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는 이십사절기 중 추분과 상강 사이의 열일곱번째 절기이다. 태양의 황경이 195°인 때이며 양력 9월 8일이나 9일쯤에 든다. 이슬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서리가 되기 직전의 시기이다. 제비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단풍이 짙어지며 밤이면 귀뚜라미 소리가 한결 가을의 흥취를 돋우는 절기이다. 기러기가 초대받은 듯 모여들고 국화가 노오랗게 핀다.
Blue, 샛강이 흐르는 소리, 검은 전기선, Mook, 공포 그리고 전율, 그림자 속 공기의 침묵, 길들이 흘러내리는 소리, 텅 빈 Model house, 묵시록, 소금기, 아파트, 유리창, 전자 레인지, 조명, 중얼거림, 채색된 흑백 사진, 까만 철문, 햇빛, 빛의 흔들림들.
길 밖에서 어제와 다른 창백한 얼굴빛으로 별들이 뜨다.
ㅡ 달 뜨는 시(詩) 12시 59분, 달 지는 시(詩) 23시 11분
너에 대한 그리움의 거리는 삼십팔만 사천 킬로미터
그 짧은 빛의 거리.
마음은 자꾸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쫓아 타원형으로 찌그러져갑니다.
크레이터*, 크레이터 크레-이-터…
고요의 바다
기다리다.
기다리다가
환한 벽 속의 길을 걸어갑니다.
왁자지껄한 거리엔 아무런 말[言]도 없습니다.
……
지친 하루의 살들이 흘러내린 그림자들이 표정 없는 모습으로 살아 움직입니다.
이제 여러 갈래로 뻗어 겹쳐지는 그림자들만이 골목 속으로 걸어가는 내게 말을 걸어주고 있습니다.
망치를 맞은 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여름 볕으로 달구어진 골목길은 상처로 죽은 내 옆구리의 살만큼이나 조용합니다.
몇 걸음 앞에서 손바닥만한 회오리바람이 돌담 아래서 일고 있습니다.
휘도는 바람의 기운을 따라 올라가는 수많은 먼지의 말[言]들은 조용합니다. 조용합니다.
망치를 맞은 돌들이 폭풍우의 대양(大洋)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눈먼 파란 이끼가 자라고 있습니다.
기다리다.
12시 59분, 떠오르는 낮달이.
12시 59분, 돌담 위로.
12시 59분, 보이지 않습니다.
12시 59분, 기다리다,
밥티처럼 새얗게 혼자서 지는 저 달.
23시 11분.
그리움의 거리는 삼십팔만 사천 킬로미터
그 짧은 마음의 거리.
마음은 자꾸 당신을 향한 그리움을 쫓아 타원형으로 찌그러져갑니다.
크레이터. 크레이터 크레~이~터~
저 깊은 고요의 바다.
속으로
달은 또 제 시간에 뜨고 혼자 집니다.
ㅡ 강수량 70~90mm, 먼바다 파고 5~7m
향수병이 유리 진열장 위로 넘어진다. 유리병 속에 갇혔던 물의 길들이 뛰쳐나와 서로 몸을 섞는다. 출렁이는 물의 길들. 흘러내려 메말라가는 길들. 길의 끝머리에서 바삭바삭 부서지는 저 먼지의 길들, 긴 머리칼 같은 햇살이 건조한 내 몸을 뚫고 유리 진열대 위로 조용히 내려 앉는다. 말간 햇살 속에서 새하얀 그녀의 속살 내음이 난다.
목덜미로 그림자처럼 재빨리 지나간 것이 미끈둥한 바람이었거나, 오랜 정적이었거나, 내 몸과 섞었던 것이나, 혹은 몸을 섞지 못한 전기선으로 온종일 공중에 매달려 환한 내 방의 속을 꿈꾸며 징징거렸던 거나,
하얀 뼈들이 다 드러나 플라타너스에 동그랗게 오므라진 길들이 매달려 있다. 길 옆으로 검은 폐타이어들이 쌓여 있다. 중심의 시간에서 지워진 지친 무늬들이 먼 추억처럼 생의 한켠에 실낱처럼 걸쳐 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길을 벗어난 무리 앞에서 손을 씻었거나, 문명 앞에서 손을 씻었거나, 하얀 벽 속으로 파고든 전기선같이 기다란 욕망의 몸을 숨기었거나, 손끝에서 방울져 내리는 물방울들, 저 땀방울들 또 떨어져내린다.
창에 찔린 예수 옆구리의 상처에 폭우가 곧 쏟아질 것 같다.
내일 강수량 70~90mm.
내 몸 먼 곳에 있는 바다를 향해 이 메마른 계절에도 나는 조각배 하나 띄우지 못한다.
내일 먼바다 파고 5~7m.
자꾸 …자꾸, 자꾸만 목마른 오늘의 경계를 넘어 높은 파도가 밀려온다.
내일 먼바다 파고 5~7m…, 파고(波高) 5~7m…
향수병이 유리 진열대에서 넘어졌다. 향수병에 갇혔던 물의 길들이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몸 속으로 가을의 전설과 노오랗게 메마른 햇빛들이 가득 차오른다.
ㅡ 몸 속이 너무 메말라요.
ㅡ 이제 몸 좀 열어야 하겠어요.
詩. 정찬일 '내일 날씨'
* 크레이터 : 달의 분화구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의미로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사람의 시간 속에 남겼던 마지막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