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대장장이 (외 1편)
조혜정 너무도 오래 산 눈의 대장장이가 무릎을 녹여 마지막 폭설을 만들었다 눈의 대장장이가 금속의 무릎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려서 오래된 책들이 아직 나무였던 시절과 석탄이 다이아몬드를 낳던 때*를 지나왔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을 때의 일이었다 무릎이 없어도 눈의 대장장이는 어디에나 잘 도착했다 그 도시에서 엥겔지수가 가장 높은 여자의 동굴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눈의 대장장이는 아! 이 흰 것 좋아 그 여자가 말할 것 같은 순간을 좋아했다 동굴에서는 들리는데 모두에게는 들리지 않는 희고 차가운 공중의 주파수가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폭설은 내내 그곳에 살았다 오래 바라보면 어떤 것들은 영혼을 갖게 된다 사람들이 그곳에 문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기억해냈을 때 여행을 떠나는 거 어때요 처음 도착한 도시인데 모두 걸어 본 길 같을 거예요 무릎 없이도 흰 눈이 내릴 거예요 여자가 폭설 속에서 간직한 어스름의 문장을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리면 눈의 대장장이의 맥박이 공중에 고동치고 도깨비불, 딱정벌레, 윙윙거리며 벌이 맴도는 꽃 덤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믿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하던 때의 일이었다
* 발터 뫼어스, 『꿈꾸는 책들의 도시』. 루꼴라
루꼴라, 라는 말 좋아 루꼴라는 영양이 풍부한 서양 채소 이름 또는 ㄹ로 내가 만든 아름다운 물고기 루꼴라와 함께 어항 속에서 부드럽게 호흡하는 ㄹ의 레인보우 공기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심심해하지 않기로 했잖아, 루꼴라 그런데 왜 물은 불보다 더 아름다운 발음일까 클라리넷은 나보다 루꼴라 너의 목소릴 닮은 걸까 무엇을 질문해도 ㄹ로 대답하는 루꼴라를 과민하고 즐거운 상상이라고 나는 부르지만 모두 가진 루꼴라에게 ㄹ 대신 무엇을 선물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ㄹ에 흠뻑 젖어, 우리 바다나 갈까 상추 같은 마음을 데리고 네 이름을 즐거운 해변에 놓아둘게 바다에는 같은 리듬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이 있고 헤엄치는 사람들이 무사히 ㄹ의 해변에 닿았으면 좋겠구나 그 바다에서는 지루해하지 않기를 바라, 루꼴라
―시집 『리을의 해변』 2024.10 ------------------- 조혜정 / 충남 당진 출생. 2007년 《시와반시》 신인상과 2008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 시집 『리을의 해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