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골 연곡사를 찾아
부처님오신날을 엿새 앞둔 오월 중순 월요일이다. 남도 망월 묘역에서는 5·18기념식이 엄수될 날이기도 하다. 생활권에서 다소 거리를 둔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를 찾아 고승의 승탑과 탑비를 둘러볼 탐방을 나섰다. 아침 식후 이른 시간 현관을 나서 퇴촌삼거리로 나가 창원천 상류로 향했다. 창원대학 캠퍼스를 관통해 창원중앙역에서 부전을 출발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객차에서 전날 대구로 올라가 결혼식 하객으로 간 식장에서 받은 ‘이렇게 살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산문집을 읽었다. 며느리를 맞는 혼주가 사돈댁에서 보낸 책이었다. 딸을 시집보내면서 은행원에서 재난 안전용품을 제조하는 기업가가 되어 자녀에게 띄우는 편지글과 같았다. 앞 세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가장의 책무와 함께 아들딸에게 부모로 삶의 본보기가 되는 지침이었다.
진주에서 북천과 횡천을 지난 하동역에서 내렸다. 올해 들어 섬진강 트레킹을 네 차례 한 바 있다. 아직 못다 걸은 하류 송림 구간이 남았고 화갯골 깊숙이 의신계곡 숲길도 다녀올 생각이다. 지난 삼월 다른 곳보다 개화가 늦은 화엄사 홍매 망울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번에도 하동역에서 내려 구례로 갈 참이다. 구례행 버스 시간에 여유가 있어 화개로 가 장터를 먼저 둘러봤다.
화개에서 구례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섬진강 상류 돌부리와 물빛을 바라보며 구례읍에 닿았다. 피아골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제과점 빵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승객이 고작 두 명 탄 버스는 읍내를 벗어나 아까 올라온 강기슭을 되짚어 내려갔다. 피아골 입구 외곡마을에서 바윗돌이 뒹구는 계곡으로 뚫은 차도를 따라 들어갔다. 신록은 싱그러워져 계곡을 숲 그늘로 만들었다.
버스 종점을 앞둔 연곡사 앞에 내리니 절집으로 오르는 일주문이 덩그렇더랬다. 연곡사는 화엄사 말사지만, 백제 성왕 때 인도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절터가 된 커다란 연못에 제비들이 소용돌이치며 노는 모습에서 연곡사 이름이 유래되었단다. 연곡사는 1500년 흐른 세월 속에 여러 차례 수난을 겪은 상흔이 오롯해 석탑과 빗돌만 아픔을 증언하는 듯했다.
사천왕문 왼쪽에 자리한 삼층석탑으로 가는 길에 ‘피아골 순국 위령비’가 보였다. 빗돌에 임진왜란 때 승병 기지로 왜구와 치열하고 싸여 피가 내가 되어 ‘피내골’로 전하다가 피아골로 불린 사연도 새겨두었다. 왜구가 분풀이로 사찰을 불태워 석물로 된 탑과 귀두만 남아 중건되었다. 구한말에 고광순이 의병을 이끌고 최후를 맞았고 한국전쟁으로 다시 병화를 입어 불탄 처지였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에 손을 모으고 오른쪽으로 승탑 구역을 보러 언덕으로 올라섰다. 동승탑과 북승탑은 각각 국보로 도선국사와 현각선사 사리를 모신 탑으로 추정된다. 승탑과 함께 세워진 탑비는 이수와 귀두만 남고 비문은 파편으로 흩어져 입적한 스님 행적을 알 길이 없어 아쉬웠다. 단단한 화강암을 진흙 주무르듯 장엄하고 정교한 장식을 남긴 석공 솜씨가 놀라웠다.
승탑을 둘러 내려가 끄트머리 소요대사탑도 보물로 경내 석물로만 국보가 2점이고 보물이 4점이다. 근대 일제에 분연히 맞선 의병장 고광순 업적을 새긴 빗돌에 고개를 숙였다. 연곡사는 목조로 된 여러 전각들은 전란에 불에 타버려 연륜을 쌓을 겨를이 없었다. 띄엄띄엄 보인 전각에서 템플스테이로 일주일만이라도 머물다 가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그럴 수 없어 귀로에 올랐다.
구례로 가는 버스로 외곡까지 나가 화개까지 걸어 하동버스로 읍내로 나가 창원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객차에서 ‘피아골 연곡사’를 남겼다. “피아골 천년 고찰 수려한 고승 탑비 / 임진란 승병 기지 왜구의 심술 방화 / 절집은 새로이 중건 선풍 도량 이었다 // 근대에 항일 의병 장렬한 순절 현장 / 현대사 한국전쟁 총부리 겨는 상흔 / 신록은 잎을 뒤척여 울먹이며 지운다” 2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