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진의 ‘봄비의 章’
창밖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높은 집, 낮은 집, 큰 거리. 좁은 골목, 헐벗은 산하 어디에도 하나같은 은총으로 이제금 대지는 젖어들고 있다. 봄비는 실실이 풀리고 어울려서 방울지지 않는 은빛 운무(雲霧)
미지의 희뿌연 피안(彼岸)에서 모양 지울 수 없는 자우룩한 것으로 슬프도록 적막한 감정을 대동하고 조용히 내리고 있다.
언제나 생활의 주변에서 포효하고 탄식하며 신음하고 저항하던 불안한 것들이 차츰 침전하면서 서정의 호면에는 시간이 날아와 조용히 사색하고 부유(浮游)한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만상이 시원(始原)의 깊은 침묵에 잠겨 크낙한 소생을 예견하여 오한했을 때도 아마 신은 이렇게 은빛 안개같은 봄비를 자우룩히 내려 황량한 채 시공을 떠도는 어느 유성의 표피를 적시어서 드디어 만상을 생성케 하고, 은밀하고 조용하고, 자야로운 속삭임으로 그것들에게 다정한 숨결을 불어넣었을지 모른다.
살포시 웃는 꽃, 너울대는 나비, 움직이며 생각하는 인간, 지저귀는 새, 잉잉대는 꿀벌, 출렁이며 노래하는 바다. 이런 것들을 굽어보면서 찬란히 생동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신은 황홀하게 도취되지나 않을까. 그리고 깊은 만족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一切는 가고, 일체는 다시 회귀하면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전하는 것, 봄비는, 가고 소멸하는 것에 이별을 고하고 빛나는 소생을 약속하면서 간지러운 고운 입김으로 만상의 살갗을 깊숙이 젖어든다. 이 고요와 은밀한 것, 이 부푸는 기대와 꿈, 봄비는 크낙한 숨결을 잉태하고, 제시하고, 찬미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불모의 풍토, 삭막한 감정 위에 실실이 부드럽게 내리는 봄비------
이제 다시 숨쉬기 시작한 목숨의 소리가 은은한 깊은 희열과 머언 풍경에 화음하면서 조용히 울려퍼진다.
책을 펴들고 적적히 앉아 있는 담뱃집 아저씨, 우산을 받은 사람들이 조용히 오가는 거리의 목동이 손가락질하는 술집 있는 杏花村의 머언 풍경, 또한 철저히 객관화된 나의 후줄근한 형상, 등이 봄비에 젖으며 그윽한 색채로 조화되어 한 폭의 그림 안에 머문다
나의 육신은 로댕의 ‘묵상’을 자세하는데 영혼은 배암껍질 벗듯 어느 새 빠져나와 저만큼 새움트는 화초 옆에 겸손히 선다. 봄비에 함초롬히 젖은 나의 의지가 비로소 생동의 눈을 뜨고 창밖에 선 버드나무 의 청신한 푸르름에 새삼 놀란다
이윽고 화금빛 태양이 부시게 쏟아지면 목슴의 찬란한 항연에 온통 술렁일 大地.
인간의 영혼들도 풀잎처럼 활짝 가슴을 열고 은혜로운 봄비에 옹졸과 실의와 뗏기를 말끔히 씻고 모두 이 성성한 출발의 대열에 서서 싱그러운 소생을 구가한다면, 아아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 생명의 대합창일 것인지.
(1969. 12)
(1991년의 고희 문집(잔화의 장-그의 유일한 작품집이다. 제일 앞에 실린 글입니다.)
** 이화진은 안동 분으로 퇴계 후손인 양반댁 규슈이시다. 1960년 대 후반에 향촌동에 양지다방을 운영하면서, 대구의 수필을 쓰시는 분이 모여 들었다. 이때만 해도 대구에서 수필이 문학의 독립된 장르로 행세하지 못했고, 매일신문이나 도정월보에 독자에게 의뢰하여 올리는 글이 고작이었다. 이런 글은 수필이기보다는 신문의 양식에 맞추는 신문글 이었다.(칼럼 등등)
이화진 님은 맬일신문과 도저월보에 글을 올리는 독자분을 일일이 전화를 드려서(10여 분이라고 한다) 대구에 수필문학 모임을 만들었고, 이 모임이 영남수필문학회의 전신이었다.
1980년 대까지는 영남수필문학이 대구 수필문학을 대변했다. 그만큼 대구 수필문학사에 공로가 크신 분이다. 이분이 1970년 이후로는 대구에서 사라지셨다,. 발표되는 글도 없다.
이때 남편이 사상범으로 교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고 들었다. 옥바라지를 위해서 대구로 나왔다고 했다. 최근에야 1970년도에 남편이 출옥하자 바로 서울로 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대구에서 잊혀진 이유를 알았다.(50년도 더 전이다.)
후대의 여러 여자 수필가님들이 나오셔서(주로 1980년 대 이후에 영남수필문학회에서 활동하신 여류 수필가님들) 대구 여성문단의 대부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나는 이화진, 이분이야말로, 대구 수필문단에서 기려주어야 할 분으로 생각한다. 특히 대부역할만 할 것이 아니라. 선배 문인이신 이화진 선생님을 조명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워낙 초창기의 글이라서, 문장에 한문 술어가 많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안동지방에서 대유행을 한 내방가사에서 현대 산문으로 옮겨오는 과정의 글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사의 문장 차원에서도 내방가사의 운문적 문장에서 현대의 산문 문장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서, 즉 연결하는의미 있는 역할을 하신 분이다.
안타까운 일은 지금은 대구서 이화진 선생을 기억하는 분이 거의 없다. 내가 자료를 구하려 여기저기 수소문해보았으나, 안동분도, 대구분도 한결같이 모른다고만 했다.
어쨌거나 나는 수필문학사에 이화진이란 분의 이름을 어떻게 하면 남길까 하여 자료를 모우는 중이다. 많은 자료가 모여지기를 바란다.
1991년에 자제분들이 어머니의 고희 기념 문집으로 ‘殘火의 章’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도 1970년 이후의 작품은 없다.
다만 70년 이후에 아들, 며느리에게 쓴 편지가 몇 점 실려있다. 그 편지 중의 하나를 여기에 옮겨 오겠다.
자녀분이 쓴 글을 보니, 1955년에 쓴 시가 있었고, 아마도 이것이 여사의 첫 문학활동이 않나 싶다. 그리고 1970년 이후는 편지글만 전한다.
어머니 글이 집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옛날 신문과 잡지를 뒤적였다고 하니. 발표한 글을 집에 보관하는 노력이 있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며느리에게 쓴 편지는 있었다. 여기에 옮겨 보겠다.
‘내 사랑하는 맏며느리에게’
하찮은 무슨 원고를 긁적거리고 있자니 문득 새 사람 편지 받아 읽고 한참이나 눈물에 가려 멍하니 있었다. 이토록 내 착한 下手들을 두었는데 무슨 근심과 걱정이 있으랴. 새삼 힘이 부쩍 나는구나.
그 지긋지긋한 직장의 피로도 채 풀지 못하고 날마다 도시락 반찬을 걱정해아하는 가난한 집 며느리, 너 박윤애, 비록 비옥한 사랑으로하여 장정수의 아내가 되었지만 고달픈 너희 일상이 눈에 선해서 정말 안쓰럽구나. 그러지 않아도 며칠 전에 꿈을 꾸니 너희 내외가 하도 피로해 보여 꿈속에서 붙들고 싫컷 울다가 너희 시아버지가 깨우는 바람에 깼는데, 내 꿈은 좋은 것은 몰라도 나쁜 것은 이상하게도 잘 적중하는지라. 그래서 늘 걱정했지. 이런저런 고생과 걱정이 있더라도 툭 털고 꼭 영양을 섭취하도록 해라.
--중략--
시아버지 사업은 이런저런 곡절을 겪고 지난 밤에야 겨우 합의가 되어 또그 사람과 재출발하는 모양이다. 사업자체가 유망하니까 계약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 같다. 그 결정에는 새사람의 편지 구절이 시아버지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한 것이라고 본다. 명년이면 그런데로 형편이 좀 나아지겠지.
--중략--
하도 어려운세월을 힘들게 살아온 나인지라 큰 말은 할 수 없으나 좀 어렵더라도 우리 정수가 대학교수가 되는 것을 너만큼이나 바란다. 그 사람은 성격이나 자질이 교육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믿으며 그길로 가는 것이 제일 무난하고, 보람있게 일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우리 함께 힘과 정성을 모아 대학 캠퍼스의 한적한 연구실에서 젊은 세대를 이끄는 그런 진짜 ‘선생님’으로 한번 만들어 보자. 너 같은 착한 아내를 얻었으니 그렇게 되려고 그 사람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중략--
우리 새사람은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첫걸음에 고생만 호되게 했구나. 부디 집은 가난할지라도 새사람 편지에서처럼 남편은 방에서 기타를 치고, 아내는 부엌에서 노래하는 그 순간적인 행복이라도 자주 가져서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도록 하여라.
--중략--
오늘은 화창한 봄날이다. 너희들과 가까이 있으면 어디 도시락을 싸들고 산으로ㄹ라도 함께 가고 싶구나. 그럼 잘 있거라.
1974년 5월 20일, 시어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