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데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다?
어떤 이들은 강력한 거부감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오래 전부터 컴퓨터를 통해 스토리 체계화, 아이디어 수집, 캐릭터 구체화 등을 저작 도구의 힘에 기대어 정교하게 발전시켜왔다.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도구지만, 수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감정의 공통분모를 확인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대중 대상 창작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스토리텔링 진화론>
(이인화 지음, 해냄 펴냄) | 한국에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
2010년부터 엔시소프트문화재단과 이화여자대학교 디지털스토리텔링 연구소가 3년간 공동 개발한 소프트웨어 '스토리헬퍼'는 2만 4000여 종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검토하여 대표작 1406편을 선정한 뒤 이를 11만 6000여 개의 테이터로 분할하여 데이터베이스로 만든 서사 창작 지원 도구다. 이 데이터베이스를 205개의 이야기 모티프와 작품별 36개의 에피소드 유형으로 다시 정리하여 작가들이 자신이 구상하는 스토리에 따라 자유롭게 데이터를 대조, 검색,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토리텔링 진화론>(해냄 펴냄)은 이 '스토리헬퍼' 개발에 참여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이자 소설가인 이인화가, 스토리헬퍼의 이론적 배경과 오랜 탐구 과정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기존의 서사학 역사에 대한 개론서이자, 21세기의 스토리텔링이 새로운 매체환경에서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독자(혹은 참여자들)와 상호작용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 '스토리헬퍼' 등의 서사 창작 도구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명쾌한 조언도 곁들인다.
작가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꽤 많은 수의 미래의 작가들이 창작 작업을 매우 실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 책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엮어보았다.(언) 아래는 이인화 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이자 소설가 이인화. 프레시안 : 스토리텔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이인화 :
이십 몇 년 전 평론으로 시작해서 소설까지 쓰게 됐다. 평론가로서 비평하기 위해 읽는 소설과 내가 직접 쓰려고 하는 소설 사이에 엄청난 거리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평론하면서 공부한 이론으로는 소설을 쓸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르구나, 되게 어렵다, 이 차이를 가르쳐주는 책이 있으면 읽고 싶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찾아봤다. 스토리텔링에 대한 책이 많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다 타고나거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식의 결론이었다. 답답했다. 첫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세계사 펴냄)와 두 번째 소설 <영원한 제국>(세계사 펴냄)은,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썼다. 스스로도 내 방법이 서툴고, 굉장히 문제가 많은 창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그 무렵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 '창작교수'로 부임하게 됐다.
스토리텔링에 대해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게 무척 곤란하고 사기 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박사 논문을 완성했는데, 한국현대소설 창작론 연구를 주제로 했다. 나름대로 실증적 문헌들을 찾아 읽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논문을 쓰고 나니 도저히 이것만으론 정리된 방법론을 제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영원한 제국>(이인화 지음, 세계사 펴냄) 그래서 공학으로 눈을 돌렸다. 외국에는 스토리를 써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데 대체 어떻게 작동하는 걸까. 그게 2002년이었다. 십 몇 년 동안 그쪽을 연구해보니 해외 프로그램들도 단점이 많았다. 이를테면 미국의 대표적 저작도구 '드라마티카 프로(Dramatica Pro)'는 사용법 자체가 어려운데 크게 개선이 안 되니까 Q&A에 매번 똑같은 질문만 올라온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직접 만들어보자고 결심했고, 12년 동안 연구한 결실이 '스토리헬퍼'다. 써보신 분들은 훨씬 편리하고 쉽다고 좋아하시더라. 프레시안 : 문학 전공자가 공학 분야까지 넘나드는 게 어렵진 않았나. 이인화 : 사실 처음엔 나 역시 못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자료를 읽다보니, 다른 건 몰라도 스토리텔링에 관한 공학 논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더라. 기본 틀거리는 프랑스 구조주의,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학에서 왔으니까, 그런 기본 레퍼런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으니 공학 논문도 잘 읽혔다.
기본적으로 인문대 출신이 컴퓨터는 잘 몰라도 논문을 꼼꼼하게 읽는 건 자신 있으니까(웃음), 관련 논문 100편 읽으면서 대조해보고,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직접 구동해보면서 이건 어디까지 성취했고 실패했는지 조금씩 판단이 되기 시작했다. 몇 년 지나니까 직접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프레시안 : 국문과에서 디지털미디어학부 대학원로 적을 옮긴 건 언제였나. 이인화 : 그것도 2002년이다. 국문과 학과장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정보통신부가 IT융합인재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1년 간 7억 5000만 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때 이화여대 미대 장동훈 교수가 주축이 되어 이과를 창설했는데, 얼마 지나고 나서 삼성전자에 합류하셨다. 과를 만들긴 했는데 운영이 안 되는 상황에서,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대한 구상을 실현해 볼 수 있겠다는 판단에 내가 맡게 되었다. 계열은 공대 계열인데, 공학과 디자인, 인문학 전공자들이 모여 있다. 2002년부터 즉시 이 연구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원생들 인건비를 충분히 지급할 수 있는 과제부터 하다 보니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을 기술 개발 과제에 신청해도 계속 탈락했고, 2010년에서야 운 좋게 붙어서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프레시안 : 스토리텔링 연구를 진행할 때 게임도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언제부터 게임을 즐겼나. 이인화 : 마흔 넘을 때까지 게임을 단 한 번도 안 해봤다. 디지털미디어학부로 넘어오면서 처음 시작했다. 학생들을 취직시켜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쪽에선 게임업계가 가장 크니까. 그런데 학생들을 그쪽으로 보내려면 나도 이 업계를 좀 알아야겠다 싶어서 게임을 배웠다. 그런데…너무 재밌더라. 지금은 거의 본업이 됐다. 게임을 몰랐다면 '스토리헬퍼'를 만들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 같다. 게임이야말로 스토리를 단위별로 분할해서 생각하는 분석적 스토리텔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게임을 이해하면서 '스토리헬퍼'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그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영화에도 분할 개념이 있지만 게임만큼 확실한 체계가 있진 않다. 직접 게임의 스토리를 창작하면서 공학적 조립 원리를 조금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프레시안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롤플레잉 게임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5, 6년 전에서야 게임 스토리 창작 분야가 있다는 걸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 이인화 : 롤플레잉 게임, 어드벤처 게임을 중심으로 배경 스토리와 사건이 진행되는 선형적 스토리가 있다. 스토리 안에 여러 분기점이 있고 그 안에서 선택을 하도록 구성한 게 콘솔 게임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의 온라인 게임이 나왔다. 게임 스토리 작가는 1980년대부터 존재했지만, 한국에선 콘솔 게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토리 부분이 좀 약했다. 90년대 말 <창세기전>이라는 독보적인 게임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한국에서도 훌륭한 스토리를 갖춘 게임들이 속속들이 나왔다. 그리고 90년대 말 일본에서 걸작 <파이널 판타지 7>이 출시되었다. 이를테면 영화계에서의 <전함 포템킨><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 게임에서 등장한 것이다. 다들 저 정도 수준까지 스토리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분발하기 시작했다. 프레시안 : 소설을 쓸 때와 게임 스토리를 쓸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이인화 : 스토리를 보는 눈이 굉장히 다르다. 소설을 쓸 땐 작가가 아무리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라 해도,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할 것인가, 실험적으로 재창조할 것인가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리얼리티를 작품이 담아내야만 한다. 게임은 그렇지 않았다. 알고리즘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 적합한 스토리 외양을 입히는 작업이다.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창작 유희, 즐거운 놀이에 가깝다. 게다가 혼자 쓰는 게 아니라 정말 많은 이들이 참여한다. 작가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장 크게 의식하는 건 아무래도 소설 같은 정통 장르다. 영화만 해도 작가로서 콘텐츠를 전부 만들어간다는 만족감이 좀 떨어지고, 게임은 훨씬 더하지. 게임 전체에서 스토리 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10퍼센트 정도니까.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삶이 힘겨운 시대에, 게임 안에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용자들(게이머)의 반응을 그때그때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에 바치는 노동, 그러니까 게임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함께 즐거워하는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 소설만 쓸 땐 도저히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게임 <길드워>의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을 때 그런 순간이 있었다. 알레시아라는 선생이 죽었다는 설정이 중간에 나온다. 유저들이 게임하던 도중 선생의 유골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튜터리얼 때 그가 내 스승이었다'면서 진심으로 슬퍼하더라.
내가 쓴 스토리에 유저들이 그토록 감정이입하며 슬퍼하는 걸 나 역시 게이머 중 한 사람으로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것, 내가 쓴 스토리에 대한 반응을 독자들 사이에서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건 소설에선 쉽지 않은 부분이다. 벤야민이 그런 말을 했다. 전통적인 계몽에서 출발한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가 쇠락해 갈 때 사람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어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주인공 구스타프가 그림 <사과를 든 소년> 속 소년 얼굴이 나와 닮지 않았냐고 할 때, 그건 유럽 의식의 위기의 순간에 다다이스트가 취한 태도다. 회화에 콜라주를 첨가함으로써 유럽의 죽음을 돌파할 새로운 비전을 찾은 것이다. 그건 복고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 ▲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대신 벤야민은 1920년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를 본 다음, 사진과 영화 같은 뉴미디어가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예술이라고 격찬했다. <역사철학테제>라든가 <사진의 작은 역사>,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등에서 그가 썼던 얘기를 우리는 게임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프레시안 : 잠깐 질문을 돌려보자면,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기 전 창작론 관련 도서들을 섭렵했다고 했는데, 스티븐 킹이나 오슨 스콧 카드, 오쓰카 에이지 등 실제 작가들이 쓴 창작론 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인화 :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김진준 옮김, 김영사 펴냄)는 매우 유용한 책이다. 본인이 어떻게 소설을 썼는지를 정직하게 얘기했고, 작가가 창작에 대해 1인칭으로 얘기할 땐, 젊은 시절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라는 걸 솔직하게 하나하나 밝혀주는 게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오쓰카 에이지의 <스토리 메이커>(선정우 옮김, 북바이북 펴냄)는 개인적으로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밀하게 얘기할 수 없다면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지시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그 책을 읽는 사람이 직접 판단하도록 레퍼런스를 보여주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 <스토리 메이커>(오쓰카 에이지 지음, 선정우 옮김, 북바이북 펴냄). 그래도 작가들이 쓴 창작 방법론에는 다 일말의 진실이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만진 코끼리의 촉감에 대한 그의 말 자체는 맞다. 그걸 전부 이어 붙여봐야 코끼리가 나타날 수 있을 테니, 부분적으로 참조할 가치는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스토리텔링 진화론>을 보면 스토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자기 쇄신하는 지금 시대는, "종교 문화 시대, 철학 문화 시대를 지나서 출현한 '문학 문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는 문장이 나온다. 어떤 의미인지 부연해줄 수 있을까. 이인화 : 리처드 로티의 설명에 의하면, 종교 문화는 동일한 세계관과 역사를 공유한다. 에덴 동산이라는 낙원, 원죄, 타락, 구원, 천국으로 향하는 보편사가 있었고, 그 보편사를 따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공통의 세계관이 있었다. 문제들은 다양하지만 답은 하나일 수 있는 세계가 종교 문화의 시대다. 종교적인 세계상이 붕괴하고 난 뒤 철학 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헤겔이 감각과 오성, 절대이성으로 발전해가는 철학적 보편사를, 마르크스가 원시시대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로 향하는 과정을 또 하나의 보편사로 제시했다. 20세기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하나의 답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표본을 보여주면 각자 자기의 심미적 이성으로 수용하고 판단하여 자신의 삶의 해답을 찾겠다는 입장이 문학 문화의 시대라고 정리할 수 있다. 프레시안 : 하지만 사실, 그 같은 문학 문화의 시대를 긍정적으로만 보기에는, 지금 시대는 스토리가 너무 과잉 아닐까.
특히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자신에 대한 서사화와 보여주기에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창작 작업 자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냉소와 경멸과 체념과 무관심이 더 큰 상황 같다. 이인화 : 종교 문화가 무너지고 철학 문학까지 붕괴된 이후의 시대를 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얘기했다시피, 지금은 '생성(Becoming)'밖에 없다. 예전엔 모두가 보편적으로 존중했던 '존재(Being)'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생성이란 건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힘의 움직임밖에 없다. 허무하지. 삶에 무슨 해답이 있는 건지 알 수 없고. 그런 영겁회귀를 보면서도 허무주의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초인 아닌가. <욥기>의 욥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한탄하는 게 니힐리즘인데, 정말 건강한 생을 살기 위해선 생성을 긍정하고 참아내야 한다. 바글거리는 SNS를 참고 그 위에서 차라투스투라 같은 얘길 할 수 있는 게 문학 문화의 힘이라고 믿는다. 프레시안 : <스토리텔링 진화론>에선 서사학이 본질적인 변화를 겪으며 매체 환경과 창작에도 중요한 변화가 생기는 시기로 1990년을 중요하게 꼽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좀 더 논의 부탁드린다. 이인화 : 근대과학의 모든 것은 실증, 가시적 재현 가능성이다. '당신 주장의 결론, 명제가 지금도 재현 가능한지 보여다오,' 이게 근대과학의 출발이다. 인문학의 경우 그런 재현가능성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게 문헌이다. 그게 인문학의 한계이기도 하고. 문헌까진 갈 수 있는데, 그 문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힐 수가 없다. 이 문헌을 전부 믿을 수가 있을까? 작가들은 다 거짓말한다. 나만 해도 내가 어떻게 썼는지 거짓말했다. 삽질한 거, 내가 재능 없다고 밝혀야 하는 거, 그걸 도저히 밝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기존의 문헌학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1990년 자기공명영상 촬영 기술 MRI가 보급되면서, 작가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문헌 너머, 브레인의 영역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 작품은 소울의 영역이지만, 브레인과 소울 사이에 존재하는 마인드까지는 들여다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관측이 그때 제기된 것이다. 미리 말해두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헬퍼' 같은 프로그램이 작가의 작업을 대체하는 건 절대 아니다. 스토리를 만드는 건 인간의 창의적인 영역이고 인간 지능의 영역이다. 설사 더 발전하더라도 플롯 기계 정도겠지. 오히려 인공지능이 필요한 건 정치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2009). ⓒTwentie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 프레시안 : '스토리헬퍼'가 지원할 수 있는 창작의 최저 수준으로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를 예로 들었다.
<아바타>가 매우 단순한 수준의 이야기인 건 확실하지만, 예를 영화로만 한정지었을 때 오는 한계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영화는 '이미지를 보여주기'라는 요소가 들어가기 때문에,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변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스토리헬퍼'의 데이터베이스가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된 것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질문을 드리고 싶다. 나아가서 이것이 제대로 된 영화 혹은 소설로 설정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라는 전제 너머로, 역시 마지막 순간에는 작가의 재능과 영감이라는 요소가 최후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변별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스토리텔링 진화론>에도 언급되는 "강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의미심장한 디테일"이자 그 하나에서 "출발해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는 그 강렬한 요소 말이다. 이인화 :
물론이다. 작품의 마지막 가치는 디테일에 있다. 말 그대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얼마만큼 정확하고 진실한가, 그건 '스토리헬퍼'나 컴퓨터의 몫이 아니라 작가의 몫이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 <망망>의 경우, 1970년대 밀수꾼들 얘기다. 부산에 내려가서 해운대 포장마차에서 7, 80대 할아버지 네 분한테 해삼하고 멍게 사드리면서 한 다섯 시간 동안 당시 얘기만 들었다.
취재수첩을 두 권 꽉 채워 미친 듯이 필기하고 나면, 문장 하나를 건질 수 있다. 취재를 안 했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쌍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반짝거리는, 밀수꾼들만이 알고 있는 진실한 문장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건 '스토리헬퍼'로 안 되는 작업이다. 소설에선 그게 생명이다. 이건 분명히 해두고 싶다. '스토리헬퍼'는 레퍼런스로 활용하라고 만들었지, 이걸 100퍼센트 따르라고 만든 게 아니다. 무슨 확고한 공식처럼, 여기 나오는 예들처럼 집필하라는 뜻이 아니다. '스토리헬퍼'는 과거 100년 동안 작품성과 대중성 양쪽에서 인정받은 영화들을 1406편 골라 그것들이 어떤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인지를 분석하는 틀이다. 미래에 나올 새로운 영화들은 작가들의 몫이지만, 스토리라인이라는 게 대략적으로라도 틀을 잡고 나면 이후 작업이 편해지니까, 이걸 출발점으로 삼으면 좋지 않겠냐는 그런 의미다. ********** *아래는 <스토리텔링 진화론>에 등장하는, 캐머런 감독이 <아바타>를 구상하면서 '스토리헬퍼'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요약이다. 한 영화감독이 새로운 영화의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다. (…) 이 감독은 새로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정해놓은 것이 거의 없었다. 자신이 구상하는 3D 이미지의 스펙터클을 화면에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특수 효과 구현의 자유도를 허용하는 스토리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을 뿐이다.
'스토리헬퍼' 로그인->아이디에이션(스토리에 보탬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표상들을 떠올리는 확산적 사고와 그 가운데 가장 적합한 선택항을 찾는 수렴적 사고의 반복. 작가는 스토리를 탈고하는 단계에서도 아이디에이션을 클릭해서 한두 문장 정도 새로 첨가하고 싶은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어떤 서사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하게 된다.->클래식 모드, 조합 모드, 랜덤 모드, 프리 모드 가운데 선택. 그리고 장르, 타깃, 인물, 행위 등에 대한 객관식 문항에 답한다.->'시나리오 유사관계 분석 시스템' 작동. ->이 감독이 구상한 영화는 과거 영화 중 <늑대와 춤을>과 87퍼센트, <피아노>와 68퍼센트, <매트릭스2-리로디드>와 66퍼센트 유사한 것으로 드러난다.->이중에서 기존의 사례를 개작할 수 있는 모형 혹은 재사용할 수 있는 모형을 선택.->시놉시스 도출. 프레시안 : 방금 언급한 <망망>의 그 한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해줄 수 있을까. 이인화 : 공항 세관에서 밀수품 중 세 가지는 절대 안 봐준다고, "흰둥이 누렁이 성성이는 절 대 안 봐줘" 이 문장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히로뽕, 금괴, 밍크다. 머릿속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진짜 밀수 세계 용어지. (웃음) 그게 있어야 소설이 된다. 영화와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감독만의 미장센과 대사가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전부라고 말할 순 없다. 스토리가 중요한 게 사실이지만, 스토리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해냄 펴냄) | 프레시안 : 본인이 전작 <지옥설계도>(해냄 펴냄)를 집필할 때 '스토리헬퍼'를 활용했다고 했다. 강화인간과 공생당 파트에 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어떤 식으로 활용했을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이인화 : <지옥설계도>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다. 19번째 소설이었는데, 이제는 전개를 자유자재로 뒤집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그때 그 지속적인 '뒤집음'을 위해 '스토리헬퍼'를 활용했다.
굳이 판타지적 설정이 나오는 강화인간 파트뿐 아니라, 16개 모든 챕터를 '스토리헬퍼'에 넣고 돌려보며, 내가 생각한 스토리가 어떤 작품과 몇 퍼센트 비슷하다고 나오면, 독자들도 이런 걸 예상하겠지 하면서 그 클리셰를 피했다. 작가들이 스토리를 쓰는 데에는 왕도가 없다. 황석영 작가나 김훈 작가도 초고를 보면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한다.(웃음) 필립 로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무조건 A4 100장을 먼저 쓴다고 했다. 거기서 첫 장면이 비로소 나온다. 나머지 99장을 다 버리고, 그 남은 한 페이지, 정말 생명력 있는 몇 줄만 남기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했다. 그게 글쓰기의 왕도다. 아네트 카밀로프-스미스의 '표상 재기술' 이론에 따르면, 계속 글을 쓰다보면 독창성이 우연히, 사고처럼 튀어나온다고 한다. 100장을 쓰면, 나머지 99장은 남들도 다 생각할 수 있는 클리셰고, 거기서 딱 한 장을 건질 수 있는 것이다. 프레시안 : 지금 집필 중인 <망망>의 경우는 어떨까. <스토리텔링 진화론>에 보면 '재소자 서예전에 출품하려고 붓글씨를 쓰는 죄수'라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는데. 그리고 이 작품도 '스토리헬퍼'의 도움을 받는 중이라면 어떤 식인지 소개해 달라. 이인화 : <망망>의 그 이미지는 취재에서 나왔다. 실제로 내가 모델로 삼은 죄수가 서예전 국선에 입선한다.(웃음)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느낀 게 있다면, 독자를 속일 수 있다는 생각이 틀렸다는 점이다. 독자는 진짜 똑똑하다. 절대 속지 않는다. 허구를 쓰니까 말이 안 되는 걸 더 멋있게, 말이 되게 쓰면 속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나만 해도 소설 쓸 때보다 읽을 때 훨씬 똑똑해진다. (웃음)
현실에서 나온 진실한 한 문장, 진짜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피와 땀내가 어린 그 한 문장에서 출발하면, 그건 흔들리지 않는다. <망망>의 모델도, 한 권짜리 분량의 재판 기록을 다 읽고 나서 국전에 입선했다는 딱 하나를 뽑아냈다. 미묘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 하나의 디테일이었다. 8년 동안 감옥에 있어도, 사형선고를 두 번 받아도 붓글씨를 연습하는 사람의 이미지 말이다. ▲ <한국의 나쁜 부자들>(안재만 지음, 참돌 펴냄). 이 이야기는 '스토리헬퍼'로 돌릴 것도 없이, 실화 자체가 전형적인 누아르다. 사건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모두에게 너무 익숙한 한국판 <대부>처럼 될 게 뻔해서, 나머지는 다 버렸다. 38년 후의 시점에서 조금씩 회상하는 과정으로 그려질 것이다. <한국의 나쁜 부자들>(안재만 지음, 참돌 펴냄)이라는 책이 있는데 부자들의 99퍼센트는 나쁜 놈들이라고 한다. 유병언 같은 사람은 세월호 참사 때문에 드러났지만, 드러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상처받은 사람들, 패배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의미를 구원해내고 살아가는가, 그런 얘기를 하고 싶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이를테면 당신이 <영원한 제국>을 쓸 때, 정조 붐을 불러온 첫 번째 주자로서 정조 이야기가 가지는 폭발력에 대해 어떤 생각을 단초로 시작했을지 궁금하다. 이인화 : 정조 얘기는 아주 어릴 때부터 들었고, 내 속에 묵은 게 십 몇 년 된다. 무의식 속에 그 정조 얘기에 대한 표상 재기술이 되풀이됐던 것 같다. 이걸 써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물리적으로는 첫 장면을 쓰기 시작했지만, 필립 로스가 말한 '100장을 쓴 상태'였던 거다. 100장을 먼저 쓰고 나면, 거기서 정말 건질 만한 딱 한 장이 나온다고, 거기서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다고 그랬다. 프레시안 : '스토리헬퍼'가 장르소설 쪽에는 꽤 활용도가 높지 않을까 예상되는데. 이인화 : 움베르토 에코는 "한 나라의 문화적 역량은 추리소설을 얼마나 문학적으로 완성시키느냐에 달려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제가 발생하고, 확대되고, 해결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추적해가는 논리적 프로세스를 밟으면서 디테일의 예술을 첨가하며 인간의 진실한 형상을 담게 된다면, 그게 최고의 문학이다. 그런 점에서 현 단계에서 가장 문학적 역량이 뛰어난 나라는 미국이다. 사실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추리소설이고, 어떻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추리소설 아닌가. 이런 차이는 있겠지. 장르문학은 스토리의 논리 자체를 따라가고, 순문학은 스토리가 끝난 뒤의 여운을 따라간다고 할 순 있겠다. 스토리가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가 순문학의 의미라면, 장르문학은 스토리 자체가 중요한 거다. '스토리헬퍼'가 장르소설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납득 가능하고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도움을 될 것이라 생각한다. 프레시안 : 예전에 CJ엔터테인먼트에서 시나리오 작업하는 이로부터, 특히 상업 장르영화의 경우 몇 분 경과했을 때 이런 사건이 나와야 하고, 어떤 식의 감정이 고조되어야 하고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해서 체크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인화 : CJ엔터테인먼트에서 쓰는 게 '스토리헬퍼'다. (웃음) 사실 이 프로그램을 만들 때 영화 쪽에서 큰 도움을 받은 게, 말하자면 '<디 워> 쇼크' 덕분이다.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제작비를 저렇게 많이 들였는데 스토리가 저렇게밖에 못 나오다니, 문화계 종사자들 모두 충격 받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디 워> 때문에 스토리텔링 연구비가 책정된 건지도 모른다.
그 전까진 개발을 도와달라고 졸라도 번번이 무산됐는데, <디 워> 이후 비로소 사람들이 스토리텔링 제작 도구의 필요성을 느낀 게 아닌가 싶다. '스토리헬퍼'가 독창성이라든가 작품의 완결성을 보장해주진 못하지만,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최저선, 다시 말해 '말이 안 되는' 걸 막아주는 최후의 장치가 될 순 있다. 프레시안 : '스토리헬퍼'라든가 '드라마티카 프로', '스토리 빌더(Story Builder)' 등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에 실제 작가들이 많이 참여하는지도 궁금하다. 또한 기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의 저항감을 떼어놓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이 실제로 이 같은 형식의 창작 보조 도구에 관심을 어느 정도 가지는지의 현황도 소개해줄 수 있을까. 이인화 : 실제 작가들이 참여하는 게 맞다. '드라마틱 프로'의 멜라니 필립스도 그랬고, 나 역시 '스토리헬퍼'를 만드는 과정을 이끌어왔다. 글을 쓸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가장 잘 아는 건 작가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이 있으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하게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선 양날의 칼이다. 순문학 작가라면 내 생각이 예전 사람과 얼마나 비슷한가를 피해가며 써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문학 작가들에게는 '스토리헬퍼'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봐야 한다.
스타일의 예술, 문장의 예술을 추구하다보면 스토리 자체를 뭉개버려야 할 때도 있으니까. 그에 대해선 '스토리헬퍼'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 하지만 영화와 애니메이션 작가, 게임 스토리작가, 장르문학 작가들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