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요한 5,1)
성경(요한 5, 1-14)에는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다섯 주랑이 달려 있는 치유의 연못을 방문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랑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였는데,
물이 출렁거린 다음 맨 먼저 못에 내려가는 이는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는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이 건강하게 된 줄도 모르고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치유의 연못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정하고 젊잖은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건강을 주는 물은 하느님이시기도 하고 사람이시기도 하며,
죄를 짓고 슬퍼서 오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씻어주시고
앞으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씻어주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아드님의 숭배할 만 하고 가장 고귀한 피로,
우리를 그 사랑의 연못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 치유의 연못 주변에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출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병자(病者)들은
모든 인간을 의미하며 구세주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의 율법에 억매여 살고
죽고 난 후에는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즉 우리의 구세주께서 거룩하게 괴로워하시면서 죽으실 때
당신의 소중한 피가 쏟아져 나와 수많은 병자들에게
영원한 건강과 구원을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병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즉 구원의 날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가 아니면
아무도 치유될 수 없고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의 치유의 연못을 지나가지 않는
모든 병든 영혼들은 틀림없이 영원히 죽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이 출렁거리는 것을 겉으로만 느끼는 다른 영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동료들의 충고를 받거나 지옥의 벌을 겁내거나
영육(靈肉)에 영향을 미치는 고통스런 불행을 당하거나
강론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감동하여
치유의 연못으로 온 영혼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치유의 연못으로 옵니다.
이들은 매우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 받아 깨끗하게 되지만
하느님께 진심으로 완전히 돌아가기를 망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사람들은 살다가 죽으면서
반(半)만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완전히 깨끗하게 될 때까지
연옥(煉獄)에서 더욱더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치유의 연못에는 다섯 주랑이 달려 있었고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출렁거리게 하면 치유되게 되므로
거기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먼저 연못에 내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교만한 사람들과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
복수심에 불타 있는 사람들과 욕심이 많은 사람들과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피로 씻어 깨끗하게 되기만 하면
완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섯 주랑을, 흘러내리는 주님의 소중한 피로 씻게 되면
죄의 중병(重病)으로부터 치유되어 구원 받게 된다고 여기고 있는
‘주님의 다섯 개의 거룩한 상처’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매우 중요할뿐더러
영적(靈的)으로 병든 모든 영혼에 필요한
‘다섯 개의 덕(德)’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진정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의 덕(德)으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손과 모든 피조물의 손 아래로 머리를 굽히고,
원인이 무엇이든, 역경을 맞이하든 번창하든, 슬프든 기쁘든
모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총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며, 결코 불평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치유의 연못의 두 번째 관문은 ‘내면 생활에 집중하면서
즉 묵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순진하고 선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이 덕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표징을 기다리지도 않고
제멋대로 하므로 오로지 과시(誇示)하기 위하여,
자신이 육감(肉感)의 영향을 받고 있고 자기 만족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가르치고 강론하려고 바깥으로 뛰쳐나갑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묵상을 게을리하고
피조물에게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외면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그 동기를 알아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이렇게 하면서 외면의 일을 하게 되면
안팎으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신중하지 못한 행동은 불안을 낳게 마련인데
내면에서 하느님의 인도와 충고를 받지 않고
쾌락과 덧없는 것들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관문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니거나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을 진심으로 멀리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내적 외적으로 지은 모든 죄를 갖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고,
진심으로 하느님만 소유하려고 하고,
사랑으로 영원히 하느님께 매달리려고 하고,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때문에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모든 죄를 용서 받게 되며,
열심히 노력할수록 더 완전하게 죄를 용서 받게 됩니다.
네 번째 관문은 ‘기쁘게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가난에는 외적인 상황 때문에 생기는 ‘외적 가난’이 있고,
참된 가난인 ‘내적인 가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된 친구가 되려면
‘외적인 가난’은 필요 없고 ‘내적인 가난’만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내적 가난’의 덕(德)을 보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하느님만 가치 있게 여기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갖게 해주신 것만 갖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 가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 6,10)
우리는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것
즉 하느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기쁘게 그리고 재빨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이 갖고 있는 좋은 것들과 친구들과 명예와 영육(靈肉)을
모두 버리는 것이 ‘가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겁한 인간의 속성인 비천함에서 벗어나려면
이러한 것들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선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가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고,
기쁘든 슬프든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속된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천국의 군주가 되면
가난한 사람에게 무관심하지도 않고
영혼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부유하게 될 수도 있지만
부유하게 되지 못하게 만드는 재물은 조금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평화와 기쁨을 위하여 헛된 것들을 뿌리치지 못하게 되면
쉬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서 거지처럼
자비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로부터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이 자비는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선물로
하느님을 만나게 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잠시 잃거나 얻는 것이 있어도
일시적으로 슬퍼하거나 기뻐하게 되는데
영혼의 저급한 부분에서만 느낄 수가 있으며,
슬픔이나 기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지는 않으며,
일시적으로 그런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다섯 번째 관문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은총을 말하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광스러운 모든 선물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영적인 깨달음의 은총을 내려주시어
하느님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인도해주시면 행운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며,
영적으로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운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노력해서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만 지켜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쏟아 부으시고 계신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벽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서 어떤 것을 응시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그 물체만 바라보고 있으면
벽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벽이 얼마나 두꺼운지
또는 얇은지를 의식하게 되면 벽이 장애가 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크든 작든 영혼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선물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만 생각하지 않고
쾌락에만 빠지게 되면 하느님을 소유할 수 없게 되어
하느님만 찬양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면 깊이 들어가서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총은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즉시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많은 병자들이
치유의 연못으로 이어지는 주랑에 누워 있더라도,
천사가 물을 출렁거리면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만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출렁거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으로 내려오시어
은총으로 그 사람의 내면생활을 흔들어놓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옛날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그가 마치 추방된 사람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살기 위하여
내적 침묵을 하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게 되면,
지금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들을 모두 포기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영혼의 깊은 물을 출렁거리게 하시면
이러한 일들이 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병자들에게 일어나게 되면
즉 외적인 일에 모든 정신력을 쏟아 붓고 있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중한 피로 씻어져 완전히 깨끗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면의 깊은 곳에서만 찾고 깨끗하게 되어야만
모든 영혼의 병이 치유되게 되므로
성경(마르 6,56)에서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께서
병든 영혼을 치유해주셔도 평생 치유된 것을
모르고 사는 수가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영혼을 가장 완전하게 만드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영혼이 완전히 치유되어 건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자기만족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치유된 것을 모르게 하시어 항상 하느님을 경외하게 만드시고
하느님께서 보시면 창피하다고 느끼게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은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께 죄를 지어도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게 되는데 이는 무척 성화(聖化)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영혼은 죄를 지어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하지 않고
기쁘게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매일 자기를 죽이게 되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게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영혼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외적인 일을 해도 잘난체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 하려고 하고 조금도 교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이나 미움도 모를 정도로
자기를 버린 사람의 종말은 어떻게 될까요?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 영혼을 영원한 집으로 데려가시어
모든 무지(無知)와 어둠을 없애주시고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많은 시련을 겪은 영혼은 기쁨과 자만심을 죽입니다.
그리고 어둠과 황량함을 느끼며 사는
오랜 세월 동안에는 하느님만 믿었기 때문에
연옥을 거치지 않고 바로 하느님의 품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이 때문에 성경(묵시 14,13)에서
“나는 또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주님께서 치유의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을 만나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동안 병들어 있어도 죽지만 않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38년 동안 끈질기게 하느님을 기다린 사람은 마침내 상급을 받게 된다는,
이 교훈을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가시어 건강하게 해주시고는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가르치심은
오늘날의 많은 영적인 사람들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나는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경건하게 살았지만
우리의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주시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하셨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결코 겸손하게 세상을 등지지도 않았고
하느님의 뜻을 참고 기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덕을 쌓은 사람이 드문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느님께서 복 밭으로 인도하실 수 있게
자기를 기꺼이 버린 사람이 너무나도 드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이러한 영혼들은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가 자기를 버리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
저희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알게 해주소서.
당신께서 저희를 무지(無知)하게 하시고 어둠 속에 있게 하셨는데도
이를 모르고 무지와 어둠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게 해주소서.
당신께서 때를 알려주실 때까지 해방되기를 바라지 않게 해주소서.
하느님, 저희가 불안해 하고 괴로워하고 있어도
당신의 인도를 믿고 용기 있게 참을 수 있는 은총을 저희에게 주소서. 아멘.
(예수 공현 대축일 후 셋째 주일 강론
(Sermon For The Third Sunday After The Epiph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