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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사랑모임 (상주의 모든 시민이 이웃사촌이 되는 그날까지)
 
 
 
카페 게시글
│★상주언론들의소식들 스크랩 상주풍경사진 귀후재 이야기
황인석 추천 0 조회 104 10.12.20 2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귀후재(歸厚齋)
소 재 지 :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 37(관촌)
(원소재지 : 경상북도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 37번지 )
건 축 주 :  장수황씨 소윤공파 후손
소 유 자 :  황갑주


건축 이야기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서 신중하게 예를 다하고, 이미 죽은 조상께 추모를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간다.’란 의미를 가진 이 재실의 이름이 ‘귀후재’이다.
장수황씨 가운데 상주의 입향조는 바로 황희 정승의 둘째 아들인 통정대부 이조참의인 황보신(黃保身)인데, 이 분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해서 묘 아래에다가 재실을 만들게 된 것이다.


건축 구성
전체배치는 앞면의 솟을삼문으로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양익사가 마주하고 북쪽으로 재실이 전체적으로 튼 ㅁ형을 하고 있다.
재실은 정면 4칸이고 측면은 2칸 반 규모에 전퇴 5량가의 민도리팔작집이다. 평명은 중앙 2통칸 마루방에 온돌방을 붙인 중당협실형이고, 앞면에는 두리기둥과 툇마루를 놓았다.
온돌방 측면에는 쪽마루를 놓아 툇마루와 연결시키고 난간을 세웠다. 양익사는 정면 4칸이고 측면은 1칸에 3량가를 얹은 맞배집이다..
평면은 왼쪽부터 정지-온돌방-마루-온돌방으로 되었고 마루는 방으로 개조되었다.
전면의 대청 앞에는 반칸 정도의 덧마루를 더 내어 시설한 특이한 구조이며, 양 온돌방 앞의 툇마루 난간에는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문중 이야기
- 종가 이야기
귀후재(歸厚齋)는 소윤공 묘소의 재실이다. 귀후재의 당호는 ?논어? ?학이?편에 증자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서 신중하게 예를 다하고, 이미 죽은 조상께 추모를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간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약 350년 전에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최근 2007년 음력 10월 10일에 적국 각처에 거주하는 후손 70여 명이 모여 시제를 봉행하였다. 이곳에는 소윤공(少尹公) 묘소와 후손 열 분의 묘소가 있어서 이날 시제를 이어서 모셨다. 시제의 주관은 도감이 하는데 도감은 소윤공 시제를 주관하고 초헌관으로 봉행한다. 도감제를 둔 사연은 소윤공의 종손이 계시지 않은 데서 연유하였고 시제의 전 해에 도감을 천하며 각 분파의 원로들이 번갈아 봉행하는 관행이 되어왔다. 금년에는 축옹파의 후손 국연이 도감의 천을 받아서 시제를 봉행하였다.
현대의 인물가운데 가문을 빛낸 분은 황진하(黃震夏) 국회의원이 있다.

 

관련인물
-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 황보신(黃保身)
방촌 황희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중전(仲全)이다. 1401년 한양의 석정리 집에서 태어났고, 음사(蔭仕)로 사헌부감찰 호조정랑 호용위호군종친부전첨을 지냈다. 다른 사람과 동료가 되었을 때 정성을 다하여 대하지 않음이 없었고 터럭만큼도 소홀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으시니 비록 타고난 자질이 본래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서이겠지만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
세종 23년 (1441년)에 상주부 중모현 백화산 아래 수봉의 별업으로 돌아가 은거하시니 상주에 처음으로 입향한 파조이다. 1456년에 아픈 몸을 수레에 싣고 서울로 돌아와 사당에 참배하고 형제들을 만난 뒤 미처 도아오지 못하시고 같은 해 6월 16일에 향년 56세를 일기로 돌아 가셨다. 뒷날 증손인 맹헌(孟獻)이 귀하게 되어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상주시 공성면 서쪽 묵방동 간좌곤향(艮坐坤向) 언덕이다.
- 황효헌(黃孝獻)
1491(성종 22)∼1532(중종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숙공(叔貢), 호는 축옹(蓄翁)·현옹(玄翁)·신재(愼齋). 한성 출신. 영의정 희(喜)의 현손이며, 보신(保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형(從兄)이고, 아버지는 부사 관(灌)이며, 어머니는 집의(執義) 강미수(姜眉壽)의 딸이다.
진사로서 1514년(중종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홍문관정자가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홍문관직제학·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26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대사성과 황해도관찰사, 1528년 이조참의, 그리고 이조참판에 올라 1530년 이행(李荇) 등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2년 안동부사로 외보(外補)되었다가 갑자기 죽었다.
사람됨이 담론(談論)을 좋아하고 풍의(風儀)가 아름다워 귀공자 같았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뛰어났으므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많은 사람이 애석하게 여겼다 한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 황익재
1682(숙종 8)∼1747(영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재수(再?), 호는 백화재(白華齋). 희(喜)의 10대손이며, 집(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재윤(載胤)이고, 아버지는 증 좌승지 진하(鎭夏)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진익(震?)의 딸이다.
1701년(숙종 2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박사·병조좌랑을 거쳐 평안도사를 지냈다. 1705년 성균관전적·예조좌랑이 되고,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707년 충청도도사가 되었다.

 

상주 > 남동권 > 공성면 우하리
- 상주시 공성면 지역인데 봉우한 아래가 되므로 봉하(鳳下)라고 했다. 1914년에 우하리라고 하고 공성면에 편입했다.
- 간마
우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새봉골 북서쪽에 있는데 양지마에서 옥산과 반계를 잇는 920번 지방도로를 따라 북서쪽인 회룡방향으로 약 1km의 거리에 있다. 상판저수지 동쪽인데 뒷산이 관(冠)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리어 진다.

- 봉우산
공성면의 우하리, 봉산리, 도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41m이다. 회룡마을 남쪽이며 양촌 마을의 뒷산이다. 조선시대 때 회룡 봉수대가 있어서 남으로는 김천시의 소산, 동쪽으로는 청리면의 서산봉수에 응했던 곳이다.

-상판저수지
우하리와 모동면 상판리 사이에 있는 저수지인데 1972년에 준공이 되었다.

- 우하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돼지를 많이 길렀는데 우리가 없어도 달아나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또 마을이 돼지우리 모습과 같아서 우리라고 하다가 우하로 불렀다고 한다.

- 우하리 가마터
우하리 산 1-1번지에 있는데 관촌 마을 동쪽에 있는 야산의 북서쪽 구릉 끝부분에 있다. 구릉 아랫부분과 산기슭에 도지미와 분청조각이 흩어져 있다.

-황효헌 신도비
우하리 331-1번지 관촌 마을 귀후재 입구에 1990년에 세운 다른 비석과 함게 있다. 선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이행과 함께 편찬하였으며, 옥동서원에 제향 되었다.

- 회룡봉수대
회룡마을과 우하리 사이에 해발 541m의 봉우산에 있다. 땅 표면에는 흔적이 없지만 연기에 그을린 자연석이 산꼭대기에서 출토된다.<상산지>에는 ‘공선현에 있으며 서남으로 김천의 소산에 응하고, 동으로는 청리의 서산과 연락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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