이들의 애처로운 눈동자는 예루살렘의 끔찍한 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거리에서 나뒹굴다가 속절없이 죽어가지만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 기성세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과 공동체의 어린 생명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하겠습니까?
6절 시인은 하나님 백성의 죄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소돔의 죄보다 크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받을 형벌도 소돔보다 혹독합니다. 순식간에 불타 사라졌던 소돔이 서서히 말라 죽어가며 무기력하게 온갖 비참한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이스라엘보다 나았습니다(3,10절). 세상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악한 모습부터 제거해나갑시다.
7~10절 폐허가 된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당합니다. 제후들과 고관들조차 뼈만 앙상하게 남아 거리를 배회하며 먹을 것을 구했고, 인정 많은 여인들이 제 자식을 양식으로 삼는 참상이 벌어집니다. 일용할 한 끼 양식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요? 날마다 식탁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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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존귀했던 자들이 이제는 쇠약하여 알아볼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애4:7~8)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전에 성소의 돌 같고 정금 같았던 성도가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애4:1)
무엇이 변질되었다는 걸까요?
전에 믿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롬1:25)
전에 품었던 신실을 음란으로 바꾼 것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사1:21)
전에 가던 좁은 길을 넓은 길로 바꾼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렘2:36)
전에 섬기던 하나님을 신 아닌 것과 바꾼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2:11)
전에 사모하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유1:4)
그러나 우물과 샘이 변질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잠25:26)
그러므로 우리는 변함 없이 진리를 사랑하고 은혜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
그때 변함 없으신 주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 샘물이 끊어지지 않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변함 없으신 주께서 우리가 소멸되지 않게 하실 줄 믿습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말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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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주어졌던 이스라엘의 영화는 모든 나라가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고 자발적으로 값진 조공들을 바칠 만큼 강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복되게 하셨음을 그들이 감사해하지도 않고 온갖 최악과 우상을 섬김에 빠져 여호와의 손길을 거부함으로 그 모든 영광을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그 심판의 칼날은 그 어떤 고통보다 아픈 결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식을 먹어야 할 만큼 아무런 소망이 없고 다시는 그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절망의 순간이 온 것을 시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붙들어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가던 배는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모두가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노 사도의 입술을 통해 결코 한 명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의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집니다.
소망이 없는 깊은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한없는 기쁨과 넘치는 소망은 다시는 끊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펼쳐질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십니다.
이스라엘의 절망으로 살아있는 소망이 이 땅 가운데 허락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낮아지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전해지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로마서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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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보다 더한 죄악으로 영광이 떠난 성읍” 노치형 목사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어귀마다 쏟아졌고 순금보다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되었고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같이 되었다고 탄식하며 애통해 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슬퍼하고 애통해 하고 계시지만 심판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시면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지만 우리는 헛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예루살렘 성읍 뿐 아니라 모든 백성을 완전히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 나라 이 민족들도 하나님께 돌이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다고 탄식합니다.
우리의 죄악도 이스라엘과 소돔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전의 이스라엘은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과 같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다고 애통해 합니다.
이스라엘은 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드렸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반역을 하고 배신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소돔의 심판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의 믿음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드리며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심판하시나 다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악이 우리가 속한 나라와 민족에게 있음을
고백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황금의 집으로 불렸던 예루살렘이 큰 심판을 받았던 소돔 성보다
더 무거운 죄악을 행함으로 급속히 내림을 날마다 기억하게 하소서!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정결하고 빛나게 회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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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묵상은 10절에서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라는 시간 축에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 멸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이제는 이라는 시간의 대조가 예루살렘 멸망 후의 회한과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은 우리네 인생이 전에는 이랬었는데 이제는 이렇다고 말하는 회한섞인 인생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재적인 질문은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전에는 순금이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빛을 잃고 성소의 돌들이 거리마다 쏟아졌습니다. 전에는 순금처럼 보배롭던 시온의 아들들이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같이 되었습니다. 들개만도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들개도 젖을 주어 새끼를 먹이는데 이스라엘은 타조처럼 자기 자녀를 돌보지 않습니다.
타조는 모래에 알을 묻어 두고 돌보지 않는 짐승입니다. 욥기 39:16절을 포함해서 욥 30:29절 레 11:16절 등에서 타조가 언급되는데 전부 어리석고 잔인하고 쓸쓸하며 불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타조처럼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도 돌봐줄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전에는 붉은 올을 입고 자란 자들이 이제는 거름 더미를 안았습니다. 소돔은 순식간에 멸망했지만 유다는 긴 시간 포위 되어 고통을 겪음으로 소돔보다도 더 혹독하게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깨끗하고 윤택했지만 이제는 숯보다 검고 막대기 같이 말랐습니다. 칼에 죽은 자들이 더 행복할 정도로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녀를 삶아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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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행복했었는데 이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은 과거 회귀적인 인생에서 오늘을 사는 인생으로 돌아서라는 큰 음성입니다.
오늘을 잘 사는 것은 어쩌면 늘 이런 선택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뒷날 오늘이 회한이 되어 남지 않도록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또 과거를 먹고 사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오늘은 늘 새롭게 갱신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건강도 과거 회귀형이 되지 말고 오늘이 즐거운 신앙생활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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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에 굶주린 자녀들(4:1~5)
파괴된 예루살렘에서 가장 참담한 고통은 비참하게 죽어 가는 언약의 자녀들을 보는 것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은 순금처럼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창 22:17)이성취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심판받은 예루살렘의 자녀들은 빛을 잃고 볼품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게 오랫동안 포위당해 식량 공급이 어려웠습니다.
극심한 기근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어린 자녀들은 혀가 입천장에 붙을 지경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귀하게 자랐던 아이들이 처량하게 길거리에 나앉았습니다.
자녀들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나라의 미래도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할 때입니다(눅 23:28 참조).
- 묵상 질문: 예루살렘의 자녀들이 기근으로 죽어 가는 모습이 무엇보다도 절망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어른들의 잘못으로 고통당하는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기근의 참상(4:6~10)
죄악의 도시로 유명한 소돔은 사람의 손에 멸망당한 것이 아닙니다. 소돔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과 유황을 내려 멸망시키신 음란하고 악한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의 죄악보다
더 심했으니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얼마나 혹독했던지, 과거에 청옥처럼 아름답고 윤택했던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마저 얼굴이 숯보다 검게 되고 몸이 막대기처럼 마를 정도로 비참해졌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배고픔을 못 이겨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는 처참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은 칼로 단숨에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죄악의 열매는 아주 쓰고 치명적인 고통을 줍니다.
- 묵상 질문: 예루살렘의 죄악에 따른 징벌은 얼마나 무거웠나요?
- 적용 질문: 사람들이 저지르는 끔찍한 죄악을 접할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기억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물질적인 풍요는 넘치지만 영적으로는 굶주려 주님의 영광을 잃어 가는 저와 공동체,
자녀들을 긍휼히 여겨 주소서.
주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회복되어 주님 안에 있는 부요함을 누리는 믿음의 세대가 이어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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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의 죄악이 유다보다 심했다면
유다의 죄악 보다 이 시대의 죄악이 더 심한데도
하나님은 긍휼을 자비를 베푸셔서
참 오래 참고 계신다는 생각인 든다.
죄를 즐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죄에서 떠나지를 못하고
죄를 고백하고 인정은 하지만 소유하고 있다면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고
죄에서 떠남에 대하여 강조해 주신것이 기억에 있는데
오늘도 죄의 결과의 심각성을 보여 주시는 것 같다.
죄 에 대한 인식의 경계선도 분명히 다시 쌓고
죄가 쌓여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도록
무감각하게 죄 짖던 부분도 경계선을 다시 구축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괞챦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더 큰 수치를 당하기 이전에 거룩의 성
진리의 아름다운 성들을 쌓아가야 겠다.
아주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헐수 없도록...
죄를 미워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더욱 커서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통해 임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이 소망을 잃어버리고
세상 가운데 방황하는 이들의 심령을 붙들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전달되는 통로가 되도록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잠든 생명을 깨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심령들이 깨어나고 그림자도 없는 빛을 체험하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회복과 치유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더 알고 그 강한 팔에 온전히 의지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