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정치의 인질이 된 한국, 일본처럼 망한다!> | |
작성자 : 바닥사람 | 2013-07-27 17:38:47 조회: 101 |
<낡은 정치의 인질이 된 한국, 일본처럼 망한다!> [인터뷰] 녹색전환연구소 시작한 김종철 이사장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_facebook.asp?article_num=50130725093717
"낡은 정치의 인질이 된 한국, 일본처럼 망합니다!" [인터뷰] 녹색전환연구소 시작한 김종철 이사장
기사입력 2013-07-26 오전 6:49:23
요즘 그는 한 남자에게 푹 빠져 있다. 스페인에 있는 인구 2700명의 작은 도시 마리날레다의 시장 산체스 고르디요가 그 주인공이다.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재정 위기는 '관광 대국' 스페인의 시민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실업률이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심지어 생계를 잇기도 어려운 이들까지 늘었다. 하지만 고르디요가 1979년부터 34년째 시장으로 재직 중인 마리날레다와 그의 시민만큼은 이런 고통을 피했다.
기적은 이렇게 시작됐다. 애초 스페인은 일부 특권층과 가톨릭교회가 대지주 행세를 하면서 광활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고르디요는 시장의 신분으로 시민과 함께 그렇게 대지주들이 소유한 지역의 땅을 불법으로 점유하는 투쟁을 12년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열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4년마다 선거에서 시민은 절대 지지를 보냈다.
고르디요와 마리날레다 시민의 싸움이 전국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스페인 정부는 결국 이들이 불법 점유한 땅을 정부가 주도해 공유지로 전환했다. 고르디요와 마리날레다 시민은 이 공유지에 집도 짓고, 농장도 만들었다. 이 집은 자식에게 상속할 수는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공동 농장의 이익은 개인이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 재투자한다.
이곳에는 경찰도 없다. 고르디요와 마리날레다 주민은 시 소속의 마지막 경찰이 정년퇴직하자, 치안 조직을 자체적으로 꾸리고 경찰 예산을 학교를 짓고 거리를 정비하는 데로 돌렸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레드 선데이(Red Sunday, 붉은 일요일)'에는 마을 주민이 울력해 노인의 집을 수리하거나, 도로 정비 등 마을의 대소사를 해결한다.
스페인 정부 입장에서는 주류 질서와 선을 긋는 마리날레다가 눈엣가시다. 하지만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이 마리날레다와 고르디요의 실험에 스페인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탓이다. 심지어 마리날레다 시는 중앙 정부로부터 10퍼센트의 재정 지원도 받는다. 자본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새로운 실험이 진행 중인 것이다.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새로운 정치, 새로운 질서는 바로 이런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10일 출범한 녹색전환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프레시안협동조합 고문)은 고르디요와 마리날레다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녹색전환연구소가 바로 이런 국내외 곳곳에서 진행 중인 상상력에 기반을 둔 실험을 갈무리해서 소개하고 또 구체화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녹색전환연구소는 지난 4·11 총선에서 처음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 녹색당과 불가분의 관계다. 비록 녹색당은 득표율 2퍼센트를 얻는 데 실패해 등록 취소되었고, 당명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때 모인 당원은 여전히 '녹색당 더하기(녹색당+)'로 활동 중이다. 총선에서 녹색당을 지지한 10만3811명의 지지자도 소중한 자산이다.
녹색전환연구소는 비로 이런 10만3811명의 녹색 전환의 열망을 담아서 녹색당 언저리에 모인 이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연구 기관이다. 김종철 발행인이 이사장을, 이상헌 한신대학교 교수가 소장을 맡았다. 현재 녹색전환연구소는 회원과 후원자를 모집 중이다. (문의 : 02-737-1711)
1991년 <녹색평론>을 시작하며 한국 사회에 녹색의 씨앗을 뿌린 김종철 발행인으로서는 22년 만에 새로운 실험을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등 떠밀리듯이 맡은 자리"라며 인터뷰 요청에 손사래를 치던 김종철 이사장에게 녹색전환연구소의 비전을 물었다.
▲ 김종철 녹색전환연구소 이사장(<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삼성경제연구소에 대적하는 녹색 싱크탱크
프레시안 : 먼저 녹색전환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한 걸 축하합니다. 김종철 선생님께서는 수년 전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삼성경제연구소에 대적하는 녹색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강조했었죠. 이번 녹색전환연구소의 창립은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라고 봐도 될까요?
김종철 : 먼저 확실히 해 둬야 할 게 있습니다. 제가 이사장직을 맡기는 했습니다만, 녹색전환연구소는 한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고민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소는 방금 출범선언을 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더 토론하고 의논해봐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 제 얘기는 합의된 공식 의견이 아니라 아직은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프레시안 : 녹색전환연구소는 애초 녹색당의 부설 연구 기관으로 기획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종철 : 녹색당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녹색전환연구소를 녹색당 부설 연구소라고 못 박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요. 앞으로도 녹색당과는 긴밀한 제휴 관계를 유지하되, 열려 있는 연구소로서의 위상을 정립했으면 합니다. 다시 말해서, 녹색전환연구소에서 나온 좋은 아이디어나 정책은 비단 녹색당뿐만 아니라 다른 정당에서 활용해도 좋다는 거죠. 누가 주체가 되든지 우리 사회를 좀 더 녹색적인 사회로 변화시키는 게 중요하니까요.
사실 저는 녹색당만큼이나 녹색전환연구소의 역할은 앞으로 굉장히 중요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조금 전에 삼성경제연구소 얘기도 나왔지만, 지금 대기업이나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는 소위 엘리트 싱크탱크들은 전부 기득권층의 이익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논리를 밤낮 없이 생산해 내고 있죠. 거기다가 근본적으로 낡은 성장 담론에 붙들려 있는 반생태주의자들입니다. 완전히 시대착오적이죠. 이런 성장 지향 논리, 사상, 신념으로는 지금 인류 사회 전체가 직면한 환경 위기와 자원 고갈, 경제 공황, 민주주의의 위기는 물론이고, 빈부 격차나 고용 문제, 복지 및 교육 문제 등 우리 사회가 당면한 현안을 어떤 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녹색전환연구소가 만들어진 이유는 바로 이런 흐름에 대항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 어떤 시대에 처해 있는지 정확히 읽고, 지금까지 세계와 우리의 삶을 망가뜨려온 구태의연한 성장 논리로는 절대로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를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굉장히 다급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지금 녹색전환연구소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아무 힘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 예민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비록 미약한 힘이지만 함께 지혜를 모우고 궁리를 하다보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으로 연구소를 결성한 것이죠. 우선 국내외에 걸쳐 광범위하게 좋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수집, 분석, 정리, 공유하는 정보 자료 센터를 목표로 하여 집중하다 보면, 차차 자리가 잡히면서 활동 내용이 보다 풍부하고 넓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정보 자료 센터, 너무 소박한 목표 아닌가요?
김종철 : 솔직히 말하면, 현실적인 목표죠. 현재 녹색전환연구소의 물질적 기반은 아무것도 없어요. 아직 사무실도 없고, 상근자도 없습니다. 이런 형편에, 예를 들어, 박사 학위 소지자를 몇 백 명씩이나 확보하고 있다는 삼성경제연구소 따위를 모방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야죠. 그러니까 우선 인터넷 같은 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연구하거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수집·축적하면서 일반 시민들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거죠.
그리고 정보 자료 센터로서 제대로 기능을 한다면, 그 힘은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났을 때, 시민들이 믿고 의지한 것은 도쿄전력이나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학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명한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 선생이 생전에 대학 교수를 그만두고 독립적으로 만들었던 '원자력자료정보실'이었습니다. 녹색전환연구소는 물론 핵 발전의 문제만 다루는 곳은 아니지만, 녹색 사회로의 전환을 꿈꾸고 기대하는 시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도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될 겁니다.
프레시안 : 그간 20년 넘게 <녹색평론>이 해온 역할을 확대하는 걸로 봐도 될까요?
김종철 : 두 달에 한 번씩 <녹색평론>을 내긴 했지만, 한계가 명백했지요. 격월간지라는 공간이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은 매우 제한적이었죠. 개인적으로 제가 접하는 중요한 자료의 10분의 1도 소화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늘 있었습니다.
잡지 발간과 연구소의 일은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앞으로 녹색전환연구소 덕분에 <녹색평론>을 통해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독일 녹색당의 싱크탱크인 하인리히 뵐 재단이나 부퍼탈연구소 등 외국의 중요한 연구 기관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연대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봅니다. 원래 녹색의 논리와 가치는 국제주의적인 것입니다. 어떤 한 나라에 한정된 게 아니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실천, 논리, 방법에서 배울 것은 배우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모든 문제가 다 그렇지만, 특히 생태 환경 위기와 경제 위기는 일국 차원에서 절대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계 전역의 양심적인 인간들이 활발히 대화를 하면서 지혜를 모아야죠. 보세요. 세계를 이 지경이 되도록 망쳐놓은 장본인인 소위 엘리트들, 기득권자들은 국경을 맘대로 넘나들며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온갖 책략을 꾸며내고 있잖아요. 거기에 맞서서 세계의 풀뿌리 시민들이 어떤 형태든 대항할 수단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안철수의 '내일'은 낡았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녹색전환연구소는 아무래도 녹색당에서 최초로 발의한 연구 기관이니, 기존 정당 부설 연구 기관도 의식했을 듯합니다.
김종철 : 하기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기성 거대 정당들, 예컨대 새누리당의 여의도연구소나 민주당의 민주정책연구원은 막대한 국가 보조금으로 운영됩니다. 그런데 그 연구 기관들이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여의도연구소는 수구 세력의 영구집권을 노리고 뭔가 끊임없이 책략을 꾸미고 있을 텐데, 한심한 것은 거기에 대항해야 할 민주정책연구원입니다. 제가 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민주당이 꼭 선거 때 임박해서 정책과 공약을 개발한다고 부산을 떠는데, 평소에 그 연구소에서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하는 거예요. 말이 정당 부설 연구소이지, 정치 건달들 집결처가 아닌가 싶어요.
녹색당은 현실적으로 미약한 존재이고 또 녹색전환연구소는 이제 갓 출범했지만, 정당의 싱크탱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된 모델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기존 거대 정당, 거대 연구소를 부끄럽게 만들고 싶어요.
프레시안 : 공교롭게도 안철수 의원의 싱크탱크 '내일'과 활동 개시 시점이 겹칩니다. 또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그곳 이사장이라서 어쩐지 비교를 하게 되는데요. (웃음)
김종철 : 안철수 의원은 아직 정당도 없잖아요. (웃음) 녹색전환연구소가 '내일'이라는 연구소와 비교가 된다면, 경쟁을 제대로 한번 해봐도 좋겠네요. 그러나 저는 '내일'이라는 연구소가 표방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사상과 비전이 될 수 있는지 큰 의문입니다. 하기는 그분들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녹색당도, 녹색전환연구소도 만들지 않았겠죠.
제가 보기에,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열기에는 너무 낡은 이념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념은 기본적으로 산업 경제가 확대·팽창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성립된 정치사상인데, 이제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시대는 오지 않거든요. '새로운 정치'를 지향한다면서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다가올 미래를 현재의 단순한 연장으로만 이해하고, 구태의연한 문법에 매달려 있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러워요.
정말로 새로운 정치를 염두에 둔다면, 최소한 탈성장 시대에 걸맞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어떤 것일지, 어떤 방향으로 가는 게 바람직한 것일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진보적 정치 세력이 대체로 생각하는 게 북유럽 모델의 복지 국가 체제인데, 그 복지 국가 모델도 결국은 계속적인 경제 성장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모델이지 지금 당장 좋아 보인다고 덮어놓고 선망하거나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은 결코 아니죠.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지구 온난화가 초래할 기후 변화, 자원 고갈, 환경오염, 에너지 위기, 핵발전소 사고 등으로 세계의 산업 경제 시스템은 지금 근원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인류 역사에서 아주 특수한 시기였던 19~20세기 동안의 번성했던 경제 성장 시대가 앞으로도 무한정 계속될 것이라는 막연한 전제 위에서 무슨 무슨 정치를 논하고 있는 모습은 적어도 제 눈에는 너무도 한가로워 보입니다.
바닥 드러낸 민주당-진보 정당
프레시안 :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겪고도 국내에서는 기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찾아보긴 어렵습니다. 물론 외국의 형편도 그다지 좋지는 않습니다만.
김종철 : 1997년 외환 위기 때도 김대중 정부는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깊게 이해를 하지 못했어요. 그러면서 그냥 IMF가 시키는 대로 알짜배기 공기업과 은행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면서 겨우 그 위기를 헤쳐 왔어요. 지금으로서는 통탄할 노릇이지만, 어쨌든 당시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햇볕 정책을 써서 남북 관계를 화해·협력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실질적인 성과를 낸 것은 큰 역사적인 업적이죠.
하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노무현 정부였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시행착오를 보고 나서 출범했는데도, 별로 배우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남북 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일에도 별로 열의를 보이지 않다가 임기 마지막에 실효도 없는 남북 정상 회담을 했을 뿐이죠. 경제 정책에서는 김대중 정부보다 한 술 더 떠서 미국식 시장원리주의 논리를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결정적인 패착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었습니다. 진보적 경제학자들까지 그렇게 반대했지만, 그냥 밀어붙였죠. 보수 진영에서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자기들이 할 만한 일을 대신해 주니까 너무 뜻밖이었죠.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결과를 나은 노동 정책도 중요한 과오였지요. 선의에서 시작한 일이었겠지만, 정책이 미칠 파장에 대해서 사전에 주도면밀한 종합적 계산이 없었던 거죠.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 파산 사태가 바로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노무현 정부가 '금융 허브'니 서비스 중심의 세계화니 하면서 미국과 시장 통합을 추진한 것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 정도로 세계 경제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몰랐을까 지금 생각해도 개탄스럽습니다. 이미 국내외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조만간 '거품이 터질 것'이라고 계속 경고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런 실패들이 수구 세력이 재집권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진보 세력이 대중의 신망을 잃는 사태를 불러온 거죠. 수구 보수 정권들은 아무리 잘못해도, 원래 그러려니 쉽게 넘어가면서도, 진보 세력의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이 용서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아요.
프레시안 : 여전히 그런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이 보인 모습은 그 증거겠죠.
김종철 :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내세웠던 게 '경제 민주화'입니다. 그런데 정작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 명확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어요. 재벌 기업의 계열사 간의 순환 출자를 금지하고, 하청 업체를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정도는 새누리당도 얘기하는 거였거든요. 물론 선거 후에는 흐지부지되고 있지만.
비록 민주당이 원래 뿌리가 보수적인 정파라고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서는 야당이고, 집권세력에 대적해서 권력을 쟁취하겠다면, 좀 더 근본적인 개혁 방안을 내놓아야죠. 하기는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정의당(정의당) 등, 진보 정당들도 무엇 때문인지 소심하긴 마찬가지였죠. 훨씬 더 급진적인 얘기를 했어야죠.
진보 정당이라면 당장 권력을 잡을 전망은 없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거 기간 동안에 국민들이 현재 상황에서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그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한 설명을 했어야죠. 그게 민주 사회에서 선거가 가진 중요한 의의의 하나인데도, 뭘 조심한다고 그러는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잖아요.
지난 대선을 보면서, 민주당이나 진보 정당의 실력에 심각한 회의를 가지게 됐어요. 이들은 지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문명사회가 어느 단계에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이해도 없고, 관심도 없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늘 낡은 레코드만 반복해서 틀면서, 기껏해야 재벌 기업이 노동조합 결성을 허용해야 한다는 둥, 소극적인 발언이나 하고 있는 거죠.
물론 지금 녹색당이나 녹색전환연구소가 이 모든 질문에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실력이 된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한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과 아예 그 인식도 없다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후쿠시마+3, 망해가는 일본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할 때의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일본인 것 같아요. 21일 참의원 선거 결과도 참담합니다.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동아시아의 문제아' 아베 신조 정권이 최소한 3년간의 장기 집권의 길이 열렸습니다.
김종철 : 제 생각으로는 이대로 가면 일본은 조만간 망합니다. 후쿠시마 사태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몇 백 년이 지나더라도 수습되지 않을 것입니다. 방사성 물질이라는 게 보이지 않고, 또 지금 당장 피해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서 그렇지 몇 백 년 이상 방사성 물질이 계속 이대로 나오면, 일본 영토 전부와 해안은 전부 방사성 물질로 오염되어 인간의 거주가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 기업이나 외교관들은 도쿄를 떠나서 간사이(關西)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하잖아요. 갈수록 심각한 상황이 될 겁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의 보통 사람들의 기분이 어떻겠어요?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잖아요. 대다수는 마음속으로 굉장한 불안과 우울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 대해서 정상적이고 건전한 사회라면, 정치가 책임을 지고, 그동안의 에너지 정책을 비롯해서 사회 경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향 전환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되는데, 지금 일본 정치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죠. 질 낮은 정치가 가장 흔하게 쓰는 수법, 즉 대외적 적대감을 부추김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그쪽으로 분출시키면서 파시즘 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잖아요.
일본이 저렇게 가면 결국 동아시아 전체가 괴로워지고, 희망이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걱정입니다. 일본이 저 못난 짓을 계속해서 얻으려는 게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저런다고 한국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것도, 중국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끊임없는 영토 분쟁,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전쟁을 하면서 군비 경쟁 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굽니까? 일본 국민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레시안 : 일본에서는 전 국민의 20퍼센트 정도인 2200만 명 정도가 생활협동조합 조합원입니다. 그들의 가족까지 염두에 두면 1억2000만 명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가 생활협동조합 네트워크에 포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풀뿌리 생활협동조합이 저런 현실을 바꾸지 못할까요?
김종철 : 저도 예전에는 산업 사회는 망해도 일본 민중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죠. 바로 일본이 세계 최대의 생활협동조합 국가라는 점 때문예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면, 일본의 생활협동조합 운동에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정치를 외면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공간 속에 갇혀왔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군국주의적 세력의 재등장을 허용하는 사태가 된 게 아닌가 싶어요.
후쿠시마 사고 후에 일본에서도 녹색당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지식인 몇 명만으로 구성된 결사체일 뿐입니다. 후쿠시마 사고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일본 시민들이 기성 정치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한 정치세력을 형성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죠.
그래서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 녹색당 실험이 성공해야 할 것 같아요. 한일 양국의 녹색 세력이 더욱 활발히 연대해야 하고요. 사실 지금 일본 사람들이 동해안의 한국 핵 벨트에 제일 민감합니다. 만약 동해안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일본이 직격탄을 받게 돼 있으니까요.
프레시안 : 마치 중국 산둥 반도의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나면 정작 중국 본토보다 한국의 수도권이 초토화될 가능성이 큰 것과 비슷하군요.
김종철 : 그렇죠. 그러니까 녹색당이나 녹색전환연구소의 활동은 한국만의 녹색 전환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걸치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봐야죠.
남북 관계, 햇볕 정책을 넘어야
프레시안 : 당장 남북 관계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북한의 노동이나 지하자원과 남한의 자본과 과학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한반도의 성장을 도모하자는 햇볕 정책의 비전도 이제는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보수 세력의 공격도 공격이지만, 햇볕 정책 역시 여러 가지 약점을 보인 것 같거든요.
김종철 : 남북 문제 역시 녹색전환연구소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원점에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겠죠. 지금 북한은 남쪽 사람들에게 신용을 다 잃었어요. 심지어 20~30대는 아예 남북 문제에 관심도 없고, 통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성세대는 감정적인 통일론 아니면 경제적 도약을 위해서 통일이 필요하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논리를 말하고 있는 게 고작입니다. 수구 세력은 늘 분단 상태에서 이익을 누려왔으니까 이 체제가 변경되는 것을 바랄 리 없겠죠. 전쟁을 해서라도 북한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일부 극우파의 광적인 주장도 있고요.
그런데 우리가 원한다고 통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소위 전문가들끼리만 아니라 널리 공개적인 차원에서 치열한 토론이 활발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막히면 돌아가서,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라고 했잖아요. 요즘 어디서 보니까 북한에서 중국으로 도피한 탈북 여성들의 인권 유린 사태도 매우 심각하다고 합니다. 중국 관헌의 단속을 피하려고 하다가 결국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이 많다죠.
이런 참혹한 상황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지 발본적인 사고와 행동의 전환이 시급한데, 지금 남한의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지식인의 수준을 보면 암담합니다. 시스템 개혁도 필요하지만, 우선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인간으로서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싱크탱크에 맞서는 안티-싱크탱크
프레시안 : 이런 고민을 먼저 해나갈 이들이 이른바 '지식인'일 텐데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감사원 감사 결과로도 드러났지만, 혹세무민하는 전문가의 문제가 도를 넘어선 것 같아요.
김종철 : 지난 10일 녹색전환연구소 창립 모임에서 제가 농담 반으로 얘기했어요. 싱크탱크(Think Tank)라는 것은 본래 '탱크' 만드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아서 탱크 만드는 사람들의 권력과 부를 더 크게 만들어 주기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싱크탱크가 아니라 기존 싱크탱크들에 대항하는 안티-싱크탱크가 되자고 했어요. (웃음)
절반은 농담으로 한 얘기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죠. 실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밤낮 없이 몰두하고 있는 일이라는 게 불의(不義)하고 부정(不正)한 질서를 지속시키기 위한 논리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이들 개인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죠. 학자나 연구자 생활을 하려면 정부와 기업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는 연구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 자의적이든 아니든 노예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이나 정부가 하는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 학자, 전문가, 지식인이 이의를 제기하고 명확히 '아니오' 라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냅니까? 지난번에 4대강 공사가 결국 대운하 공사였다고 감사원이 발표하는 것을 보면서, 참 허망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그동안 정말 몰랐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다 알고 있으면서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고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연 생태계가 철저히 파괴되고 있는데도 협조하고 방관해온 게 이 나라의 학자, 전문가, 지식인들입니다.
요 전번 <프레시안>에서 이동걸 전 금융연구원장의 인터뷰를 읽었어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원래 좌파도, 진보파도 아니고, 매우 성실한 보수 경제학자인데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는 사실 때문에 정부와 재계는 물론이고 자신의 동료들한테서도 따돌림을 받고 고생을 한다는 이야기잖아요. (☞관련 기사 : "삼성과의 싸움이 시작된 순간, 모두가 내 적이 됐다")
이런 지적, 정신적 풍토는 결국 사회 전체에 도덕적 마비 혹은 황폐화를 가져다 줄 뿐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상황에 균열을 내서 양심적인 학자, 지식인들이 안심하고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연구소가 그런 공간의 형성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프레시안 : 녹색전환연구소의 실험이 성공하길 빌겠습니다.
강양구 기자 @@@<노동>-21세기 성경공부 노동은 분명히 인간 존재와 관련된 활동입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소명을 받을 때 이미 노동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동은 행복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책벌과 불행의 원천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노예로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 인간다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재의 세계 정치체제에서는 인간 노동에 대한 착취가 인간을 점점 더 불안정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실업, 반실업, 노예노동이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노동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셨는지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수’라고 번역하는 ‘텍톤’(마르 6,3)이라는 직업은 어떤 직업이었을까요? 마태 13,55에서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나자렛과 같은 가난한 읍내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거리들이 있었을까요? 갈릴래아와 같은 농촌 지방에서, 예수께서는 농사를 짓지 않으셨을까요? 당신의 너무도 순박한 농촌 언어와 어휘 구사는 당신이 농민이었음을 가리키고 있지 않을까요? 겐네사렛 호수와 같은 호수 근처에 살면서 어부와 비슷한 생활을 하지는 않으셨을까요? 이상은 추측일 뿐, 복음서들은 노동자로 본 예수님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고 하신 말씀도 다른 의미와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당신과 협력하라고 사람들을 부르실 때, 직업까지를 버리라고 요구하셨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생계수단,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참조. 마르 1,18.20). 예수께서는 또한 당신 제자는 노동을 면제받는 것처럼 암시하면서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10)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와 들꽃을 눈여겨보라고, 그것들은 심지도 거두지 않아도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린다고 말씀하실 때도 또 다른 맥락에서 말씀하십니다(참조. 마태 6,26-29). 바오로의 제안 바오로와 그밖에 선교사들은 노동하는 세계 속에서 복음을 생활화함으로써 독특한 복음화 형태를 시작해 놓았습니다. 노동함으로써 복음화하고 복음화하면서 노동하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상황 앞에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상황은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대도시에서의 제안과 착취당하는 변두리에서의 제안은 각기 달라야 합니다. 각기 다른 시대, 장소, 공동체에서 복음전파자들은 쇄신을 꾀해야 합니다. 바오로는, 자기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그리고 자기 기록물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지칠 줄 모르는 노동자로서 제시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오로는 못이 박힌 자기 손바닥을 자랑하고 그 손바닥을 자기 설교가 진실하다는 증거로서 제시합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지도자들과 작별할 때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사도 20,34)고 말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은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의 생활에서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궁핍한 처지에서 쉴 새 없이 일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1테살 2,9; 참조. 2테살 3,8) 손수 하는 노동 이 문제에 관한 바오로의 여러 본문에서는 손수 하는 노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코린 4,12에서는 “우리 손으로 애써 일합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의 제안은 노동 일반을 가리키지 않고, 특히 육체로 직접 하는 노동을 가리킵니다. 왜 육체로 직접 하는 노동을 그렇게 강조할까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육체노동을 천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리스 사고방식에서는 육체노동은 노예들이나 하게 되어 있는 천한 활동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설교가들은 직접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그 육체노동을 높게 평가하려 했던 것입니다. 바오로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과 같이, 시간과 인내와 육체적 노력을 요구하는 어려운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천막을 짜는 사람으로서 바오로는 분명히 엄청나게 넓은 천을 짜야 했을 것입니다(참조. 사도 18,3). 이 노동은 손바닥이 부르트고 허리가 휘고 눈도 피로하고 위생적으로 좋지 않은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노동할 필요성과 권리 바오로가 아퀼라, 프리스킬라, 실바누스, 데모테오 등 다른 선교사들과 더불어 노동의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복음화하기로 선택한 다음과 같은 아주 깊은 동기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화하는 일’ - 설교가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가 됨으로써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됨으로써 그들의 필요를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로마 제국의 체제 안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방향 설정을 통하여, 대안적인 상황을 창조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노동을 했습니다.”(1테살 2,9)고 회상합니다. ‘귀감이 되는 일’ -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노동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권하기 전에, 스스로 노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2테살 3,9)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전통적인 생활방식, 처신입니다(참조. 2테살 3,6). ‘권리를 포기하는 일’ - 바오로와 그의 협력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었습니다. 즉 복음을 선포하는 대가를 받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1코린 9,12; 참조. 9,15-18)고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권리 행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설교가들과 철학자들은 보수를 받고 설교나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그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설교 체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참조. 1코린 9,6; 2테살 3,9). 이 실천은 자연스럽게 복음에 많은 신빙성을 주었습니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일’ - 공동체들은 넉넉하지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그 공동체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밤낮 땀 흘려 수고하면서 노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2테살 3,8; 1테살 2,9; 2코린 12,13-14). ‘생활비를 스스로 버는 일’ - 더 직접적인 동기는 노동한 대가로 사람답게 사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수고로 자기 생활비를 버는 떳떳함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참조. 1테살 4,11-12). 바오로 자신도 스스로 노력해서 먹고 사는 것을 영예롭게 여깁니다(1코린 9,15). 인간의 생존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노력과 노동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마라.”(2테살 3,10)는 규범을 줍니다. ‘가난한 공동체들과 더불어 노동하는 일’ - 바오로의 편지들에서 말하는 노동은 항상 힘들고 모진 노동입니다. “우리는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2테살 3,8). 이미 말한 것처럼, 육체노동은 모진 노동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몫입니다. 1코린 4,11-12; 2코린 11,7-12; 사도 20,33-34에서 그런 노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들에서는 재산 모으는 일에 대한 무관심이 주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누는 일’ - “도둑질하던 사람은 더 이상 도둑질을 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애써 좋은 일을 하여 곤궁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에페 4,28) 나누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서 본질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참조. 사도 20,35) 친교가 생겨나고 형제적이고 그리스도다운 생활 방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 바오로와 그의 협력자들은 자기 생활 방식과 가르침을 통하여 노동과 관련한 새로운 실천과 새로운 영성을 만들어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노동을 노예들이나 할 일로 여겼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그런 생각을 뚜렷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복음전달자들은 노동자들을 만나러 가고 또 다른 노동자들과 더불어 노동을 하여 스스로 노동자가 됨으로써 그런 생각을 깨부쉈습니다. 이 제안은 실제로 도전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을 만나러 가도록 자극하고, 그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세계 사람들과 자기네 자신을 동일화하고, 그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교 가르침을 생활화하고 설파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공동체들의 생활 방식은 로마 제국의 기존 질서를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맹렬한 박해를 스스로 불러들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은 오늘날 우리의 기존 질서, 힘없는 사람들을 등쳐먹는 불의한 사회 체제 앞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새로운 입장을 취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그리고 아퀼라, 프리스킬라, 실바누스, 티모테오, 루카 기타 선교사들은 노동자 세계 속에서 노동자들과 더불어 노동을 하고 동고동락하는 가운데 복음을 생활화하면서 새로운 영성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노동자들의 세계 속에서 노동자들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설파해야 합니다. 그들의 새로운 영성은 로마 제국의 탄압에 항거하면서 변혁을 이룩하는 깊은 신앙을 창조했습니다. 이제 변혁의 핵심은 소비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을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가는 사람들입니다. |
2013-07-27 17:38:47 123.214.95.1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