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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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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찰 스크랩 교종 본찰 남양주 봉선사(奉先寺)(1/2)
현림 추천 1 조회 313 19.01.27 23:41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교종 본찰 남양주 봉선사(奉先寺)(1/2)


20여 년이 지난 지금 문득 봉선사가 생각이 나 들려 보았다.

옛적에는 작은 연못 언덕 위에 초라한 전각이 몇 채였든 것으로 기억되는데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답게 많은 전각이 늘어서 져 있다.

사찰 풍광도 연밭 하며 옛적보다 너무 많이 변했다.


 

봉선사는 조선 시대 왕실의 원당의 하나이기도 하며, 5대 승풍규정소의 하나였다.

봉선사 창건역사를 보면 969(광종 20)에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하였으며

창건 시는 운악사(雲岳寺)라고 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때에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할 때 이 절을 혁파하였다가,

1469(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세조를 추모하여 세조의 능을 운악산으로 이장하여 <광능>이라 하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선왕을 받든다>라는 의미로 봉선사(奉先寺)라 불렸다고 한다.


 

봉선사 홈피에 의하면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봉선사 대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1550(명종 5)에 이 절은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首寺刹)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 주지 낭혜(朗慧)가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637년에 주지 계민(戒敏)이 중창하였으며, 1749(영조 25)에는 재점(再霑)이 중수하였다고 한다.

 


1790(정조 14)에는 나라에서 전국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5규정소(五糾正所)를 설치할 때

이 절은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였다. 1848(헌종 14)에는 화주 성암(誠庵)

월성(月城)이 중수하였고, 1902년에 도성 안의 원흥사(元興寺)

수사찰인 대법산(大法山)으로 삼았을 때 이 절은 16개의 중법산(中法山)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하였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반포되었을 때는

 31 본산의 하나가 되었고, 교종 대본산으로 지정되어 교학 진흥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경허당대종사탑비)  


1926년에는 주지 월초(月初)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三聖閣)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195136일에 법당 등 14150칸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뒤 1959년에 화엄(華嚴)이 범종각을 세운 데 이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운경(雲鏡)과 능허(凌虛)가 운하당(雲霞堂)을 세웠고,

 1970년에는 주지 운허(耘虛)가 큰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月雲)이 영각(靈閣)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허당선사부도)


(만허당선사부추모비)


현존하는 당우로는 큰법당·삼성각·개건당(開建堂

방적당(放跡堂운하당·범종각·청풍루(淸風樓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큰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현판을 단 것이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비롯하여

1903년에 그린 칠성탱화, 사찰 입구의 보운당부도(報雲堂浮屠) 등이 있다.

  


  

그리고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 탑이 있으며,

 1981년에는 운허의 부도탑을 세웠다. 이 밖에도 사찰 안에는 춘원 이광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절 옆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이며, 천연기념물 제197호인 크낙새가 주변 숲에 서식한다.

  

   (승려들의 일종의 과거장 역활을 하는 곳을 승과원이라 하였다.)


@규정소는 조선 후기 승려의 기강을 북돋고 승풍(僧風)을 올바로 세우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를 말한다.

전국적으로 다섯 군데의 규정소(糾正所)가 있었다.

광주의 봉은사(奉恩寺), 양주봉선사(奉先寺), 남한산성 안의 개운사(開運寺),

북한산성 안의 중흥사(重興寺)와 수원의 용주사(龍珠寺)에 규정소를 두고

전국의 승풍을 규정하는 직책을 맡게 하였다.

이들 5개 규정소에는 각각 관할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봉은사는 강원도 사찰을 관할하였고, 봉선사는 함경도 사찰을 관할하였으며,

개운사는 충청도와 경상도, 중흥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용주사는 전라도의 사찰을 관할하였다.

단지 경기도의 사찰은 5규정소의 공동관할구역으로 삼았다.






내가 방문했을 때가 육화정은 점심공양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육화정 위의 전각은 선열당이다.

@선열당은 육화정(식당)을 신축하며, 그 위에 지은 당우이다.

애초에는 객실의 용도로 신축하였으나 객실로는 지속적인 관리가 어려워

수좌스님들의 해제철 해랑방사(解囊房舍) 등 다각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멀리서 본 육화정의 풍경.  공양간임을 알려주는 장독대들이 눈을 끈다.




일승원


선열당 뒤편 편액이다. 참 문학적인 편액이다.


서운당


방하착이란 이정표가 눈을 끈다. 내려 놓아라 라는 의미인데 내려 놓은 다음에는?


공사중인 운허대사기념관이다.






@청풍루

6.25로 전소되기 전에는 천왕문과 해탈문 및 소설루(小雪樓)가 있던 자리에

봉선사 신도들이 '조약돌 모으기 운동'이라는 불사를 전개하여 1985년에 낙성을 보았다.


봉선사는 현재 따로 천왕문이나 금강문을 두지 않고 청풍루 안에 불화로 이를 대신하고 있다.


나라연금강


밀적금강


북방수호신 다문천왕


동방수호신 지국천왕


남방수호신 증장천왕


서방수호신 광목천왕


범종루는 청풍루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봉선사는 세조의 능침인 광릉(光陵)의 원찰로

그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와 아들 예종에 의해 1469년에 창건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주조된 것이 이 동종이다.

왕실 발원으로 제작된 대형 범종으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며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청풍루 2층은 설법전으로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있다. 뒤편에 편액이 붙어있다.






설법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봉향당


설법전 우측에 위치한 약사전이다. 편액은 대의왕전으로 되어 있다.


약사여래상이 참 묘하다. 머리부분만 석조로 조성되어 있다.



청풍루 앞 풍경, 가을맛을 느끼게 한다.


~제2부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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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9.01.28 06:54

    첫댓글 감사 합니다,,,행복 하세요_()_

  • 19.01.29 15:08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 19.01.30 07:10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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