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방장관의 결재를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권력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크거나 작거나 조직에는 그 조직만의 문화가 있다. 흔히 농반진반으로 우리 사회에 지역, 학교, 군을 각각 대표하는 3대 조직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기강이 분명하고 결속력이나 선후배 챙기는 전통은 ‘해병대전우회’가 으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제대한 지 오래된 사람들이, 우연히 해병대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과 어울렸을 때도 자기들이 해병대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기수를 따지며 형님 아우 하며 어울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변변찮게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친 나로서는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심지어 경이롭기까지 한 복잡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병대 장병들의 이런 독특한 결속력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신들이 가장 위험한 전장에 투입되는 병력이라는 점, 그렇기 때문에 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함께 목숨을 도모해야 하는 전우라는 점, 그런 만큼 공군이나 해군 육군보다 훨씬 더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전우애의 발로일 것이다. 해병대전우회의 조직문화는 이런 해병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분명할 텐데, 나는 그 해병대 정신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에국충정, 임전무퇴의 용감함, 끝까지 전우를 챙기는 전우애 등으로만 구성되는 줄 알았다.
22일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체육관인 '김대식관'에서 열린 고 채수근 상병 영결식에서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왼쪽)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3.7.22. 연합뉴스
해병대 정신에는 정의와 정직도 있다
그런데 나는 최근 해병대에서 집단항명의 수괴로 몰리고 있는 박정훈 대령의 입장문을 통해, 해병대 정신의 구성 요소에는 충성과 용기, 전우애뿐 아니라 정의와 정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박 대령은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입장문을 통해 “지난 30년 가까운 해병대 생활을 하면서 군인으로서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하고 항상 정정당당하게 처신하려고 노력했다”며 “해병대는 정의와 정직을 목숨처럼 생각하는데 그러한 해병대 정신을 실천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그렇지, 정의가 없는 충성과 용기는 대한민국 해병대 고위 장교의 덕목이 아니라 한낱 무부(武夫)의 자기 보신책일 뿐이며 정직하지 않은 군대는 언제 총부리를 거꾸로 돌릴지 모르는 난군(亂軍)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 ‘박 대령의 전쟁’은 박 대령의 개인적 명예 차원을 넘어 해병대가 어떤 방식과 정신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어쩌면 그것마저 넘어 대한민국 군대는 무엇을,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를 가름할 큰 차원으로 비화하는 느낌이다. 박 대령의 수사는 분명 해병대 일원으로서 해병대를 지키고자 하는 전우애의 한 발로이다. 자신의 부하이며 (장차 해병대전우회의) 후배이기도 한 젊은 해병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철저히 수사해 다시는 이런 사고가 해병대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니 그것이 전우애의 발로이다. 또한 그의 수사는 군 전체를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군에 자식을 보낸 전 국민을 향해 “비록 장병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으나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혀 다시는 그런 불행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수사 결과를 해병대 사령관, 해군 참모총장, 국방부 장관에게 대면 보고했음에도 국방부 법무관리관으로부터 수차례 수사 외압과 부당한 지시를 받았고, 이미 경찰에 이첩한 사건서류를 불법적으로 회수당했다. 그리고 끝내 '집단항명 수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로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국방장관의 결재를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권력
장관이 대면보고를 받고 서명까지 한 사안을 장관을 보좌하는 법무관리관이 뒤집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목에서 장관의 출타를 틈타 장관 이상의 선(안보실 뿐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대통령실 전체, 아마도 대통령 자신)이 개입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믿는다. 그 순간 ‘사회 참사’와 ‘경제 붕괴’는 정부 사유화의 일란성 쌍둥이라는, 최배근 교수의 그저께 민들레 칼럼 제목이 떠올랐다. 국민을 위해 가장 크게 공익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대통령 권력이 사적 이익을 위해 휘둘리면서 드디어 해병대 항명 사건을 조작해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겁도 없이 박 대령을 겁박하는 자들은 진실과 정의는커녕 사적 인연을 챙기기 위해 사병의 생명이나 자녀를 사병으로 군대에 보낸 부모들의 신뢰를 헌신짝 취급하는 것이다.
어제 해병대전우회와 역대 사령관들의 성명이 나왔다. 이들은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호국 충정의 마음으로 군 원로들과 함께 100만 해병대전우회 이름으로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고자 한다”며 “사고 책임을 수사함에 있어 외부 개입 없이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군이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법과 원칙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도록 수사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면서 “채수근 해병의 살신성인이 진정한 해병대의 표상으로 남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유가족을 위로하고,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고 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강력한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성명이 명확히 진실과 정의, 은폐와 부정의의 편을 가른 것은 아니지만 ‘사고 책임을 수사함에 있어 외부 개입 없이 (…) 군이 명확한 결과를 도출해야’ ‘법과 원칙에 따라 (…) 수사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사고 원인을 분명히 밝히고 강력한 대책을 수립해야’ 등등의 대목은 박 대령의 지금까지의 행보에 지지를 보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박 대령은 “채수근 상병의 시신 앞에서 너의 죽음에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 방지가 되도록 하겠다고 약속과 다짐”으로 수사를 시작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사에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이다.
보수색이 특히 강하다는 해병대전우회가 이 정도 성명을 낸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스스로 보고 느끼기에도 애국충정과 용기, 전우애라는 해병대 정신이 위기에 봉착했음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에 박 대령이 토로한 정의와 정직이라는 덕목까지 장착한다면 그야말로 해병대 정신은 대한민국 최고의 조직문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바람 앞의 촛불, 해병대 정신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