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뿌리를 찾아서>
‘맹물’의 어원
홍윤표(전 연세대)
‘아무것도 타지 않은 순수한 물’을 ‘맹물’이라고 한다. 사람에게 비유할 때에는 ‘하는 짓이 싱겁고 야무지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맹물에 밥을 말아 먹는다’란 말도 쓰지만 ‘허긴 그런 재주라도 있으니께 저렇지 그도 웂으면 아예 맹물이게<1981유민(한수산),140>’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맹물로 가는 자동차’가 ‘물로 가는 자동차’보다 더 경제적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맹물’의 ‘맹’ 때문일 것이다.
‘맹물’의 ‘물’이야 다 아는 것이지만, ‘맹’은 무엇일까? ‘맹꽁이’의 ‘맹’과 같은 것일까? 아니면 ‘맹하다’나 ‘맹맹하다’의 ‘맹’일까? ‘맹꽁이’의 ‘맹꽁’은 아무래도 의성어일 것 같아서 ‘맹물’의 ‘맹’과는 연관이 없는 것 같고, ‘맹하다’(싱겁고 흐리멍덩하여 멍청한 듯하다)의 ‘맹’도 ‘싱겁다’는 뜻이 통하는 것 같지만 ‘맹’ 자체가 어근이 되기 때문에 ‘물’과 통합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맹물’의 ‘맹’은 무엇일까? 아마 국어의 역사에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쉽사리 ‘맹물’의 ‘맹’의 근원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 하면 ‘맹물’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할 때의 형태가 ‘믈’이나 ‘맹믈’이 아닌 ‘믈’이기 때문이다. 15세기부터 ‘믈’로 나타나서 17세기까지도 그 형태로 사용되었다.
소곰과 초와 달혀 프러 심에 머그라 므레 글혀 머거도 됴니라 <1489구급간이방언해3:105a>
혹 므레 의 과 마 먹고 고 번 리고 <1517번역노걸대下:53b-55b>
나 닷쇄도록 대변 몯 보거든 진 도 고기를 믈에 마 아 주어 머겨 여곰 부를 윤면 대변이 절로 통고 더데 수이 러디어 장 됴니라 <1608언해두창집요下:20a>
혹 믈에 양의 등과 가을 마 먹고 안마 고 반당 리고 <1670노걸대언해下:48b>
白煮 믈에 다. <1690역어유해下:46a>
기 반 죵나 쳐 그 고기 드리쳐 닉게 봇고 물 부어 장작 집믜여 히 <1670음식디미방,2b>
‘믈’은 ‘ + 믈[水]’로 분석되는데, 이 ‘’은 오늘날 ‘맨’으로 변화하여 많은 단어에 연결되어 쓰인다. ‘다른 것이 섞이지 아니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로 되었다. 그래서 ‘맨발, 맨주먹, 맨땅, 맨몸, 맨살, 맨손, 맨입, 맨주먹’ 등에 나타난다. 그러니까 ‘믈’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물’을 말하는 것이다.
‘-’은 15세기부터 접두사로 나타난다. ‘기름, 등, 밥, 몸, 발, 밥, 술, 짚, 흙’ 등의 파생어에 보인다.
[기름]
압 줄은 구은 게오와 기름에 지진 과 제믈에 쵸 뎨육과 <1677박통사언해上:5a>
[등]
등에 다. <1690역어유해下:20b>
사이 을 등에 고 여 필을 압뒤 거려 내의 물을 먹이고 도라올 <1830을병연행록4,28>
[몸]
듕환이 가게 보내고 몸만 잇돗더라. <16xx서궁일기,40b>
[발]
光脚走 발로 가다. <1690역어유해下:50b>
[밥]
나그내 야 그저 이 가개 아래 안자셔 밥 먹게 져 바블 간대로 머그라. <1517번역노걸대上:40b-41a>
샹인이 늘금애 밥 먹디 아니니라. <1588소학언해(도산서원본)2:65a>
혜아리건대 이만 밥이 무어시 緊리오. <1763노걸대신석언해,상,52a>
이 밥이오 아모란 반찬이 업세라.<1763노걸대신석언해,상,55a>
空飯 밥 空湯 고기믈 <1775역어유해보,30a>
[술]
술 먹기 어렵다(寡酒難喫). <1775역어유해보,60b>
[짚]
아직 믈 먹이지 말고 집흘 젹이 씹히고 다시 믈 먹이게 라. <1765청어노걸대언해2:10b>
[]
이런 구드레 엇디 자료 <1517번역노걸대上:25b>
여기에 ‘공(空), 무(無), 담(淡), 허(虛)’ 등의 뜻을 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은 어디에서 온 접두사일까? 모든 접두사가 뜻을 가지고 있는 다른 품사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은 어느 형용사의 관형형일 가능성이 높다. 즉 형용사 ‘다’의 어간 ‘’에 관형형 어미 ‘-ㄴ’이 붙은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맹물’의 ‘맹’에 해당하는 뜻을 가진 ‘다’라는 형용사는 찾을 수가 없어서,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떤 어원 관련 서적에는 ‘’이 ‘다’의 ‘’에서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는 ‘믯믯다’를 거쳐 오늘날 ‘밋밋하다’로 변화한 단어다. ‘생김새가 미끈하게 곧고 길다’란 뜻인데, ‘맹물’의 ‘맹’과는 그 뜻에 공통성이 없어서 그 연관성을 찾기가 어렵고, 또 ‘다’의 ‘’이 ‘’으로 변화한 이유도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데 ‘믈’의 ‘-’의 뜻에 해당하는 동사나 형용사인 ‘다’는 찾지 못하지만, ‘믜다’란 동사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믜다’는 ‘빠지다, 아무것도 없다’란 뜻을 가진 동사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예들이 보인다.
或 머리 믠 居士ㅣ라 며 <1569선가귀감언해,52a>
禿 믤 독 <1576신증유합(초간본)下:55a>
엇지 일됴(一朝)의 나롯 믠 환(宦者)를 논죄(論罪)미 이 화를 만나 쳔금 귀톄의 별을 바드 <17xx완월회맹연권7,14b>
南京鴉靑 빗체 비단과 蔥白 빗체 믠 通袖滕欄 비단이 잇냐 <1677박통사언해中:36b>
모두 ‘아무것도 없는’의 뜻을 가지고 쓰이었다. ‘머리 믠’은 ‘머리털이 없는’, 즉 ‘대머리의’란 뜻이고, ‘나롯 믠 환’는 ‘나룻 없는 한자(宦者)’, 즉 ‘턱수염이 없는 내시’를 뜻한다. 그런데 ‘믜다’의 관형형인 ‘믠’은 관형어처럼 쓰이었으나 차츰 접두사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사용되어서, ‘믠머리(대머리), 믠비단(무늬가 없는 비단), 믠소(속에 아무것도 없는 떡, 소도(素饀)), 믠산(나무가 없는 산), 믠(아무것도 쓸모없는 땅, 공지(空地)가 아니라, 창지(廠地)임), 믠동이(빈 동이), 믠사(무늬가 없는 천)’ 등으로 쓰이었다.
[믠나귀]
너 부인이 담이 가장 크다. 엇디 감히 우리 압셔 강인이라 지저 마치 즁려 믠 나귀라 니 뇨 <17XX후수호뎐,30>
[믠]
廠地 믠 空地 뷘 <1779한청문감1:35a>
[믠동이]
편의셔는 삼십삼쳔 바로 쳣다 믠동이 드리소. <1864남원고사,6b>
[믠머리]
禿子 믠머리, 光頭 믠머리 <1690역어유해上:29a>
가온 퍼지게 야 죵굽 언저 옷칠야 믠 머리의 언고 네 곳의 을 야 의 워시니 <17xx국조고사,41a>
믠 머리(禿子) <18XX화어유초,9a>
[믠비단]
뎍 구읫나기 믠 비단 자과 석 자 반 제믈엣 깁이야 무리 플긔 업시 다마 돌호로 미론 깁이니 <1677박통사언해上:43a>
[믠사]
장 모시뵈 젹삼에 우에 슈 노흔 흰 믠사 더그레예 야토로사 딕녕이오. <1670노걸대언해下:45b>
[믠산]
禿山 믠산 <1790몽어유해補:3a>
[믠소]
素饀 믠소 <1690역어유해上:51b>
접두사 ‘-’은 ‘믠-’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과 ‘믠’은 언듯 보기에 모음조화에 의한 어휘의 분화처럼 보인다(예컨대 살-설, 머리-마리, 남다-넘다 등). 그래서 ‘’과 ‘믠’을 그 연원이 동일할 것으로 생각한다. ‘’과 ‘믠’은 그 의미상으로도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믠’은 오늘날 접두사 ‘민-’으로 변화하여 ‘민머리, 민둥산, 민소매’ 등에 쓰이고 있다.
‘믈’이 ‘믈’이나 ‘물’로 변화한 시기는 17세기다.
이날 그 기울을 물의 몬져 치 쥭 쑤어 더러 사흘만의 새배 그 술을 바타 마 지 아니케 느기 여 <1670음식디미방,2b>
겁질재 씨어 물의 마 버러진 재 그 물조차 드리니라. <1670음식디미방,2b>
쳔어 물의 이 달혀 지령 고 슌 녀허 소솜 혀 초쳐 드리라. <1670음식디미방,13b>
소음과 돗츠로 이 덥고 로 물 一鍋로 燒酒 二斤을 녀허 白布 두 조각을 달허 시신이 부드럽기 기려 <1792증수무원록언해1:48b>
이 람들라 그리 마라 풍편의 얼 드니 어 단 말이 이시니 이 람 괄시 마소 그도 바히 물은 아니기로 셰폭락에 동러진 말니 과히 괄시 마쇼. <1864남원고사,22a>
셰폭락의 하 물은 아니로다. <1864남원고사,28b>
우리 인사 시다 이 아마 량반이지 올아 싸락이 밥을 먹고 자랏다드구 가만두게 그도 물은 안일셰 이 모양으로 횡셜슈셜을 며 김원의 팔을 잔 붓들고 트집을 는지라. <1912치악산(하),116>
‘믈’이 ‘물’이 되는 것은 원순모음화 현상이지만, ‘’이 ‘’이 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믈’이 ‘물’로 변화한 이유를 ‘믈’의 ‘ㅁ’ 때문에 ‘’의 ‘ㄴ’이 ‘ㅇ’으로 변화하는 변자음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으나, ‘몸, 발, 밥’ 등과 같은 파생어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과 연결된 다른 단어 중에서 뒤에 ‘ㅁ’이 오는 ‘몸’은 ‘맹몸’이 되지 않았으며, ‘발’이나 ‘밥’도 역시 ‘맹발’이나 ‘맹밥’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의 변자음화는 어휘별로 적용되는 규칙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원래 변자음화는 발음은 변화되어도 형태소가 지닌 의미를 의식하여서 표기상으로는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 ‘맹’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예가 있다. 그것은 ‘맹탕’이다. ‘맹탕’은 ‘맹- + 탕(湯)’으로 분석된다. ‘맹탕’은 예문이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지 않아서 ‘탕’으로부터 변화한 것이라고 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탕’의 ‘’이 ‘믈’의 ‘’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탕’에서 ‘맹탕’으로 변화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탕’은 19세기 말에 등장한다.
탕 孟蕩 탕으로 孟蕩 <1880한불자전,229>
탕, 탕으로 <1897한영자전,314>
한불자전에 ‘맹탕’의 한자를 ‘맹탕(孟蕩)’으로 한 것은 잘못이다. 이 ‘물’과 ‘탕’은 20세기에 와서 동일한 음성형인 ‘맹물’과 ‘맹탕’으로 표기되어 등장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맹물]
술을 조하하니 그랫든지, 저녁을 안이 먹은 줄 알앗스나 밥가 지나서 그랫든지, 무주도 안이요 맹물도 안인 들큰하고 이상스러운 약주를 내노키 문에, 그럭저럭 하다가 밤이 이슥하야 집에 돌아왓다.<1923죽음과그림자(염상섭),153>
맹물로나마 양치를 하고 얼굴을 훨훨 씻고, 다리와 발도 씻었다. <1949소년은자란다(채만식),95>
[맹탕]
다만 모든 이런 吳의 저속한 큰 소리가 맹탕 그짓말 같기도 하였으나 또 아니 부러워 할려야 아니 부러워할 수 없는 형언 안되는 것이 확실히 있는 것도 같았다. <1936지주회시(이상),84>
관골이 튀어나오고 뒤통수가 두터운 게 맹탕 천한 골상은 아닙데다.<1973무차원근처,81>
그렇다고 너가 설령 맹탕으로 논다고 캐도 내가 며느리 밥 굶기지야 않을 테니깐. <1983불의제전(김원일),188>
아하, 그 사람 그런 얘기까지 써보냈군요. 맹탕이 아니라 빈탕입니다. 제일 흔한 맥주거든요. <1985별보다멀리(윤후명),291>
그게 아니고, 언지 우리가 이런디서 술 헌 적 있습디여? 항시 꾀죄죄한 맹탕가리였으니까 그랬지. <1993그집에는술이있다(김미곤),118>
‘맹물’은 원래 ‘아무것도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이란 뜻을 가진 접두사 ‘-’에 ‘믈(水)’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그런데 ‘믈’의 ‘믈’은 원순모음화가 되어 ‘물’이 되었고, ‘’은 ‘믈’의 ‘ㅁ’의 동화를 받아 ‘-’으로 변화하여 ‘물’로 변화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맹물’이 된 것이다. 같은 변화형으로 ‘맹탕’이 있다. 접두사인 ‘-’은 동사 ‘믜다’의 관형형 ‘믠’과 동일한 연원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민소매, 민둥산’의 ‘민’과 ‘맹물, 맹탕’의 ‘맹’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아무것도 없는’이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