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들은 번번이 심문과 저지를 당했다. 심지어는 부처님 오신 날에도경찰과 군인을 동원하여 주민등록증을 조사하고 공양 보따리를 풀어 혜치며 빼앗는 사태가 벌어져 실랑이를 벌이곤 했으니, 천주교측이 살벌함은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법화종 사찰 영통사 주지였던,
여든이 넘은 비구니 스님을 사이비 승려라 모략하였으며,
또신자들을 동원하여 절마당에 와서 찬송가를 불러제끼며
절 내으라 시비하기를 일삼았다. 회령사는 영통사에서 5분 여 거리에 있는 총회종 사찰이었는데, 회령사도 같은 고초를 겪다. 마을 주민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조만간 그 일대가 군립공원으로 지정될 것이니 땅을 헐값에 팔고 떠나라고 할 뿐더러, 관권과 결탁한 듯 증개축 허가도 내주지 않아서 원성이 잦았다. 여든이 넘은 영통사 주지 스님의 ‘살아남기’ 는 치열하였다. 저들의 그 폭력에 가까운 극성스러움에 분노하며 어떻게든 이겨내고자, 앵자산에서 마지막 남은 영통사를 지켜내고자 관계 당국에 진정함은 물론, 많은 불교 단체와 종단에 저들의 비인간적인 면면을 호소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노스님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도들은 자연줄어들었고, 노스님도 지쳐 어디론가 떠났다.
결국 앵자암에 마지막 절 영통사와 회령사는 저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한국천주교회의 천진암 성역화는 그렇게 진행되어 벌써 20년가깝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불교 거대 종단 인 조계종에서는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영통사와 회령 사가 조계종 사찰이 아닌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종 파를 문제 삼아 이 중대한 사안을 외면했다면 조계종은 한국 불교사에서 두고두고 직무유기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천진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우산리에서 잘 닦인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앵자봉 앞서 느닷없이 거대한 십자가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십자가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십자가가 세워진 위치는 주차장과 정문을 지나 100여 미터쯤 올라가서 였다. 양 옆에 산봉우리를 세워두고 가운데 산봉우리를 반쯤 깎아내린 듯 높은 평지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수평 광장 3만 명에 이르는, 100년 계획으로 세우는 천주교 대성당 터이다. 이직은 광장과 행사장으로 쓰이는 성당 터는 정문에서 올라오다 만나는 쪽을 10여미터 높이로 시작해 높고 거대한 돔을 형성하듯이 조성되어 있다.
성당 터 양옆으로 길을 내어 오르게 되어 있다. 저 아래 정문이 내려다 보이는 성당 터 정면 발치에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십자가를 세웠으니 거리감과 공간감, 시각적인 효과가 겹쳐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 풍광 좋은 산을 깎아내린 것 만도 엄청난 자연 파괴일뿐더러 자연과 이질적인 거대한 십자가를 깊은 산 속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더욱 섬뜩하다. 대성당 터 아래 단에는 2미터쯤 되는 높이에 시멘트를 둘러 바르고, 노란 페인트 글씨로 “한국천주교 백년 계획 천
진암 대성당터 (1979년 6월 24일~2079년 6월 23일)”라 쓰여 있다. 앵자봉 초입에서 초대형 십자가를 만났을 때에 이어 두번째의 섬뜩함을 맛본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다. 왜 하필 백년인가. 3만명의 터에 아무리 엄청난 성당을 짓는다 해도 백년은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유럽의 세계적인 성당이라도 옮겨놓는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성당을 짓는다 하더라도 속내는 뻔하다. 백 년 동안 응집력을 키우고 교세를 확장하며, 대내외적으로 시위를 하겠다는 것이다. 불교인들이 집안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가 결코 아니다. 백년 성당 터를 지나 오른쪽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천진암 감멜수녀원, 천진암정모성당, 한국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천진암성모상, 천진임박물관 등 여러 개의 안내 표지판을 만난다. 앵자산 골골에 천주교 부속 건물들이 세워져 있음을 알수 있다. 어쩌면 그 장소들은 예전의 암자 터이리라. 성당터에서 천지암터까지는 어림하여 1킬로미터쯤 될 듯하다. 숲이 우거진 산속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한국천주교회창립선조 5위 묘`가 성역처럼 잘 조성된 터전 위에 안치되어 있다. 그곳이 천진암터이다. 현지 자료에 따르면 천진암 터는 5천여 평. 5인 묘가 들어선 바로 그 지리는 한눈에 금당터(金堂; 그절의 큰법당)임을 알수 있다. 못난 후손들이 부처님 모셨던 지리를, 모셔야 할 자리를 빼앗겨 타종교인 묘자리로 내주었다. 도무지 할말이 없다. 지난 봄 기자가 찾았을 때 그 곳에서 천진암 터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참만에 ‘천진암터’라 쓰 인 작고 낡은 팻말을 발견했는데, 5인 묘역을 오르는 계단 옆에서 나무사이로 쓰러져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불자라면 모름지기 천진암 터에 가봐야 한다. 그리하여 그 곳에서 몇 번이고 못난 불교계를 한탄하 분노를 느껴봐야 한다. 후손이 못나면 어떤 일을 당할 수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천주교회가 불지들의 가슴에 얼마나 크나큰 분노와 원한을 키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시 서야 할 아름다운 절골 예부터 풍광이 뛰어난 앵자봉이었다. 앵자봉 일대 천진암 주변에는 주어사를 비롯해 백련암, 석이암, 봉태암, 일출암, 범어사, 샛절 등이 있었다. 따라서 고을 이름도 예부터 절막, 관음리. 약사골이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 앵자봉 아랫마을 그 어디에도 절골의 인정스러움은 찾을 길 없고 살벌함이 깃든 위엄만이 있다. 불교에서 천진불天眞佛은 본래 면목의 부처를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붙여진 천진암이란 이름에 ‘천진암은 천주天主의 진리眞理이고, 주어사走魚寺도 그리스도를 상징함이니 둘 다 깊은 뜻이 담겨 있다’ 고 해석하면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정도이다. 불교계는 이제 시야를 넓혀 지금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앵자산 일대는 당연히 교계에서 답사, 연구해야 할 과제이며 천진암 일대를 되찾는 일은 한국 불교의 지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으나 꾸물거리고 있을수록 멀어진다는 사실은 확실 하다. 또한 불교인들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앙다져 먹고 한을 키우게된 데는 전적으로 천주교측의 책임이 크다. 천진암이 천 주교의 발상지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진암을 | 천진암으로, 수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던 앵자산을 앵자산으로 보존하면서도 얼마든지 성역의 역할은 할수 있었다. 천진암은 천주교의 성역 이전에 불교의 성역이었다는 사실을, 성역화의 전 과정에서 지나치게 간과한 데에서 불교인들의 서운함이 맺혀 있다. 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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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악의축 개독교를 박살내자(개독교=개신교+개털교)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우습게 빼낸다........천사의 탈을쓴 가면을 벗기면 무시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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