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상처다 (외 2편)
나종영
꽃은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상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꽃은 꽃잎의 이면에 비밀스레 감추어진 눈물샘과 아린 상처로 인해 꽃들은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상처가 많아야 더 진한 향기를 내뿜는 못난 모과나무도 지나가는 어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하찮은 고용나무 한 그루도 지난 시절 정말 눈부신 꽃을 피워냈으리 지금 피어나는 모든 꽃들은 우리가 이겨내지 못한 상처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꽃은,
다시 매천을 읽다
시월 남실바람에 물비늘 치는 저수지 둑에 홀로 앉아 매천 시편을 읽는다 저만치 소나무 숲 아래 초당에서 매천은 벗들과 밤새워 바둑을 두고 마지막 술잔을 주고받았을까 초승달도 기울어 어두운 새벽 선생은 절명시를 짓고 나라 잃은 울분에 아편 부은 독배를 들었으리라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던* 옛 선생도 절의를 지키려 목숨을 버렸건만 세상은 꺾이고 어지러운데 시인들은 죽고 말장난 거짓 시들만 넘쳐 푸른 대나무도 고개를 떨구나 보다 사람도 시대도 훼절하는데 언제까지 오지 않는 낡은 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저물어 안개 내려앉는 물가에 앉아 맨가슴을 다지며 다시 매천을 읽는다 시편을 넘기는 손끝이 아리다. * 매천 황현이 망국의 울분에 자결하던 날 새벽에 썼던 절명시의 한 구절 푸른 자전거 자전거를 타고 싶다 자전거 짐발에 희망을 가득 싣고 맨발에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너에게로 가고 싶다 푸른 잎 물푸레나무 숲길을 달리면 자전거는 마디마디 푸른 자전거가 되고 붉디붉은 황톳길을 덜컹거리면 자전거는 붉은빛으로 물이 들어 들썩이는 엉덩이에 바람을 힘껏 밀어 올릴 것이다 은빛 바큇살에 햇살이 튀고 하얀 맨발이 보이지 않게 자전거를 몰고 까치고개를 넘어 너에게로 가고 싶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숨차게 달렸던 이끼 낀 낮은 돌담과 키 작은 빨간 우체통이 서 있던 서내동 고샅길 다독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면면한 아픔도 영산강 강물 따라 씻겨가던 마을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내 마음 고향집을 찾아 느릿느릿 너에게로 가고 싶다 푸른 모자 차양을 돌려쓰고 짐발에는 누비이불 같은 행복을 싣고 너에게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고 싶다 저물 무렵 일몰의 노을 속으로 은빛 자전거 하나 하염없이 바퀴를 굴리며 가고 있다.
―시집 『물염勿染 의 노래』 2024.10 --------------------- 나종영 /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 1981년 창작과비평사 13인 신작시집 『우리들의 그리움은』으로 등단. 1980년 대 ‘5월시’, ‘시와 경제’ 동인으로 활동. 2005년 9월 광주•전남 지역 최초의 종합문예지 《문학들》을 지역 문인들과 함께 창간하여 지금까지 76호를 발행. 시집 『끝끝내 너는』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물염의 노래』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