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바라보는 서쪽의 시간 외 4편
정선희
한 몸짓이 생의 단면에
부딪히고 있다
유리벽에 무성한 나무 그림자와
쏟아지는 햇빛 사이로
날마다 찾아오는 새의 콩트르주르
작은 나뭇가지에 앉아 유리벽을 쪼며
창에 엉기는 햇살 서랍에 비밀을 기록하고 있다
캄차카와 아무르를 지나
새는 유리의 강을 건넌다
새가, 나를 닮은 새가
바람과 일렁이며 구름 따라 간다
투명하고 단단한 경계
새는 끝내 유리창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날 것이다
추운 곳에서 추운 곳으로 향하는
새들의 이동 경로를 이해할 순 없지만
해가 천천히 서쪽을 향해 돌아설 때
새의 행로가 경계를 넘어
죽음을 벗어난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모두의 날씨
그 개는 사나워 길들이기 쉽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았으며 주인의 물건을 이빨로 물어뜯었다
조련사는 마주 앉아 개의 눈동자를 주시한다
앉아!
붉은 눈빛이 목줄을 바짝 잡아당긴다
버틸수록 더 강하게 압박하며
조련사는 개의 눈을 응시한다
개도 피하지 않는다
목줄을 잡고 앉으라고 다그치면
크릉, 물어버릴 거야
야생을 드러내자 조련사가 숨통을 조이듯 목줄을 잡아챈다
당황한 듯 떨리는 눈동자
이빨이 순해진다
비겁한 본능이 핏속에 흘러, 손을 내밀면 앞발을 내주었다 손짓에 따라 몸을 굴리며 던져주는 간식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하나둘 관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채널을 돌렸다
`오늘의 날씨와 일정한 지구의 자전이 순행하는 내용이었다
모형, 있으나 없고 없으므로 있는
책장 위에 모형 비행기를 두었다
겨우 새끼손가락만 했다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착륙했고
바람도 없는데 시스루 커튼이 술렁였다
햇빛파도가 하얗게 유리창을 쓸어내린다
달항아리의 매화나무 눈이
항아리 속의 검은 고요를 휘젓는다
꽃잎에 생채기를 낸 초승달을
해먹에 눕혀 그 곁에 함께할 수 있다면
종횡무진, 나도 빈방에서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다
어떤 날은 간디를 찾아갔는데
서랍에 갇히고
잊고 있던 책의 갈피가 되기도 한다
작은 모형 비행기를 내던졌다
고요가 우주 속으로 물수제비를 뜨면서 날아간다
새끼손가락만 한 모형 비행기가
은하계를 빠져나간다
내가 없으면 세계라는 말조차 없다, 신도
~없다
눈치 없이 핀 꽃
엄마는 금기어였다
금기어를 키우지 못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그녀의 손이 목련 비늘처럼 떨어졌다
새는 남쪽 나라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목에 걸린 가시를 밥과 함께 꿀꺽
거절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혼 가정의 아이는 눈꼬리가 길다
한글보다 눈치를 더 빨리 깨친다
엄마 없는 표시를 내지 않으려고
잘 숨기고 들키지 않는 법을 배웠다
오랫동안 무언가 목에 걸려
물을 마시고 기침을 해도 내려가지 않는다
말을 할 때마다 캑캑거렸다
의사가 매핵기라고 해서
잔기침을 쏟았다
삼켜지지 않는 말들을 울대에 붙인 채 살고 있나요?
매화꽃 지면 탐스런 매실과 함께
엄마라는 시큼한 금기어도 주렁주렁하다
한 알의 눈물이 넘쳐
비워낸다 조금씩, 수위를 넘은 울음통
누가 울면 따라 운다 무조건 반사처럼
울음은 나를 적시는 스위치
웃음보다 울음이 전이가 잘 되는 까닭은 물의 속성을 가져서다
운다, 어릴 적 못다 운 울음을
불러 운다, 흐르지 못한 울음
나머지까지 다 울어야 하는데
막힌 울음은 우울이 되고 귓속으로 차오르고 무릎을 흥건하게 하다 온몸을 떠돌아 병이 된다
울음문이 활짝 열렸던 날들
막차에서도 내리지 않았던 엄마
매연이 남긴 어둠과 함께 날마다 더 늦어지는 엄마를 기다리느라
골목이 저물고 어린 그림자가 지워졌다
예감은 비껴가는 법이 없고
눈물을 알약처럼 삼킨다
사진 속 엄마는 왜 그날의 나를 지나쳐 갔는지
여전히 웃고 있어 묻지 못한다
충분히 다 울었다고, 그러니까
이제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가짜
서럽게 우는 대신 기울여 비워낸다
시집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 상상인 2024년
정선희 시인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등단
제20회 모던포엠문학상 수상
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