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파주 文成(문성)이이 유적(사적 제525호)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 유적지가 국가지정 문화재로 최종 승격됐다. 20일 시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19일 자운서원, 율곡 이이 묘, 신사임당 묘 등을 사적 제525호로 지정했다. (2013년2월)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유적지 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ㆍ 병조ㆍ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실시 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유적지내에는 율곡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란 현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에 선생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숙종 9년(1683)에 건립된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와 ‘이이선생 신도비’ 유적등이 있으며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사적 제525호“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소재지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법원읍 동문리 산 5-1) 문의처 031-958-1749 (파주 이이 유적) '文成(문성)'은 1624년 인조 임금이 율곡 이이에게 내린 시호(諡號)로 "도덕과 학문을 널리 들어 막힘없이 통했으며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해서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道德博聞 安民立政 도덕박문 안민입정" "見得思義(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파주에 있는 율곡 선생 유적지는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율곡 이이를 배향하고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비롯하여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 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있는데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가 큰 곳이다. 자운서원이 파주에 있는 이유는 율곡이 태어난 곳이 신사임당의 친정, 강릉이지만 본가는 파주에 있기 때문이다. 강릉에서 태어나 6세에 파주 율곡리 본가에 들어와 살아서 이곳에 자운서원을 지은 것이다. 자운서원에 가면 율곡 이이의 기념관에서 다양한 문화재를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휴식할 수 있다.
<자운서원>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肅宗)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자운서원내 문성사〉
<자운서원묘정비>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수 있다. 〈이이(율곡)선생 가족묘〉 이곳에는 율곡선생과 부인 곡산 노씨 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 가족 14기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뻗은 산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묘소의 순서는 위로부터 율곡 부인 노씨의 묘, 율곡의 묘, 맏형 부부인 이선과 곽씨 합장묘, 부모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맨 아래에 맏아들 이경임의 묘가 일렬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대손 이계의 부인 김씨 묘와 율곡의 둘째부인 김씨 묘, 장손부부인 이제와 정씨의 쌍분묘가 왼쪽 능선에, 율곡의 큰누님과 매부인 매창과 조대남의 쌍분묘, 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씨의 합장묘, 매창의 둘째아들 조영묘, 8대손 이묵묘가 오른쪽 산 능선에 조성되어있습니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림당묘 율곡 이이의 아버지와 어마니 신사임당묘(합장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의 묘소이다. 묘는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합장묘이다. 신사임당은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강릉에서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의 무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19세 때 이원수에게 출가하였는데 친정에아들이 없어서 남편에게 동의를 구한 뒤 친정에 머물렀다. 그 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고 38세가 되어서 서울 수진방 시댁에서 시댁살림을 주관하고 슬하에 4남 3녀를 둔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본명은 신인선(申人善)이고 사임당은 당호(堂號:이름대신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이름)로써,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이미 산수도(山水圖), 포도도(葡萄圖)를 그렸는데,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이자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묘역은 봉분 앞 중앙에 묘비가 있고 묘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있고 좌우에는 키작은 문인석 1쌍이 자리잡고 있다. 후에 새로 세운 까만 돌(烏石)로 만든 묘비 1기가 묘 뒤편에 있으며,상석 앞부분은 화강암 바닥으로 단장하였다. 율곡 이이의묘(위는 부인의묘) 조선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이이는 중종 31년(1536)에 강릉 북평촌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서울 본가로 올라와 어머니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명종 3년(1548) 13세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에 호조좌랑에처음 임명된 이후 황해감사, 대사헌,대제학, 호조, 병조,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였으며,대동법 실시와 사회제도의 개혁에 노력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과쌍벽을 이룬 유학자로 근본원리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학문연구의 태도로 삼았으며, 학문을 이론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책으로 민생과 국가 재정 문제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선생의 저서로는 《성리설》, 《성학집요》, 《격몽요결》등이 있다. 현재 묘역에는 선생의 묘와 부인 곽산노씨의 묘가 위·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는데,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으며,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율곡이이신도비는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이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묘를 뒤에서 본 모습 파주오시는길 수도권지역에서 오시는 길 서울 : 서울 - 강변북로 - 자유로 - 문발IC - 파주방면 경기도 : 수원 -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자유로 - 문발IC - 파주방면
율곡 이이유적지 ○ 대중교통 9710번 : 문산터미널↔명동입구 → 문산 종점 하차 → 11번 환승 → 자운서원 앞 하차 909번 : 문산터미널↔서울역 → 문산 종점 하차 → 11번 환승 → 자운서원 앞 하차 92번 : 맥금동↔적성 → 문산터미널 하차 → 11번 환승 → 자운서원 앞 하차 11번 : 갈곡리↔문산 → 자운서원 앞 하차 11번행 운행 시간표 문산 - 자운서원 - 법원읍행 07:30, 08:40, 09:50, 12:40 14:40, 16:55 19:40 법원읍 - 자운서원 - 문산읍행 07:10 08:00 09;26 12:08 14:10 16:26 19:12 ○ 승용차 구파발 → 관산동 → 문산 사거리(우회전) → 선유4리 → 선유 삼거리(법원읍 방면으로 진행) → 신병교육대 → 파양초교 → 삼거리(좌회전) → 동문리 마을로 진입 구파발 → 관산동 → 주라위 삼거리 → 파주읍 → 용주골 → 법원 사거리 → 문산 방향으로 진행 → 법원여중으로 진입(우회전) → 율곡 안산아파트 지나서 진행
[파주삼현]묵재 윤관 소재지:파주시 광탄면 혜음로 930(광탄면 분수리 산 4-1) 문의처 031-940-4354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윤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윤집형의 아들이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 후에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일찍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고 한다. 일곱살 되던 해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등과하여 습유 . 보궐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로서 출추사가 되어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그뒤 좌사낭중으로 재직중이던 1095년 10월 숙종이 즉위하자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받고 돌아왔다. 이어 우간의 대부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 대부와 친척이었으므로 사간인 어사대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의 상소에 따라 해임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 하였다. 이같이 기세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과 이주 규모는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검진에 이주민 532가구 등이다. 이 6성 이외에 이듬해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윤관장군묘(사적 제323호) 소재지 광탄면 혜음로 930 (광탄면 분수리 4-1) 문의처 031-947-3330 (윤관장군묘 관리사무소) ♣ 문화관광과 문화팀 ♣ 담당자 : 신민경 ☎ 031) 940-4354 이메일
파주 삼릉(공 · 순 · 영릉)(사적 제205호) 소재지 조리읍 삼릉로 89(조리읍 봉일천리 산 4-1 산 15-1) 문의처 031-941-4208 (문화재청 파주지구관리사무소) 홈페이지 http://paju.cha.go.kr 공릉 恭陵 공릉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 공릉 恭陵 공릉은 조선 제8대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로 1460년(세조6) 16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인성대군(人城大君)을 낳고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가 1472년(성종 3)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공릉은 당초왕후릉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성되어 초석, 병풍석과 난간 등이 생략되고 양석과 둘레돌을 둘러 무덤을 보호하게 하였다. 봉분앞에 상석(床石)과 8각의 장명등을 세우고 좌우 양쪽에 문인석 2기를 세웠고 봉분주위로 석마(石馬),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 주변을 호위하고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 비(碑)에는 조선국장순왕후공릉(朝鮮國章順王后恭陵)이라 새겨져 있다. 순릉 順陵 순릉은 조선 제9대 성종(成宗)의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 역시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딸로 공릉의 장순왕후와 서로 자매지간이다. 1467년(세조13) 11세에 가례를 올렸고 성종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으나 성종 즉위 5년(1474년) 4월 슬하에 자식 없이 1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순릉은 무덤 밑둘레에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는데, 여기에 표현된작은 기둥은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을 본받은 것으로 조선 초기 무덤에 쓰인 석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봉분앞에 상석과 8각의 장명등을 배치하고 양쪽으로 문인석과 망주석 2기를 두었다. 또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각 2필씩을 두어 능 주위를 호위케 하고 있다. 능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 비에는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 새겨져 있다. 영릉 永陵 영릉은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진종(眞宗·추존)과 그 비(妃)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趙氏)의 능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24년 영조 즉위와 더불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춘추 10세의 나이로 돌아가 시호를 효장이라하였다. 1762년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한 뒤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正祖)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효장은 정조 즉위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도 올려영릉(永陵)이라 하였다. 효순왕후 조씨는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1727년 13세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해에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춘추 37세로 돌아가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을 쌍릉으로 하여 2기의 상석을 앞에 놓았으며 그 중간에 사각옥형의 장명등을 배치하고 문인석 2기와 석양(石羊)·석호(石虎)를 각각 2필씩 배치해 능주위를 호위케 하였다. 능 아래에는 영조의 명에 의해 옛날 방식으로 세운 정자각(丁字閣)이 있고 비각(碑閣)과 홍살문이 위치하고 있다. 추존왕 진종(眞宗) -영릉 능호 : 영릉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條里面) 봉일천리(奉日川里)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조성시기 : 1729년(영조 5) 능의구성 영릉(永陵)은 영조의 큰 아들 진종과 비 효순왕후의 능이다. 쌍릉으로 조영되었다. 진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가 훗날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묘의 예를 따라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봉분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생략되었고, 봉분 주위에는 석호와 석양, 문석인이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석인은 조선 전기의 능인 공릉에 비해 다소 마르고 작은 편이다.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문석인과 함께 중계(中階)에 배치된 석마 역시 조선 전기와는 다른 형태로 겸손하게 머리를 구부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기의 석마는 둔중한 모습이지만 영릉의 석마는 전기의 것에 비해서는 살이 약간 빠지고 날렵한 모습이다. 하계는 생략되었으며 무석인 역시 없다. 능의역사 1728년(영조 4) 11월 16일 어린 나이의 세자가 승하하자 영조는 그 해 12월 2일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 이듬해인 1729년(영조 5) 1월 26일 현재의 위치인 순릉 왼쪽 산줄기 언덕에 예장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던 효순왕후는 1751년(영조 27) 11월 14일 창덕궁 건극당에서 소생없이 3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으며,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 1월 22일 효장세자묘 왼쪽에 안장하였다. 이들이 세상을 떠난 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효장세자의 밑으로 입적시켰다가 그가 왕위에 오르자, 즉위년인 1776년 진종과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능 또한 영릉으로 추봉되었다.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 -순릉 능호 : 순릉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조성시기 : 1474년(성종 5) 능의구성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단릉이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년(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능의역사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월 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 능호 : 공릉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조성시기 : 1461년(세조 7) 능의구성 공릉은 장순왕후의 능이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자빈묘로 간략히 조영하였다.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없으며, 일반적으로 왕릉에 세워지는 망주석도 생략되었다. 그러나 석양과 석호가 호위하고 있는 봉분은 그 크기가 크며 혼유석과 장명등, 문석인과 석마가 놓여 있다. 석물은 조선시대 초기 형태인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석양은 네 발을 모으고 곡장(曲墻)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호와 같이 악귀를 쫓는 기능을 한다. 이 석양은 얼굴과 뿔은 비교적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몸통은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한편 석호는 석양과는 달리 앉은 자세로 되어 있다. 봉분 뒤 좌우에 1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위엄이 있고 용맹한 호랑이라기보다는 귀여운 고양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곡장 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악귀를 쫓는 벽사의 기능을 한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가 ㄱ자로 꺾인 점이 특징적이다. 능의역사 장순왕후가 1461년(세조 7) 12월 5일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자 세조는 이듬해 2월 17일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2월 25일 파주 남쪽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1470년(성종 1) 1월 22일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1월 11일에 장순왕후로 추존했다. 그러나 왕후로 추존된 후에도 세자빈묘로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는 않았다.
한명회이야기
공릉과 순릉에 잠든 두 자매 파주 삼릉이라고 일컫는 공릉, 순릉, 영릉 중 공릉과 순릉은 공통점이 있다. 이 두 능에 잠든 예종 비 장순왕후, 성종 비 공혜왕후는 모두 한명회의 딸로서 친가에서는 자매지간이지만, 시가인 왕실에서는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사이였다. 두 딸을 모두 왕가로 출가시킨 한명회는 당대 보기 드문 지략가였다. 궁지기로 시작한 벼슬 한명회는 1415년(태종 15)에 예문관 제학 한상질의 손자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한기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과거에도 늘 실패하여 공신의 자손을 관리로 특채하던 문음(門蔭) 제도에 의해 38세 때인 1452년(문종 2) 궁을 지키는 일로, 다소 보잘 것 없는 경덕궁직을 맡게 되었다. 궁지기에서 일등공신으로 그가 말단관직에 간신히 올랐을 때에는 이미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나이의 단종이 즉위하였을 때이다. 이 때 그는 지인 권람 등을 이용하여 단종의 삼촌이었던 수양대군과 결탁, 정치적 야망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을 성공시켰다. 계유정난이 성공하여 수양대군이 실권을 잡은 후 한명회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 차례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키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1466년(세조 12)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일개 궁지기에 불과했던 그가 13년 만에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자매를 나란히 왕비로 올린 한명회 한명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녀들을 모두 왕가의 며느리로 들여 더욱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주지하듯이, 그의 슬하의 1남 4녀 중 맏딸은 세종의 사위 영천부원군 윤사로의 며느리가 되었고, 둘째 딸은 영의정 신숙주의 맏아들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딸은 예종의 비, 넷째 딸은 성종의 비가 되었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딸의 이른 죽음 한명회로 하여금 두 번이나 왕실의 장인어른으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한 그의 딸들은 꽃다운 나이에 모두 요절하였다. 공릉에 잠든 예종비 장순왕후는 세자빈일 때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일주일이 채 안되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순릉에 잠든 성종비 공혜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른지 5년 만에 열아홉의 나이로 승하한 것이다. 당대의 권력가 한명회의 최후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절대권력을 행사해 온 한명회는 네 차례에 걸쳐 1등 공신으로 책록되어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두 딸을 먼저 보내고 1487년(성종 18)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폐사에 찬성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하는 변을 겪기도 하였다.
파주삼릉과 사람들 이야기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출세를 위해 수단을 꾸몄다고 의심 받은 순릉의 능참봉 『중종실록』 1528년(중종 23) 1월 18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공(三公)이 아뢰기를, “순릉(順陵) 참봉 송현(宋俔)은 전 이조 판서 신공제의 집에 분경(奔競 : 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수단을 쓰는 일)한 것으로 추고를 받았습니다. 의금부는 송현이 판서의 집에 출입한 것으로 의심하여 3차 형문할 것을 계청하였고, 전하는 이를 윤허하셨습니다. 그러나 간관(諫官)이 ‘그가 직령(直領)을 입었었으니 만일 재상을 찾아가 배알하려 했다면 절친한 사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직령을 입고 갔겠는가?’ 하였으니, 간관이 어찌 헛된 말을 아뢰었겠습니까? 조관(朝官)이 확실치 않은 일로 여러 차례 형문을 받으니 정상이 실로 애매합니다. 직령을 입었었는지 여부는 그 금란 서리(禁亂書吏)를 심문하소서.” 하니, 전교하였다. “아뢴 말이 지당하다. 나도 서리를 심문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간관은 증거인으로 추고해서는 안 된다고 하므로 부득이 3차로 형추하게 하였다. 발명(發明)한 후에는 자연 공사(公事)가 있을 것이다. 전에 분경죄를 철저히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에 진술되었기 때문에 이제 송현을 3차로 계하(啓下)한 것이다. 지금 그 서리를 심문한다 하더라도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위의 기록은 순릉 참봉 송현이 전 이조판서의 집에 출세를 위해 드나들었다는 의심을 사고 있어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내용이다. 왕릉을 관리하는 공직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능권무직의 형태로 이어지다가 세조가 관제개혁을 한 이후 능참봉직이 생겼다. 능참봉직은 비록 종9품에 해당하였지만, 임금의 능을 관리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관료진출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이제 막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자들의 청직(淸職)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능참봉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양반의 신분이어야 했다. 보통 생원, 진사 혹은 유학 중에서 임명이 되었으며, 어린 사람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박석고개이야기 구파발로 이어지는 박석고개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에서 구파발로 넘어가는 고개를 박석고개라고 부른다. 갈현동과 불광동을 양쪽에 끼고 통일로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에는 북한산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낮은 구릉성 산지가 남북으로 뻗어 있다. 박석고개 명칭의 유래 박석고개는 서오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풍수지리적 요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지맥(地脈)이 깎이지 않도록 박석을 깔았던 데서 고개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이 고개 근처에 왕실의 전답이 있었으므로 그곳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흙을 밟지 않게 하려고 넓고 얇게 뜬 돌인 박석(薄石)을 깔아서 박석고개라는 명칭을 얻었다고도 전해진다. 한양을 드나드는 중요한 길목 박석고개는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서울로 들어오고 나가는 행인은 물론 상인과 관료, 중국 사신들도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곳이다. 서울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숱한 애환 또한 안고 있다. 파주 삼릉을 이루고 있는 공릉, 순릉, 영릉에 잠들어 있는 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9대 성종 원비 공혜왕후, 영조의 맏아들이며 사도세자의 형인 추존왕 진종과 효순소황후의 장례행렬 역시 이 고개를 넘었다. 현재의 박석고개 현재는 지명만이 남았을 뿐 박석을 찾아볼 수 없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뻗어 있다. 또한 도로공사로 고개가 낮아져서 고개라는 느낌 또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박석고개 옆, 통일로 주변으로 위치한 파주의 삼릉에서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잠들어 있는 왕족들의 슬픈 내력과 애처로운 사연들이 여전히 묻어나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醫聖(의성) 허준선생
묘소 파주군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에 동의보감 저자 유내스코 세계문화유산등제 민간인 통제구역인 파주 DMZ(민통선) 안에 위치 군의 출입허가 필요 묘비 증 보국 숭록대부 양평군 구암 양천 허공준 지묘 중건비 배 정경부인 안동김씨 허준선생의 묘소 허준 부부 묘 뒤에는 생모의 묘로 추정
허준선생의 제실 구암제 구암은 허준의 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