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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탈출기의 말씀 1,8-14.22
그 무렵
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9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칼을 주신다면>
오늘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범상치 않습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은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주님도 일치와 평화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주님의 본 모습입니까?
주님께서는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고, 갈라서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잘못된 인연은 끊고, 잘못된 관계는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관계와 하느님께 같이 가려 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서로 사랑하여도 잘못된 인연과 관계이기에 칼같이 끊고 갈라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프란치스코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려고 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자기 집 재산을 거덜낼 거라고 생각하였기에 프란치스코를 고소하고 상속권을 뺏으려고 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모두 벗어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자기는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자유롭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고, 오늘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아들이나 딸이 주님과 일치하고 주님을 따르는 데 더 문제입니다.
부부의 인연은 잘도 끊고 부모와는 갈라서도 자식과의 관계는 못 끊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제가 짓궂은 질문을 엄마들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죽어 부활한 뒤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과 지금 내 자식의 엄마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지금 자기 자식의 엄마가 다시 되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자식을 수도원에 봉헌하라고 주님께서 하신다면, 그보다 더 아예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끊으라고 하신다면, 오늘 주님께서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그 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의 칼>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간, 부부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참된 평화를 누리기 위해 거짓 평화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세상에 대한 온갖 집착과 산란한 마음을 단호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두려운 양 떼가 되느니 외로운 늑대가 되련다>
강형욱 훈련사는 TV와 유튜브 방송을 하며 개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냥 행복할까요?
요즘 그의 모습은 조금은 슬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는 훈련이 안 된 강아지들을 좋은 반려견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많은 조언을 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견주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고 호통을 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을 떠나보낸 가족들에게는 위로도 해 줍니다.
한번은 성탄절 선물로 반려견을 잃은 가족들에게 그 반려견과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선물로 위로를 해 주는 방송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의 사연을 들으며 자신이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도 얼마 전 반려견이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자신은 정작 삶에 치여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도 위로 받고 싶었나 봐요….”
‘고독한 훈련사’에서 훈련사 24년 차에 찾아온 슬럼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잘 키우고 있다 못 키우고 있다를 말할 수 있나…. 모르겠어요. 그냥.
아직도 개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세상의 모든 개를 만나고 싶어요.
나도 좀 위로를 받아보고 싶어요. 잘하고 있다고.”
최고가 되면 다 좋을까요?
이렇게 외롭고 고독합니다.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의 위로가 있어야 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계속 사람들에게 칼을 주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혹은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최고에 있는 사람이 결국 주게 되는 것이 이러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사랑 받을 수 없습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다 안식을 요구하는 사람들만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도 이 세상에 칼을 주어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맞추기 위해,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목표를 낮추겠습니까?
최고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의 생태 교란종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잘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교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박해 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무리에 속하는 것보다 옳은 방향으로 고독하게 나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백종원 씨가 나폴리에서 음식 장사를 하는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섰는데, 다 감당할 수 없을 때 생각해 낸 것이 ‘도시락’이었습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태프들이 10유로에 먹는 도시락이 너무 허접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태리는 식사를 매우 오래하기 때문에 도시락으로 빨리 먹고 끝내는 것은 생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시락을 팔아도 그 상태가 매우 열악합니다.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는 비주얼이 좋은 도시락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폴리의 10유로 도시락을 전멸을 내고 가는 거야. 내 특기거덩, 시장 교란시키는 거.”
백종원 씨는 요식업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어떤 틈으로 들어가면 성공할 수 있는지가 보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그 시장은 교란 상황이 일어납니다.
최고는 어쨌거나 세상을 교란합니다.
그러면 그 세상에서 사랑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제거 대상이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이와 같습니다.
돈과 맛있는 것, 명예욕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백종원 씨는 예산 국밥 거리에 분열이 일어나서 결국엔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또 골목 상권에 독점이 심하다고 국회에 불려 가서 “의원님, 너무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 때문에 포기해야 할까요?
절대 그래 보이지 않습니다.
약한 양 떼에 속하느니 고독한 늑대가 되는 것을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입니다.
차갑게 있느니 불을 지르는 사람이 되고 비겁한 평화 속에 머무느니 칼을 주는 사람이 됩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식별력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에 빠진 자녀를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들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들이 아버지와 불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소식을 끊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나 가치 그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강조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위치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세상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조차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백번 천번이고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것 위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분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분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며, 얼마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오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토록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재물이나 부동산, 은행 잔고! 영원할 것 같지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은 어느새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꼭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토록 든든한 보루였던 부모님, 형님, 존경했던 스승님, 은사님, 절친들, 정말이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언제나 제 곁에서 든든히 저를 지켜줄 것 같았는데, 하나 둘씩 결국 다들 먼저 떠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젊음도 사라지고, 생명도 저물어갑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이토록 고마우신 하느님에게 가장 큰 사랑과 존경, 흠숭과 찬미를 드리라는 교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예수님은 세상에 ‘참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분열과 갈등과 싸움이 생기고 박해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분열과 갈등의 책임은 예수님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분열, 갈등, 전쟁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은 “나는 평화를(구원을) 주려고 왔는데, 사람들은 칼을(멸망을) 선택한다.”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2) 말씀의 표현에 초점을 맞춰서,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거짓 평화와는 다른 ‘참 평화’이다(요한 14,27). 내가 주는 ‘참 평화’를 얻으려면, 세상의 거짓 평화를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칼’은 거짓 평화를 잘라내고 끊어버리는 단호함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식구들이)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라는 말씀은 종교와 신앙 때문에 식구들이 분열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런 일이 항상 생긴다는 뜻도 아니고, “식구들과 갈라서라.” 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라는 말씀은 “식구들을 원수로 삼아라.” 라는 뜻이 절대로 아니고, “신앙을 위해서라면 식구들을 버려라.” 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종교박해가 가정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종교와 신앙 문제로 식구들이 분열되고, 식구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상황이 되면, 신앙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앞의 16절에 있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가정 안에서 생기는 박해에도 적용되는 지침입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인생의 영적 동반자입니다.
우리는 가족이 ‘인생의 동반자’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가족을 버리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
(1베드 3,1-2)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그것이 곧 ‘슬기롭고 순박하게’ 가정의 ‘참 평화’를 지키는 일입니다.
즉 식구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이 말씀은 식구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37절의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구원을 방해하는 ‘현세적이고 육적인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족’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식구들과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 실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실천의 첫 번째 대상은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에,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섰을 때, 가정을 떠났을 뿐이고, 가족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코린토 1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결혼해서 아내가 있는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다녔다는 말이 나옵니다(1코린 9,5).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혼자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도 가족이 함께 진다면 가벼워질 것입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 없이 혼자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 나라에서 무슨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가족 없이 혼자서만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이 ‘참 평화’가 될 수 있겠습니까?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 인내와 겸손이 답이다>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부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일어나 읽어보는 지난 밤에 받은 카톡메시지입니다.
90년대 초 30대 초반의 나이였던 자매인데 30년이 지난 지금은 60대 초반에 접어든, 수도원과 오랫동안 계속 관계를 맺어온 분입니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 힘차게 온힘을 다해 불렀던 잠자리에 들기 전 끝기도 ‘찬미가 둘째 연’과 ‘시메온의 노래 후렴’ 그리고 ‘본기도’ ‘강복’ 내용이 새삼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 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이래서 하루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은 온전히 주님과 함께 하는 잠들기 전과 잠깬 후의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시메온의 노래 후렴과 강복, 본기도도 좋습니다.
“낮동안 우리를 활기있게 하신 주여,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리니, 자는 동안도 자켜주시어 편히 쉬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이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주여, 오늘 우리가 주님의 부활신비를 경축하였사오니, 겸손되이 비는 우리 목소리를 들으시어, 거칠 것 없는 당신의 평화속에 쉬게 하시고, 내일도 당신께 찬미드릴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잠깨게 하소서.”
알렐루야 찬미로 시작하여 아멘 감사로 끝나는 하루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23년전 5월 요셉상 배경의 흐드러지게 폈던 연산홍꽃 장면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붉게 타오르는
연산홍!
-2000.5.10.
주님을 닮아 경거망동, 부화뇌동,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주의 내적 삶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인내와 겸손이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어제 새벽 산책중 무수히 피어나는 무궁화꽃에 감동하여 저절로 흘러나온 제 고백같은 시입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라 했지만 실은 제 소망이 담긴 고백입니다.
일년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습니다.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되어 하늘 사랑 고백하며 환하게
송이송이
무수히 환대의 사랑으로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찬미의 고백은 끝이없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을 사랑의 찬미,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마음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하니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제1독서의 변화가 가벼운 충격입니다.
창세기의 별같이 찬란히 빛나던 성조들의 이야기는 요셉으로 끝나고 다시 시작하는 출애굽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의 시련과 고난을 보여줍니다.
아, 이게 인생입니다.
늘 순탄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이 삶의 리듬처럼 반복되면서 전개되는 파란만장한 세상의 삶입니다.
다시 이런 시련과 고난이 시작되는데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의 수난은 계속됩니다.
하느님만큼 걱정 많고 고생 많은 분도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했던 하느님께 위로와 힘이 됐던 분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묵묵히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끝까지 견녀내고 버텨낼 것입니다.
내적 평화와 유머감각을 잃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말입니다.
고통과 시련중에도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를 잃지 않았던 믿음의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순교적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우는 평화, 사랑, 십자가, 환대입니다.
주님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말씀하십니다.
충격적 표현에 놀라지 마십시오.
값싼 평화는 없습니다.
성 베네딕도는 “거짓평화를 주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 앞에 드러나는 거짓이요, 빛 앞에 드러나는 어둠이요, 정의 앞에 드러나는 불의입니다.
주님은 참평화를 주러 오셨지 결코 거짓 평화, 값싼 평화를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면 이처럼 칼로 나누듯 선명한 분리로 분열이요 불화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참평화의 과정일뿐입니다.
이런 창조적 정화 과정 후의 평화가 값비싼 진짜 참평화입니다.
바로 저희 수도자들의 오랜 정주생활 후의 베네딕도의 평화가 이런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힘차게 고백합니다.
다음은 사랑입니다.
사랑에도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워선 안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을 우리는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모두 사랑하되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항구한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앞서의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이래야 모두에 대한 집착없는 초연한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주는 사랑 깨끗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십자가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결코 값싼 십자가가, 악세사리, 장식품 십자가가 아니라, 끝까지 죽기까지 온힘을 다해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할 내 십자가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모르 파티 내 책임의 십자가, 내 운명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여 어깨에 메고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래야 항구한 정주의 삶이요 존엄한 품위의 참삶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은 우리 모두 십자가를 질 힘을 주십니다.
다음은 환대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내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깊이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이요, 잠시 이 세상에 온 손님들이요 나그네 길손들이라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에 연민의 사랑이 넘칠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하나라도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을, 궁극에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고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섬기듯 그런 환대의 사랑으로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의 궁극의 갈망이요 소망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 참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평화의 사람이,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그리고 모두를 주님처럼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靜水流深’정수유심),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深水無聲;심수무성).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지순례 중에 베네치아에 가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성 마르코 성당으로 가던 중에 스마트 폰의 화면이 멈추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참 난감했습니다.
액정을 고치는 데 1달 정도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스마트 폰을 빌려야 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문자도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에는 거센 풍랑이 불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도 해야 하는데 마음은 온통 스마트 폰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비우고 뉴욕에 가서 고치기로 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주위에 있는 분들이 사진도 찍어주었고, 미사도 잘 봉헌했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니 한국음악을 신청하면 연주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신청했습니다.
감미로운 한국 노래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니 이번에는 ‘도라지와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 광장에서 한국의 음악을 들었고,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을 털어버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마트 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니 전원이 들어오면서 화면이 켜졌습니다.
스마트 폰은 액정이 고장난 것이 아니고 전원이 방전된 것이었습니다.
화면이 켜지면서 제 마음도 평온해졌습니다.
예전에 이순신 장군의 ‘명량’을 보았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의 연기와 실감나는 해상 전투 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고, 겨우 풀려났지만 배는 고작 12척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는 ‘두려움’이 팽배했습니다.
일본에서 300척이 넘는 배가 다시 왔고, 이번에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이 머물던 집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아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상대방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화약을 가득 실은 배에 남편이 있었고, 그 배는 이순신 장군이 있는 대장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있던 아내는 그 배를 향해 포탄을 쏘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비록 남편은 죽을지라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옷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고, 남편은 화약을 실은 배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고, 남자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파라오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나와 상대방을 갈라놓고, 불신의 벽을 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면 마음에 위로가 오고, 그것이 지속됩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도 상대방을 보고서 운동선수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같은 계통에 살고 있으면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합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모습이 맞다고 단정을 짓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지도 않으면서 하는 판단은 절대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 모습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틀린 점을 발견했다면 내 안에 그 틀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이 늘 필요합니다.
‘내 안에 그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평화를, 친절을, 기쁨을….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가 ‘평화’일 정도로 평화를 강조하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악에 순응해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칼을 들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칼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편하고 쉬운 것,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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