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고상섭 목사
1.
"사람들이 성경본문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기전까지는 그 본문을 제대로 이해한 게 아니다. 이것을 보게끔 돕는 것이 적용작업인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마음을 향한 설교와 문화를 향한 설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팀 켈러 설교,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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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는 성경본문이 청중들의 삶에 어떻게 임하는지를 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텍스트 앞의 세상'(the world infront of the Text)을 말한다. 단순히 성경본문을 설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문 앞에 놓인 청중의 상황에 적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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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용보다는 성경본문이 말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설교는 성경본문이 스스로 선포한다고 믿고 있고 본문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텍스트 안의 세상"(The world within the text)에 설교가 달려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너무 본문에 빠져버리면 자칫 설교와 주해의 구분이 없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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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성경의 의미를 넓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쓴 저자의 상황과 배경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를 좀 더 파악하려고 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저자의 상황과 텍스트가 쓰여진 시대상황적 배경을 염두해둔다. 이것은 '텍스트 뒤의 세계'(The world behind the Text) 를 깊이 고려해서 성경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겠다는 의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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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국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위의 세가지 모두를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어떤 본문은 텍스트 자체를 좀 더 깊이 있게 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어떤 본문은 그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저자의 상황을 잘 이해해야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갈라디아서 설교를 준비할 때, 로마의 양자를 입양하는 방법, 후견인과 청지기의 개념등은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더 본문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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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주해는 결국 오늘날 청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가 중요하다. 설교의 목적이 1세기 문헌의 공부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성경주해를 열심히 하라는 가르침은 맞는 말이지만, 처음에는 주석이나 다른 자료들의 도움을 받지 말고 본인 스스로 성경본문과 씨름하라는 가르침은 어느 정도 동의가 되지만 또 동의되지 않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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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가 성경본문과 씨름을 해도 그 본문 속에서 발견하는 원리들은 이미 내 안에 있는 해석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미 내가 읽었던 책이나 경험이나 내 머리 속에 있는 자료들이 본문과 연결되면서 정리되는 것이지 내가 모르는 개념들은 아무리 본문을 몇 시간씩 보아도 알지 못한다. 결국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텍스트 뒤의 세계와 텍스트 안의 세계 그리고 텍스트 앞의 세계를 모두 고려해야하는 작업이라면, 성경본문과 함께 다양한 주석들을 통해 그 본문이 말하는 의도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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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인하는 작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본문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텍스트 안의 세계를 텍스트 뒤의 세계와 연결해서 파악을 해야지 텍스트 앞의 세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다. 즉 텍스트 뒤와 텍스트 안의 세계를 통해 제대로된 주해의 작업이 이미 수요일 정도에 다 나와 있어야지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텍스트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일반서적들과 참고자료들을 통해 전달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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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설교도 마찬가지고, 설교 준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두 자신만의 루틴과 자기의 설교철학이 필요한 것 같다. 교회론도 성경에서 나오지만 각기 다양한 목회 철학적 바탕으로 목회를 하듯이, 설교도 성경에서 비롯되지만 다양한 자신의 설교관과 철학들이 필요한 것 같다. 모두 동일한 설교를 해야 한다면 모두 천편일률적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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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잘 배우면 교리적 틀이 형성되게 되고 어느정도 형성된 교리적 틀이 있으면 본문과 주석들을 보면서 자신의 바운더리 안에서 이해되는 주석과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주석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주석을 통해서도 자신의 교리적 틀 안에서 세례를 주어서 변화시켜 사용할 수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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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본문을 월~목까지 깊이 묵상하고 주석이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잘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설교의 방식이라는 틀도 자신에게 맞는 사람들이라면 괜챦지만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과감히 그 틀을 깨고 자신의 틀을 세워가야 하는 것 같다. 설교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내가 내 이론을 내세워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데 까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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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유한 것을 설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성도들을 먹이고 양육하는 것이 목표라면, 가장 좋은 것들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아웃라인과 설교 대지가 다 나온 상태라도 누군가의 설교를 듣다가 좋은 대지와 예화가 있으면 교체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설교 주제와 맞고 더 좋은 설명이라면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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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설교를 준비를 시작할 때 부터 많은 주석들을 참고하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본문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모든 아이다어들을 다 기록한다. 그 기록들 중에서 몇 가지로 대지가 정리되면, 들을 수 있는 만큼 그 본문에 관련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듣는다. 그리고 대지와 관련된 일반서적들을 찾고 맞는 것이 있으면 일반서적들의 소제목을 통해 대지를 포장해서 전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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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은 본문만이 아니다. 텍스트 뒤와 앞을 모두 고려한 본문이어야 한다. 텍스트 앞의 세상과 뒤의 세상을 고려하지 않는 본문 중심의 설교는 어쩌면 설교라기보다 주해에 가까울 것이다. 오늘날 설교는 문화 내러티브 속에서 우상을 드러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럴려면 단순히 본문만이 아니라 본문 앞에 있는 세계를 본문으로 비춰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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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4시간 나의 예수와>의 저자인 존 마크 코머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형성되기(빚어지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무언가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형성될(빚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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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도 설교에서 "문화참여(설교 안의 문화의 특성을 담아내고, 설교 메시지를 문화 특성에 맞게 조율하고 연결하는 것)은 타당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청중의 삶의 근본을 발가벗기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텍스트 앞의 세계의 청중들의 문화적 내러티브를 깊이 이해하고 해석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본문 앞에 있는 첫 번째 독자들에게 저자가 했던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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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텍스트 뒤의 세계와 텍스트 안의 세계 속에서 텍스트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전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연결해야 한다. 단순한 본문 해석이 아니라. 그 성경을 쓴 저자가 그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 어떤 문화내러티브를 벗겨내주고 그리스도를 심으려고 했는지를 이해할 때, 오늘날 문화내러티브의 뿌리가 어떤 탈을 쓰고 등장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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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화적 설교는 단순히 문화 이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시대를 거쳐서 동일한 인간 안의 우상이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것 뿐이다. 요즘 설교에 대한 고민들이 많다. 무엇이 정답인지 잘 모르지만 어쨋든 중요한 것은 자기 목소리의 설교를 찾아가야 하는 것 같다. 신학교에서 배운 설교학을 토대로 이제 자기의 설교철학과 자기의 설교방식과 루틴들을 찾아가야 하는 것 같다. 설교에 대한 하나의 정답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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