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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노여움을 찬송되게 하신 주 (시2-76)
2026년 4월 4일 (토요일)
찬양 : 피난처 있으니
본문 : 시76:1-12절
☞ https://youtu.be/cH5OsGHdYn8?si=vncM2tbS0LAtIgNC
어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날을 기념하는 성금요일이었다. 하루 준비하면서 육체를 쉬며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하루의 무리가 한 주간을 힘겹게 함을 느끼며 예전 같지 않은 나의 현실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은 밀린 작업을 하면서 주일을 준비해야 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본문 시편 76편은 '아삽의 시'이자 승리의 찬가다. 학자들은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을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와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 사건(왕하 19장, 사 37장)에 두고 있다. 3절
‘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5-6절
‘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여기 '마음이 강한 자'는 히브리어 '아비르 레브(אַבִּירֵי לֵב)인데
이것은 우리가 표현하는 멘탈이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맹신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교만하고 완고한 자를 표현하는 말이다.
바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조롱했던 앗수르의 왕과 장수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께서 꾸짖으시자 다 깊이 잠들어 버렸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그리고 이때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9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여기 ‘온유한 자’는 히브리어로 ‘아나브(עָנָו)’다.
‘아나브’의 어근은 ‘괴롭힘을 당하다’, ‘낮아지다’는 뜻의 ‘아나(עָנָה)’에서 왔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온유한 자는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억압당하며,
사회적 변방으로 밀려나 고통받는 자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상황적으로는 앗수르라는 거대 제국 앞에서 아무런 힘도, 대항할 무기도 없었던 예루살렘의 연약한 백성들을 말한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심판의 목적은 구원을 향하여 일어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온유한 자들은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판결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자들을 의미한다.
흔히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나는 스스로의 능력과 스펙으로 내 인생을 구원하고 증명하려는 '아비르 레브(자기 의와 교만)'를 품고 살아가는 자다.
두 번째는 자신의 약함과 죄악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판결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의 이 완고한 자기 확신이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꺾이고 무장 해제될 때, 즉 '내 손으로는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달을 때 그 자리에서 심판과 구원을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과 구원은 놀라운 고백을 만든다.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분노하여 예루살렘을 짓밟으려 했던 그 끔찍한 폭력조차도,
결국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구원자이신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버렸다.
악인의 분노가 도리어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된 것이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이 하나님을 믿기에 오늘도 나는 이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다.
그러면서 아삽은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한다.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신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악인들이 분노한 대로 세상이 움직여지도록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까지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허락된 범위와 목적을 벗어나서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세상의 분노는 없다는 절대 주권의 선포다. 이 부분이 오늘 아침 큰 울림을 준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착각을 하곤 한다.
나는 의인이며 세상은 나쁘다는 착각이 첫 번째다. 나는 온유한 자이고, 저 사람은 '아비르 레브(자기 의와 교만)'라고 하는 착각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이 둘 모두를 포함한 존재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 모두는 자기 의에 빠져 살아갈 존재이며, 또 반대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아래 거할 때 모든 온유한 자로 설 수 있는 존재다.
두 번째 착각은 지금 내가 당하는 노여움이 나를 삼킬 것이란 마음이다. 이 모든 것의 절대적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삼켜지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도 이 두려움에 삼켜서 하나님의 구원을 외면하다가 심판을 당한 이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넘는 분노는 하나님께서 친히 묶어버리실 것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의 폭력이
오늘날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이나 이란과 미국의 대치 같은 거대한 전쟁의 위협으로 다가올지라도,
이 땅의 진정한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세상의 '남은 노여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의 모든 폭력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자신의 몸으로 다 받아내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완전한 대속과 승리로 인해 그 어떤 두려움도 결코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부활주일을 앞둔 오늘, 두 가지 두려움이 나를 덮으려 한다. 하나는 '나란 존재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의의 착각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 은퇴의 시점에 다가온 '세상의 노여움‘처럼 보이는 재정 부족이 만드는 두려움이다.
돌아보면 이 재정의 결핍조차도, 내 힘으로 노후를 책임지려 했던
내 안의 '아비르 레브(말과 병거)'를 깊이 잠재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만 하는 그런 죄인임을 자백한다.
나는 오늘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그 말씀 앞에 서지 않고는 똑바로 설 수 없는 죄인임을 자백한다.
그분의 부활 사건만이 내 삶의 유일한 일어섬의 길임을 나는 믿는다.
아울러 나는 오늘의 두려움의 현실이 하나님이 허락한 선까지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 자리가 찬송의 자리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당당히 기쁨으로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낼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 감사드립니다. 이 땅의 주권자되시며, 구원자 되셔서 이 땅의 그 어떤 병거와 말도 다 깊이 잠들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오늘이란 구체적인 현실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주님의 소망을 품고 이날을 당당히 살아갈 힘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한줄 묵상 :
<세상의 남은 노여움마저 통제하시는 주권자 앞에서, 나를 구원하려던 완고한 자기 확신을 십자가에 내려놓을 때 참된 살렘(평화)이 시작된다.>
적용 질문 :
1. 내 안에는 하나님 없이도 내 인생을 스스로 증명하고 지켜내려는 '아비르 레브(자기 의와 교만)'의 모습이 없습니까?
2. 현재 나의 삶을 짓누르고 두렵게 만드는 세상의 '노여움(위협, 불안, 갈등)'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세상의 노여움처럼 보이는 현실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