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루카1,39-45)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할 때 천사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 아이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말합니다.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이레” 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의미입니다(창세22장).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에게 물렸어도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에서 멀어집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갑니다. ‘서둘러 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마리아에게 신앙은 알고 있는 지식과 마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입니다. 신앙에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이 말씀은 행복하려면 ‘말씀을 품고 살아라’ 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1코린 15,58).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 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믿음에 관한 묵상 "
묵상 하고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에서 멀어집니다.
'신앙은 ㅡ, ㅡ , ㅡ .는 '없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