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우울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서 의기소침하고 우울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어서 기운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용기를 가지고 자신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감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서 좋은 의견을 내줬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1.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살아가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한없이 약해집니다. 우리가 마음이 우울하거나 절망이 되는 것은 외부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남에게 비춰지는 자신이 초라해지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한 삶이라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삶을 말합니다. 남을 의식하고 배려하는 생활은 좋은 것이지만 자신을 철저하게 버리고 너무 타인 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내 중심적으로 살아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설령 타인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밥 먹여 살려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칭찬받고 좋은 사람으로 인식된다고 해서 나에게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 그것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나의 성공과 변화에 온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2. 과거의 일은 이제 그만 잊어버려야 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 같지만 자신감을 찾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과거속의 실패경험이 지금의 나를 괴롭히려 들 것입니다. 그 마음은 또다시 오늘과 내일의 삶까지도 우울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울한 과거의 일을 이제는 정말 잊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 자체가 절망적으로 보이면서 급격히 무너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간 버스는 빨리 포기하고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우리들은 각자가 놓아주어야 할 과거속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의미 없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연습을 해봐야 합니다. " 그래 다시 시작하자 "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3.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생긴 대로 살기보다는 자꾸 욕심을 부리면서 남들처럼, 아니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그처럼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지만 마음만 저 멀리 가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자꾸 불평불만이 커질 뿐입니다.
기대치를 100을 설정했을 때 현재 상태가 50이라면 50만큼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치를 60정도로 낮춘다면 10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습니다. 목표를 높게 잡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현재상태를 무시한 채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보다는 과정에 충실 하는 마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야 합니다.
4. 작은 성공의 경험은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 키우는 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마치 한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켜 줄 마술과 같은 비법을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감은 성공의 경험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하나씩 도전해서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마음속에서 "할 수 있다." 라는 긍정적인 마음이 올라올 것입니다.
5.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난을 하지 말도록 합시다. 스스로 잘못됨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마음은 필요하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잔소리하듯이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무너질 정도인데 나마저 나를 그렇게 괴롭히면 어떠한 자신감이나 긍정적인 마인드는 생기지 않게 됩니다. 자기칭찬은 이럴 때 활용해야 합니다. 꼭 어떤 일이 잘 될 때나 승승장구할 때 칭찬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칭찬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스스로 누구나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멋진 사람은 위기 상황 속에서 자신을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가 이러한 위기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동안 수고해주고 열심히 달려온 내 자신을 먼저 인정하고 바라봐 줄 수 있다면 우리는 새롭게 다시 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든든한 친구는 바로 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6. 지금 당장 시작하십시오. 마음이 우울할 때는 생각도 문제이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자꾸 습관에 익숙해지면서 아무런 의지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또 행복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만 방황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비현실적입니다. 지금 오늘 일어나서 새롭게 경험하고 다양한 체험을 했을 때 스스로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경험 없이는 어떠한 것도 이해하거나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경험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도전하지 못하는 두려움이 나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일단 뛰어드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7. 최선을 다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 속에서 배워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최선을 다했는지에 대해서는 자기만 알 것입니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한다면 그들보다 수십 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 없는 성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행을 바래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한두 번은 운이 좋아서 좋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최선을 다했다면 더 이상의 미련도 없고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감이 무너지지 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는 도전을 향한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해도 안 되면 두 번하고, 열 번하고 그래도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도 안 되면 멋지게 다른 것에 도전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열정, 성실함, 끈기, 인내의 마음은 그 어떤 무엇을 하더라도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낼 것입니다. 자신감이라는 것은 스스로 키워가는 것입니다. 이제 위축되지 말고 자신감을 가지고 올바른 일을 해봅시다.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9ㄱ.11-16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축일6월 14일 성 엘리사 (Elisha)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 연도 : +9세기경BC
같은 이름 :엘리세오, 엘리세우스
성 엘리사(Eliseus)는 엘리야(Elias)의 계승자로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셨다’라는 뜻이다. 엘리사는 대략 기원전 850-800년경 북이스라엘의 왕 아하지야, 요람, 그리고 여호아스 재위 기간에 활동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수많은 기적을 행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구약성서에는 그에 관한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신명기계 역사서인 열왕기 상하권에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큰 단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엘리야 이야기는 열왕기 상권 17-19장과 21장, 열왕기 하권 1-2장에, 엘리사 이야기는 열왕기 하권 2-9장에 나타나며 그의 죽음 이야기가 13장 14-21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엘리사 개인에 관한 설화적인 이야기들과 사마리아의 역사적인 격동과 연관되어 있는 사건들이다.
아벨 므홀라 출신으로 사밧의 아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1열왕 19,16-21). 열왕기에 등장하는 그에 관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적에 대한 것이다. 또 각 이야기들은 서로 연관성을 갖지 않는 독립된 이야기로 나타나며, 엘리사의 생애에서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일어났는지 등의 시간적인 연계성도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다만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며 이 기적들은 특별하게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또한 도덕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엘리사는 ‘예언자’라는 명칭과 함께 자주 ‘하느님의 사람’으로 지칭되었다.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들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이야기들은 엘리사가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며 엘리야와 함께 예언자로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엘리사는 야훼 신앙을 저버린 오므리 왕조를 거슬러 계속해서 투쟁을 하며 오므리 왕조의 멸망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예후를 세우고, 다마스쿠스의 하자엘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는 엘리사의 사회적 역할의 장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바뀌어 나타나며, 그는 왕궁과 밀접히 연결되어 특별히 국방 부분에 많이 연계된다.
엘리사는 그 시대에 온전한 성실로 야훼 신앙을 지킨 하느님의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가 행한 것으로 나타나는 놀라운 일들은 그의 확신 있는 행동의 능력을 보여 준다. 거칠고 단호한 몇 개의 설화는 야훼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고 이스라엘 역시 대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아주 힘든 시기에 그를 휩싸고 있던 신념과 확신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신명기계 역사 속에서 민간설화에서 기억하는 대로 크나큰 능력을 가지고 초기 이스라엘에서 혼합주의 경신례의 위협을 거슬러 야훼 신앙을 고수하며 오로지 야훼만을 신봉하던 사람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엘리사는 죽었을 때도 살아 있을 때처럼 야훼의 생명을 전하는 도구로 묘사되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던 엘리사가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회당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의 문둥병을 낳게 한 이야기를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도운 이야기와 함께 인용하면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의 정당성을 설명하였다(루가 4,27).
오늘 축일을 맞은 엘리사 (Elish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