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이브
방의 벽에 걸려있는 달력에는 데비드 호크니의
‘가로등 빛이 있는 라벨공원’ 그림이 프린트 되어 있다.
이제 두 주 정도만 지나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된다.
언제부턴가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와도 별 달리 느끼는 게 없다.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르기 직전에는 더 할 수 없이
긴장되지만 몇 곡을 부르다보면 하품까지 나오는 것처럼
왜 이렇게 지루한 것을 반복하지 라고 생각하게 된다.
한 겨울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숨을 쉬면
하얀 입김이 도라버치처럼 생겼다가 사라진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런 것이다.
도라버치처럼 생겼다가 사라진다.
(도라버치는 환타스틱소녀백서의 주인공이다)
아주 오래 전 대학생 시절 크리스마스 이브의 일이다.
같은 과 여자후배에게서 전화가 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종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실 그애는 나와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낼만한 이유가 없었다.
평상시에 별로 친하게 지낸 적도 없었고
단지 가을축제때 같이 과 일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 일이 조금 지체가 되어 밤늦게까지 강의실에 남아
둘이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밖에 나가 노점에서 호떡과 음료수를 사와
나눠 먹은 적이 있다.
그애는 평범한 외모를 가졌고 평범한 말투를 사용했다.
물어보면 대답하고 끝이었다.
그애와 작업을 마치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가면서
나는 물어보았다. 이 일이 재미없니? 라고.
그러자 그애는 왜 그런 질문을 하죠 라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그애가 분명히 화가 난 게 틀립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애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애는 단서를 달았다.
종이 쇼핑백과 드라이버, 펜치같은 연장도구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모자를 쓰고 오라고 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째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는데 그런 게 필요한 걸까?
하기는 그 해에는 디지길레스피가 죽었고 리버피닉스가 죽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귤껍질처럼 쌓이던 해였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대체 얼마큼의 무게를 가질까?
나는 그것을 체중계로 재 본 적이 있다.
내 경우에는 4.5kg이었다.
나는 그날 4.5kg의 귤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밤마다 한아름 꺼내서 먹었다. 그때도 귤껍질이 쌓였다.
그애와 만나기 전에 길에서 베이지색의 더플코트를
똑같이 입은 연인을 보았다. 나를 마주보고 걸어왔는데
베이지색 더플코트를 똑같이 입은 연인이 이 세상에도 있구나
하며 쳐다보았다.
그애에게 더플코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애는 블랙과 핑크가 섞인 후드 반코트와 청바지를 입고있었다.
나는 이태원에서 산 뉴욕양키스모자를 썼다.
내가 들고온 종이 쇼핑백과 연장들을 확인하더니 그애는
눈짓으로 버스정류장을 가리켰다.
‘제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세요?’
‘뭔데?’
‘코끼리요’
‘설마’
‘히데가 한 말이예요. 엑스재팬 기타리스트 히데가 데뷔하고나서
가진 인터뷰때 한 말이예요.
그 사람 자기 성격을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파충류가 야구하고 있는 것 같은 성격이래요. 재밌죠.’
사실 그날 그애가 정말 원했던 것은 코끼리도 아니었고
파충류가 야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애가 원했던 것은 바로
종로 한복판에 서있는 버스 정류장의 표지판이었다.
나는 그애가 어디서 가져온지 모르는 디딤판을 이용해
그애가 시키는대로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떼어내어
종이쇼핑백에 넣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는 동안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버스정류장표지판을 교체하러 온 아르바이트 학생정도로
보았다.
어떤 이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한다며 우리를 동정하였다.
종로한복판에 있는 버스정류장표지판을 떼어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었다.
그동안 왜 이 일을 시도해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들 정도였다.
종로 버스정류장표지판이 들어있는 종이쇼핑백을 번갈아 들고
우리는 영화를 한편 보았고 가벼운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재즈바에 갔다.
그애는 왜 버스정류장표지판을 떼어내어 들고다니지 않으면
안되는지 말하지 않았다.
나도 딱히 물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신 내내 들었던 느낌이지만 극장에 들어가 영화를 볼때에도,
분식점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그리고 재즈바에 들어가
나는 버드와이저를 그녀는 깔루아밀크를 시켰을 때도
뭔가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종로의 버스정류장표지판이 지금 우리 손에 있었던 것이다.
퀸텟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쿨재즈로 연주하고 있었다.
‘이런 짓 하면 안되는 거 알아요. 잘못되면 경범죄 같은
좋지않은 쪽으로 말려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꼭 한번 하고 싶었어요. 모두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런 버스정류장표지판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잖아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무도 관심 없는 표지판이
잠시 없어졌다고 해서 불편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버스표지판이 없어서 버스를 타지 못할 리는 없잖아요.
전 외롭게 크리스마스 이브에 혼자 서 있을 버스표지판과
그리고 선배와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싶었어요.
특별한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벌이지 않을 거예요.
일생에 딱 한번으로 족해요. 표지판도 그것을 원하고요.
이 표지판 많이 낡았죠?
아마 조만간 다른 새 표지판으로 바뀔 거예요.
잊지않을 거예요. 우리와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 이브를 말이죠.
고철이 되어 다시 재생 용광로 같은 데 들어가도
이 애는 우리를 잊지 않을 거예요.
재생이 되어 어느 집 토스터기가 되든지, 아니면
다음번에는 가로등이 되든지, 고속도로 가드레일이 되든지
우리를 잊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도 아마 선배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버스표지판을 다시 원래 있던 곳에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일곱시간동안 종로 버스정류장표지판이
없어졌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나와 그애는 버스정류장표지판을 말없이 한참 쳐다보았다.
주위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요란하게 들렸고
사람들의 웃음소리, 말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악의 가장 절정은 음과 음 사이의 짧은 침묵에 있다고
셀로니우스몽크가 얘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훌륭한 얘기다.
여기까지 내 기억 속의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이브이다.
엑스재팬 히데는 그때로부터 5년후에 죽었다.
그가 원한 것이 정말 코끼리였을까?
그는 정말 파충류가 야구 하는 성격을 가졌을까?
어쨌든 그애 말대로 나는 그해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잊지못한다.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코끼리를 보고 싶다.
도라버치처럼 생겼다 사라지는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카페 게시글
녹색숲의 우물
잊을 수 없는 크리스마스이브
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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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2.06 16:0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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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은 그 표지판 그대로 있겠죠? 근데 누군가의 기억에 또렷이 도장찍듯 찍고 사라지는 거... 왠지 서글프네요.
반가워요, 미도리님^^*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것 같아요. 음 마음이 아픈 것은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결국 사라진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크리스마스떄 나가본적이 중3때 말고는 없다는...;;;;; 올해도 집에서 특선 영화나..ㅋ;;
저도 나가지 않을거예요. 집에서 재즈를 들으며 책을 읽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