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에는 남자는 가족부양과 자신의 꿈을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는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에 항구는 여성적 이미지로 그려져 사람들에게 머무름과 안식을 제공하는 이타적 존재로 나타난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하고 극적이며 신산(辛酸)한 인생살이에서 항구(港口)는 모성의 품과 같다. 아기가 엄마의 품 안의 젖동냥을 그저 누리고 장성하여 그 은혜를 갚으며 봉양하듯 항구는 배에게 영원한 모성애로 품어 준다.
고래잡이의 천혜의 조건을 갖춘 장생포는 포경산업으로 항구도시의 경제를 견인했다. 특히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현대그룹과 울산 석유화학공단을 비롯한 공단 조성으로 중화학공업의 융성은 농어촌 소도시였던 울산을 장차 전국 최고 부자 도시로 탈바꿈하게 했다. 장생포의 포경산업으로 장생포는 한때 수만 명의 주민들로 이 항구의 활황기를 직접 체험케 했다. 고래문화특구 초입 삼양사는 설탕공장으로 삼양 설탕은 당시 설탕의 대명사였다. 40년 전 내가 여천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학교 소풍을 장생포 삼양사 공장 앞으로 걸어갈 정도였다.
`하나 둘 하나둘`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아이들은 재잘거리며 거기까지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다. 그래도 한 개도 피곤치 않았던 아이들은 어느덧 중년의 로맨스그레이가 돼버렸다. 그 무렵 울산공단의 야경은 추억의 한 장면이었다. 지금 70에 접어든 큰 누나가 어느 날 동생들 4명을 불러 14번 용연 가는 버스를 타고 공단 야경 불빛을 구경 시켜줬다. 어렸던 나는 그 불빛의 영롱함에 감동했고, 그 화려한 야경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지금도 그 기억은 내게 선연하다. 장생포는 형과 낚시를 자주 갔고, 지금 고래박물관 뒤편 연안(沿岸)에 미끼를 끼워 던지자마자 `꼬시래기`들이 엄청 낚였다.
1987년 포경 금지로 울산의 포경산업이 막을 내릴 때 활화산같이 뜨겁던 장생포의 경제는 암흑기를 맞았다. 10여년 세월이 흐른 후 황폐해 가던 장생포의 부활은 역설적으로 고래의 기치를 내세웠고, 그것이 적중했다. 1997년 시작된 고래문화특구에는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이 들어서 있다. 고래박물관을 지키듯 고래바다여행선이 친구처럼 그 옆을 지키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처럼 울산의 해풍을 맞고 자란 고래바다여행선을 직접 타보며 맛볼 일이다.
고래바다여행선에 승선하면 한때 고래잡이로 동해를 누볐던 선원들의 함성이 들려올 것이며, 바닷속 고래들의 반가운 인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정주영 회장의 울산미포조선 공장과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과 노을 맛집 슬도의 등대와 대왕암공원의 해송도 벗삼아 구경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전국 최고의 공단, 울산의 모습을 바다 위에서 날 것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마침 고래 떼를 발견하는 행운이 깃드는 날로 기억되면 가일층 금상첨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