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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본명은 유진 앙리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이며,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보여준 개념적인 표현방법은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888년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얼마간 같이 지낸 뒤 고갱은 차츰 모방적인 작품을 그만두고 색채를 통한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해나갔다. 1891년부터는 남태평양의 타히티와 다른 여러 곳에 살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1871년(23세)
파리의 베르탱 주식중개회사에 들어갔고,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1872년(24세)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자리는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1873년(25세)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에밀(1874), 알린(1877), 클로비(1879), 장 르네(1881) 폴(1883) 5명의 아이가 생겼다. 그는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아로사는 코로, 들라크루아, 밀레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의 영향이었다. 그는 미술품 수집뿐만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주식중개회사 동료이며, 함께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에밀 쉬프네케르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갱은 곧 화실에 다니며 모델습작도 하고 미술지도도 받았다.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5(27세)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을 시작하면서 소묘와 유화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The Seine in Paris between the Pont d'lena and the Pont de Grenelle.
1875. Oil on canvas
The Seine at the Pont d'Iena, Snowy Weather. 1875. Oil on canvas
1876년(28세)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작품 〈비로플레 풍경, Landscape at Viroflay〉이 해마다 공식적으로 열리는 전시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그는 인상파 그림에 관심을 갖고 1875~76년에는 마네ㆍ세잔ㆍ피사로ㆍ모네ㆍ용킨트 등 인상파 화풍의 그림을 수집했다.
Apple-Trees in Blossom. 1879. oil
Effect of Snow. 1879. Oil on canvas
1880년(32세)
휴일을 이용해 피사로,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초기에는 재주가 서투르고 단조로운 색채를 주로 썼지만 곧 눈에 띄게 발전해갔다. 그는 제5회 인상파전에 출품했으며, 1881년과 1882년에도 계속 출품했다.
Portrait of Gauguin's Daughter Aline.
1879-80. Watercolor on paper
나부습작 (Study of a Nude) 1880. Oil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쏙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로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1882년(34세)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위해 이를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Aube the Sculptor and His Son. 1882. Pastel
At the Window (A la fenetre).1882. Oil
1883년(35세)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주식거래인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Mandolina and Flowers. 1883. Oil
1884년(36세)
고갱의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으나 그곳에 있는 처가에서도 그들을 박대하여 결국 그의 결혼생활은 깨지고 말았다.
야회복을 입은 고갱 부인의 초상 1884년, 유채
고갱은 1873년 11월, 23살의 덴마크 여성 메트와 결혼 했다. 결혼 전 어느 편지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를 덴마크로부터 뺏어 오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고 했지만, 결혼 후 북구(北區)의 프로테스 탄트풍(風)의 엄격한 윤리관에 젖어 있는 그녀와 고갱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고갱 이외의 다른 남자였다면 훌륭한 부인으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갱이 고갱 자신으로 돌아 감에 따라 그녀도 자신을 드러내어 자제하지를 못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베르탕 상점을 그만둔 다음 해에 르왕에서 그린 것인데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그런 기질(氣質)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에서 이런 투시력(透視力)은 고갱 시각(視覺)의 독특한 성질의 하나일 것이다.
Bouquet. 1884. Oil on canvas
1885년(37세)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그뒤로 가난과 고난 속에 살았으며, 건강도 악화되었다. 결국 사회에서 버림받고 명성을 얻지도 못한 그는 유럽과 문명을 경멸하게 되었다.
Cattle Drinking. 1885. Oil on canvas
Still Life with Mandolin. 1885. Oil
캔버스 앞의 자화상
고갱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전적으로 화업(畵業)에 투신함으로써 생활의 형편은 절망적이었다. 1894년 11월 그는 가족과 함께 부인 메트의 고장인 코펜하겐으로 옮겼으나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코펜하겐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메트가 불어 레슨(佛語講習)을 하기 위하여 거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붕밑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틈틈히 제작에 몰두했다. 그가 회화라는 것은 외계(外界)의 재현(再現)이 아니라 내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슈프네케르란 사람에게 써 보낸 것은 1885년 5월의 일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정신과 회화관(繪畵觀)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둡게 침잠된 색조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있다. 고호나 고갱이 함께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대상(對象)의 응시(凝視)가 자기 응시(自己凝視)에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그들 공통의 지향에 원인한 것이었다.
1886년(38세)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이사를 하게된 동기는 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그림에서 색채의 표현가능성을 깨닫고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색채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고갱은 2가지 결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파리에서 반 고흐와 만난 것이고(1886), 다른 하나는 마르티니크로 여행한 것이다(1887). 반 고흐는 그와 그림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정열적인 인물이었고, 화가공동체를 만들어 그 생각을 실현하려는 데 고갱을 끌어들이려 했다.
Study for the Bathers.
1886. Black chalk and pastel
The Four Breton Girls 1886. Oil
1886년 제8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19점의 작품은 기대했던 만큼의 평판을 얻지 못하고 깨어진 하모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그 시기의 구축성(構築性)이 강한 구도법(構圖法)과 그의 평면 처리법(平面處理法)이 호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그의 길은 브르타뉴의 생활에서 하나의 달성을 보인다. 화면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브르타뉴 농부(農婦)의 얼굴을 옆으로 그리는 수법이나, 빨강이나 초록의 사용법 등은 두 번째 브르타뉴 시대의 작품을 예견케하는 점이고, 전경의 인물이나 사물을 크게 그리고 후경(後景)에 여러가지 정경을 그려 넣는 수법으로 장식적인 화면에 원근법(遠近法)을 도입한 것은 고갱이 그의 타히티의 작품에 있어 자주 쓰던 수법으로, 그 싹이 여기에서 자란 것으로 느껴진다. 피사로부터 받은 점묘적(点描的)인 터치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평면적 의지가 화면 속에 교차되어 있다.
Breton Shepherdess. 1886. Oil
Washerwomen at Pont-Aven. 1886. Oil
1887년(39세)
처음으로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에 갔다가 이듬해 파리로 왔으며, 이어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계기로 비극적인 작별로 끝났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퐁타방에서 알게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두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陶器) 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At the Pond. 1887. Oil on canvas
Huts under Trees. 1887. Oil on canvas
Palm Trees on Martinique. 1887. Oil
Head of a Negress. 1887. Pastel
열대의 식물
이 작품은 1887년 뜨거운 태양을 쫓아서 마르티니크섬에 얼마간 체재하면서 그렸다. '원주민의 남녀는 서인도의 노래를 부르면서 종일 맷돌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그칠줄 모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단조롭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이만큼 변화가 풍부한 곳은 없을 것이다. 자연은 색이 선명하고 기후는 온난하며 때맞추어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는 이섬의 환경에 만족스러웠으나 여기서도 가난과 병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은 그가 초기에 자주 나타내던 전후경(前後景)의 대조적 구도법을 이섬의 자연에 의하여 장식적으로 바꾸어나간 흔적을 느끼게 한다. 이 섬의 강한 태양은 프랑스의 힘없는 태양빛 아래의 경우처럼 인상파적인 분할적 수법(分割的 手法)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섬의 체험은 후일 그를 타히티로 가게 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88년(40세)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1888년 아를르에서 지낸 몇 주일 뒤에 비참한 결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마르티니크 여행에서는 열대지방 풍경에서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원시공동체의 매력을 경험했다. 고갱은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려 했으며, 그결과 인상파에 반발하게 되었다. 1888년부터 그가 가졌던 예술에 대한 주된 태도는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Madame Alexandre Kohler. 1887/88. Oil
Still Life with Three Puppies.
1888. Oil on wood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
1888. Oil on canvas
Breton Girls Dancing. 1888. Pastel
Madeleine Bernard. 1888. Oil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Oil on canvas
Night Cafe at Arles. 1888. Oil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1888. Oil
Women from Arles in the Public Garden, the Mistral. 1888. Oil on canvas
Hay-Making in Brittany. 1888. Oil
Bouquet of Flowers with a Window Open to the Sea (Reverse of Hay-Making in Brittany).
1888. Oil on canvas
The Alyscamps. 1888. Oil on canvas
Harvesting of Grapes at Arles (Miseres humaines). 1888. Oil on canvas
Fruits. 1888. Oil on canvas
목욕하는 브르타뉴의 아이들
'나는 막 나체화(裸體畵) 몇 개를 끝맺었다. 이것들의 됨됨이에는 자네도 만족하여 줄줄믿는다. 이것은 드가풍의 하찮은 것은 아니란다. 가장 최근의 것은 개울가에서 두 아이들이 엉켜 있는 것을 그렸는데 이것은 페루의 야만인이 그린 실로 일본적(日本的)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888년7월 8일 슈프네 케르에게 보낸 편지).
이 작품도 고갱이 말하고 있는 나체의 연작 중의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부인 메트가 싫어했기 때문에 앞에 소개한 <裸婦習作> 외에 나체화가 없었으나 브르타뉴의 자연 속에서 그의 내면에 마르티니그나 페루의 추억에 잠겨 그의 정신적인 이미지에 순도를 더해갔다. 샛노란 풀잎의 색과 배경의 빨간색에서 그의 내면의 반영을 느낄 수있다. 브르타뉴에서 차츰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벗어나 인상파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여 가게 된다.
바이루 마치
바이루마치란 원래 마오리 신화에 나오는 종족의 창시자 타아로아의 아들 오로의 아내이다. 오로는 인간의 여자를 아내로 맞고 싶어서 어떤 호수의 근처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바이루 마치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밝은 빨강의 배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육체를 비스듬히 기대고, 그 뒤에 옥좌(玉座)와 같은 의자, 두 사람의 시녀, 도마뱀을 밟고 선 노랑새가 함께 엑조틱한 화면을 이루고 있다. '노아 노아'의 초고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 그녀는 키가 큰 여자로 타는 듯한 태양빛이 그 황금색의 어깨 위에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젊은 아가씨는 바이루마치라고 불려지고 있었다.'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에게서 이러한 신화를 투시한 것일 게다.
미개의 시
타히티는 사령(死靈)이 지켜주고, 가지각색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이 생기고, 모든 것에 정령(精靈)이 머무르며, 범신론적(汎神論的) 신화(神話)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고갱은 그러한 신화나 신앙을 주제로 하는 여러 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고갱이 그린 마오리족의 그림들에는 자바에서 본 사원의 불상(佛像)에서 시사를 받아 원시의 신성(神性)을 불상의 포즈에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여인의 포즈는, 예의 자바불상, 바로 그것이고, 가슴 쪽의 형상은 불상 조각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아주 정적인 여인의 얼굴에서는 많은 감정을 아로새긴 것같이, 무표정 속에서 깊은 염원(念願)과 기도(祈禱)를 가진 표정은 독특한 것이다. 왼쪽 아래 원숭이처럼 보이는 기묘한 것은 타히티의 사령(死靈)이나 정령 (精靈)으로서 마오리족의 신앙의 대상으로 그려졌는데, 재미 있게 느껴진다.
해변의 두 소녀
두 소녀를 전면에 크게 그리면서 먼 배경(背景)을 의도적으로 차단, 아주 평면적인 표현법을 썼다. 커다란 색면(色面), 선명한 분할(分割)등, 어떻게 보면 일본의 우끼요 에(浮世畵)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고호와 함께 이 우끼요 에를 연구했고, 인상파 화가들인 마네, 모네 등도 색채와 형태의 표현 기법에 흥미를 나타냈었다.
고갱은 1889년 10월부터 르 푸르뒤라는 어촌(漁村)에 머물면서 현지 소녀를 모델로 한 <해변의 두 소녀> 외에 <황색의 그리스도> 등 대표작 수점을 그렸는데, 복잡한 가정 문제, 인상파 탈퇴, 고호와 비극적인 공동 생활 등을 치른 후여서 그림과 인간에 대한 그의 가장 심각한 번민을 이 소녀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타히티행은 이와같은 번민과 파리 만국박람회 때 본 자바 미술에 대한 관심이 합쳐저 2년 후에 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