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성인들은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받던 그와 스물한 명의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순교하였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우간다의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본기도
하느님,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인의 씨앗이 되게 하시니
복된 가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의 피로
하느님의 교회를 비옥한 땅이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소서.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귀중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 베드로 2서의 말씀입니다.1,2-7
사랑하는 여러분, 2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풍성히 내리기를 빕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부르신 분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당신이 지니신 하느님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신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5 그러니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6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7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복음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에게
1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2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 종 하나를 보내어,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를 붙잡아 매질하고서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그들에게 다시 다른 종을 보냈지만,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고 모욕하였다.
5 그리고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그 종을 죽여 버렸다.
그 뒤에 또 많은 종을 보냈지만 더러는 매질하고 더러는 죽여 버렸다.
6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7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8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9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11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12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 그분을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순교자들의 승리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그들이 온갖 고초를 이겨 내게 한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가 시련을 겪을 때에도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억지로라도 했던 선행 하나가 죽기까지 선한 영향을 준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나쁜 소작인들은 주인의 땅을 경작하면서도 한 번도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이들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외아들까지 그들에게 보냅니다. 이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성체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체는 생명 나무인데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면 오늘 주인의 아들처럼 그들 안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게 우리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양심은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이다. 양심이 없다면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기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불편해집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없다면 아기들은 영원히 유아적인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계속 받아먹기만 하며 내어줄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양심의 작용을 통해 우리 욕망을 누르고 나눌 줄 아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양심이 무뎌졌다면 아무리 받아도 미안하고 고마운 줄 몰라서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단 한 번도 소출을 바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작용이 약합니다. 그러나 한 번 했던 것을 하지 않게 되면 양심의 가책이 심해집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낸 소작인들이라면 아들까지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배신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성체를 영해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 인간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온갖 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십일조, 혹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봉헌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또 돌아가십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십일조 연습입니다. 저희 성당은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50만 원씩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사무실에 가서 십일조를 5만 원씩 내야 합니다. 이렇게 평생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해 보았다면 나중에라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 했던 선행은 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 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더 큽니다. 그래서 돌아오기가 쉽습니다. 아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성당 나오기 싫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는 아이 때 시키지 않습니까? 어른들에 대한 예절도 어렸을 때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번 해 보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안 해 보았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이 덜합니다. 그래서 착해지기가 그만큼 힘이 듭니다.
한 번 한 선행이 평생 내 양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아이들이 힘들다고 해도 매주 교리에 앞서 묵주기도 5단씩 시킵니다. 아이들은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시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이렇게 주님께 시간을 봉헌한 경험이 그들의 양심에 들어가 평생 작용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첫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본 사람은 미래에라도 돌아올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도 단 1년 만이라도 십일조를 해보고 기도나 선행을 체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닭을 키우려고 닭장을 근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이 닭장에 큰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닭장 밑에서 물이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군다나 닭장을 만드느라 가지고 있던 돈을 다 써서 수리할 비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닭을 키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모두 팔아 버려야 할까요?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지만, 이 역시 올바른 판단은 아닙니다. 닭장 만드는 데 들었던 비용을 모두 날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을 최고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닭을 팔고, 그 판 값으로 오리를 사서 닭장에서 키우면 어떨까요? 오리는 물이 필요하니 이렇게 물이 올라오는 것이 최적의 환경일 것입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길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뜻도 사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비로소 이해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뜻만을 주장하고 그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주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불평과 불만으로 원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해 고민 속에 있을 때, 나의 뜻만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뜻을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서는 늘 우리 편이셨습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이 아닌 최선의 상황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쁠 수 있는 또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마음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일을 주인이 대신 해주었습니다. 또한 포도밭 소출의 전부를 가져오라는 것도 아닌 얼마만을 내라고 합니다. 아마 주인은 자기의 배려와 사랑을 알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작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배려는 전혀 보지 못하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처럼 착각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사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을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보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늘 나의 입장에서 편하고 쉬운 것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어렵고 힘든 것이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용기 있게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모습이 충실한 주님의 소작인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도, 다른 누구도 당신의 길을 대신 가줄 수 없다. 그 길은 당신 스스로 가야할 길이기에(윌트 휘트먼).
사진설명: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