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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天下]의 기관[奇觀]속에 우뚝 솟아 있는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
우리의 역사[歷史]가 반도[半島]에서 전개 되었다고 주장[主張]하는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무엇을 근거[根據]로 하며, 어떠한 사서[史書]를 보고 그러한 주장[主張]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져 우리가 볼 수 있는 사서[史書]는, 오천년[五千年]에 걸친 우리 역사[歷史]에 대한 기록[記錄]들이다. 그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모두 살펴보면, 반도[半島]에서 오천년[五千年]의 우리 역사[歷史]가 전개 되었다고 주장[主張]는 그 논리[論理]의 허구[虛構]가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주장[主張]하고 있는데, 말은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과거 일제[日帝]가 만들어 놓은 실증사학[實證史學]과, 지금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실증사학[實證史學]은, 오천년[五千年] 우리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이를 실증사학[實證史學]의 논리[論理]대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검증[檢證]하여, 이를 고증[考證]하고 이것을 증명[證明]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오천년[五千年]의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한 수 많은 사서[史書]들과, 중국[中國]이 자랑하는 이십오사[二十五史]의 기록[記錄]에서도,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은, 통칭[統稱]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과 같이, 조선[朝鮮]의 최북단[最北端]에 백두산[白頭山]이 있었고, 조선[朝鮮]의 최남단[最南端]에 한라산[漢拏山]이 있었다고 기록[記錄]을 하고 있다.
고대[古代]의 우리 역사[歷史]와 근세[近世] 조선[朝鮮]까지 반만년[半萬年]을 이어 내려오면서,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은 본래의 그 자리에서 옮겨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반도[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을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천년[五千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에 대하여 전혀 다른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남기고 있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주장[主張]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남[南]쪽과 북[北]쪽에 있는 신비[神秘]롭고 영험[靈驗]하다는,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만 이라도, 이를 검증[檢證]하고, 고증[考證]해 보았는지 의문[疑問]이 아닐 수 없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는, 한라산[漢拏山]은 400리[四百里]에 걸쳐 뻗어 있으며, 한라산[漢拏山] 기슭에서는, 수만 마리의 군마[軍馬]를 사육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라산[漢拏山]의 동[東]쪽에는 큰 호수[湖水]와 같은 연못이 두 개가 있었으며, 정상에는 백록담[白鹿潭]이 있었다.
탐라[耽羅]에는 흰 옥[玉]돌로 된 기이한 옥류천[玉流川]이 있었다.
원[元]나리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순제[順帝]는, 탐라[耽羅]에 궁실[宮室]과 황성[皇城]을 짓고, 도읍[都邑]을 옮기려고 궁실[宮室]의 역사[役事]를 시작하다가 명[明]나라에 쫓겨 사막[沙漠]의 북[北]쪽인 응창[應昌]으로 달아나 죽었다.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지금의 제주도[濟州道]가 탐라[耽羅]라면, 어찌 이러한 일이 타당이나 하겠는가 ?
탐부라[耽浮羅], 유구[流求] 등의 나라는 동남[東南]쪽의 천지[天池]가에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탐라[耽羅]는 남북[南北]으로는 천리[千里]에 이르고 동서[東西]로는 수[數] 백리[百里] 이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라산[漢拏山] 정상의 눈은 오월[五月]이 되어서야 녹는다고 말하고 있다.
한라산[漢拏山]이 자리 잡고 있는 제주[濟州]는, 남[南]쪽으로, 유구[[琉球國]와 인접하고 있었으며, 유구[(琉球)의 사신[使臣]들은 조선[朝鮮]의 전기[前期]까지 한양[漢陽]을 오고 갔다.
백두산[白頭山]은, 사계절[四季節]내내 빙설[氷雪]이 쌓여 있었다. 그 모양은 흰 사발을 업어 놓은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으며, 백두산[白頭山]이 있는 조선[朝鮮]의 북관[北關]인 함경도[咸鏡道]에는 천리[千里]에 이르는 사막[沙漠]이 펼쳐져 있었다.
고대[古代] 대륙[大陸]의 역사서[歷史書]도, 백두산[白頭山]은 대황지중[大荒之中]에 있었으며, 불함산[不咸山]으로 불리웠고, 북[北]쪽으로는 숙신[肅愼]이 있었다.
불함산[不咸山]의 서남[西南]쪽에는, 천리학야[千里鶴野]의 요동[遼東]벌이 펼쳐져 있었으며, 요동[遼東]과 인접한 곳에,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 자락에 있는 용만[龍灣]의 통군정[統軍亭]은, 끝없이 펼쳐진 천리학야[千里鶴野]의 요동[遼東]벌과 연경[燕京]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고 역사[歷史]는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백두산[白頭山]은 음산[陰山]을 바라보고, 한해[翰海]를 굽어보고 있었다.
조선[朝鮮]의 평안도[平安道]와 함경도[咸鏡道]에 걸쳐 있는 백두산[白頭山] 북[北]쪽의 음산[陰山]은, 동서[東西]로 천리[千里]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함경도[咸鏡道]의 치성[雉城]은, 함경도[咸鏡道]의 경성[鏡城]을 말한다.
치성[雉城]은 맥국[貊國]의 북[北]쪽 2000리[二千里]에 있는 곳으로, 숙신[肅愼]의 옛터이니, 험준한 데다 무척 외진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음산[陰山]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산[山]에 올라가서 발해[渤海]를 굽어보곤 하였다.
이러한 것이 함경도[咸鏡道] 변방[邊方] 백두산[白頭山] 지역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를 비롯하여, 옛 선조[先祖]들은, 백두산[白頭山]에 대하여 백두산[白頭山은 이러한 지역[地域]에 있었다고, 수 많은 역사[歷史]의 생생[生生]한 기록[記錄]들을 남겼다.
우리의 역사[歷史]를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라고 하는 것은, 역사[歷史]를 말하면서, 역사서[歷史書]를 무시하고 역사서[歷史書]를 제외하고 말하는 것으로서, 그 것은 우리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주장[主張]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이러한 역사[歷史]의 엄연한 기록[記錄]들에 대하여, 그 소리 높여 외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으로 실증[實證]이라도 해 보았는가 ?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역사서[歷史書]와 우리 역사[歷史]에 대한 사료[史料]들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의혹[疑惑]과 모순[矛盾]으로 가득 차 있다.
역사서[歷史書]에서 이렇게 어이없고 황당[荒唐]한 모순[矛盾]이 가득히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한 사료[史料]들을 왜곡[歪曲]하여 변조[變造]하고 조작[造作]해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우리의 역사인 조선사[朝鮮史]의 역사서[歷史書]에 이러한 악행[惡行]과 만행[蠻行]을 저질러 놓았을까 ?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主張]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것을 모르고 있을까 ?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비판을 받는 것은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과 기만[欺瞞]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에 대한 왜곡[歪曲]과 거짓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사실[史實]을 밝혀, 우리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과거 일제[日帝]에 의하여 저질러진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악행[惡行]과 왜곡[歪曲]과 거짓이 가득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그대로 답습[踏襲]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성[反省]하는 기미는 조금도 없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우리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다.
역사[歷史]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자[文字]가 생긴 이래로 수[數] 천년[千年]의 세월을 내려오면서 우리의 선조[先祖]들이 당시[當時]의 시대를 살면서, 보고 겪으며 느낀 일들을 생생[生生]한 기록[記錄]으로 남긴 것이 역사[歷史]이다.
역사[歷史]를 말할 때는, 역사서[歷史書]가 근본[根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상식[常識]적인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主張]하는 사람들은, 과연 자기들의 주장이 역사서[歷史書]를 근본[根本]으로 하고 있는지 깊이 돌아봐야 할 것이다.
지금 반도[半島]에 있는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을, 반도사관[半島史觀]에서는 역사[歷史]속의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이라고 주장[主張]하고 있으나, 그 어느 것 하나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부합[符合]되지 않는다.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에 대하여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이 맞는 것인가를 한번 상고[相考]하여 살펴본다면,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서 설명하는 내용들과 어느 것 하나라도 일치[一致] 되는 것이 없다.
우리의 역사[歷史]는 이렇게 그 본[本] 모습을 감추고 어지러이 흐려져 있다.
고고학[考古學]과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
모름지기 역사학자[歷史學者]라고 한다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을 따라서 그러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기록[記錄]인지를 먼저 실증[實證]하고 분별[分別]하여, 이를 밝히며, 이를 찾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하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을 밝히는 것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이 그 소리 높여 외치고 주장[主張]하는 대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이 되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이 주장[主張]하는 지금의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이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백두산[白頭山]과 한라산[漢拏山]이 아니라면, 반도[半島]에서 우리의 오천년[五千年] 역사[歷史]가 전개 되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과 왜곡[歪曲]의 허구적[虛構的]인 역사[歷史]가 되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들은 조선[朝鮮]이 망하고 난후, 치욕[恥辱]의 일제[日帝]치하에서, 왜[倭]놈들의 사악[邪惡]하고 음흉[陰凶]한 조선사[朝鮮史] 말살[抹殺]의 반도사관[半島史觀]과 그 맥[脈을 같이하고 있다.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 아득히 멀고 먼 기나긴 여행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누구인가 ?
우리는 우리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이며, 우리 역사[歷史] 선조[先祖]들의 후손[後孫] 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들을 찾아서, 외롭고 힘든 일들과 모든 어려움을 달게 감내[堪耐]하며, 아득히 멀고 먼 일만년[一萬年]의 기나 긴 우리 역사[歷史]에 대한 고금[古今]의 여행[旅行]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半島]의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 이 첨성대[瞻星臺]는, 신라[新羅] 천년[千年]의 역사[歷史]를 상징[象徵]하고 있다.
이 첨성대[瞻星臺]의 용도[用途]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설왕설레[說徃說來]하고 있다.
우리는 반도[半島]의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가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고도[古都]라고 배워왔고,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지금도 그렇게 학생[學生]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歷史]에 기록[記錄]된 첨성대[瞻星臺]에 관한 기록[記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는, 역사[歷史]에서 말하는 첨성대[瞻星臺]가 아니라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첨성대[瞻星臺]에서 천문[天文]을 살필 때에는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렸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것일까 ?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당시[當時]에 첨성대[瞻星臺]를 직접보고 오르내렸던 선대[先代]의 기록[記錄]들을 보면서,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
瞻星臺。 在府城南隅, 唐 太宗 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所築。 累石爲之, 上方下圓, 高十九尺五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 通其中, 人由中而上 [중략]
첨성대[瞻星臺], 부성[府城]의 남[南]쪽 모퉁이에 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新羅] 선덕 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十九尺] 5촌[五寸], 위의 둘레가 21척[二十一尺] 6촌[六寸], 아래의 둘레가 35척[三十五尺] 7촌[七寸]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중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첨성대[瞻星臺]
본부 동남쪽 3리에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때에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위는 모나고 아래는 둥글다. 높이는 19척[尺]이며 그 속은 비어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한다.
어세겸 [魚世謙] 시[詩]에,....... 태사[太史]가 천문[天文]을 보아 뭇별을 살피던 곳, 백 척[百尺]이나 되는 높은 대 층성[層城]보다 높이 솟았네.
하늘 한 번 바라보니 재앙[災殃] 상서[祥瑞] 나타나, 마침내 황도[黃道]에 일월[日月]기울어진 것이 슬프구나.
여전히 금오산[(金鰲山) 있어 아침마다 그림자 보내는데, 다시는 밤에 소리 전하던 옥루[玉漏]는 없어졌구나.
부디 올라가서 천문[天文]을 보지 말라. 옛 나라가 마음을 슬프게 하네. 하였다.
월성첨성대[月城瞻星臺]
안축[安軸]
전대[前代]의 흥망[興亡] 세월이 지나 前代興亡歲月經
천척[千尺]의 석대[石臺]만이 하늘에 솟아 있네. 石臺千尺聳靑冥
어떤 사람이 오늘날 천상[天象]을 살핀다면 何人今日觀天象
문성[文星]의 한 점이 사성[使星]으로 되었다 하리라. 一點文星作使星
정몽주[鄭夢周]
瞻星臺兀月城中。玉笛聲含萬古風。文物隨時羅代異。嗚呼山水古今同
월성[月城] 가운데 첨성대[瞻星臺] 우뚝하고 瞻星臺兀月城中
옥피리 소리는 만고의 바람을 머금었구나. 玉笛聲含萬古風
문물은 이미 신라[新羅]와 함께 다하였건만, 文物隨時羅代異
슬프다. 산[山]과 물은 고금[古今]에 변함이 없구나. 嗚呼山水古今同
동사강목[東史綱目]
신라[新羅]에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축조하였는데, 위는 방형[方型]이고 밑은 원형[圓型]이며 그 속은 비게 하여 사람이 그 속으로 통해서 올라가게 되었는데 높이가 19척[尺]으로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분침[氛祲]을 살펴보는 곳이다. 지금 경주부[慶州府] 동남 3리[里]에 있다. [중략]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에 관한 역사[歷史] 기록[記錄]에서는, 첨성대[瞻星臺]에 대하여 각기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위는 방형[方形], 상방[上方] 이라고 말하고,..... 다음에,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十九尺] 5촌, [五寸], 下圓, 高十九尺五寸의 이 첨성대[瞻星臺]는,.... 위의 둘레가 21척[二十一尺] 6촌[六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이고,...... 아래의 둘레가 35척[三十五尺] 7촌[七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첨성대[瞻星臺]에 관하여,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방형[方形]으로 된 대[臺]가 하나 더 있다고 기록[記錄]하고 있으며, 첨성대[瞻星臺]는 원형[圓形]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記錄]은, 지금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는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경주[慶州]의 첨성대[瞻星臺와 완전히 배치[背馳]되는 기록[記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이며, 높이는 19척[尺], 그 속은 비게 하여 오르내리며 천문[天文]을 관측 하였다. 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원문[原文] 기록[記錄]에서는,........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고 있는, 방형[方形], 상방[上方]의 기록[記錄]은 쑥 빼 버리고,....... 방형[方形]과 원형[圓形]만을 기록[記錄]하여,...... 마치 첨성대[瞻星臺]가 하나만 있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기록[記錄]을 보면, 첨성대[瞻星臺]는, 지금 경주[慶州]에 있는 것과 같은 형태[形態]가 아니라, 상단에 방형[方形], 상방[上方]으로 된 대[臺]가 하나 더 있었으며, 그 아래에 위의 둘레가 21척[二十一尺] 6촌[六寸]上周圓二十一尺六寸, 아래의 둘레가 35척[三十五尺] 7촌[七寸]下周圍三十五尺七寸의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十九尺] 5촌의 첨성대[瞻星臺]가 있었다.
이 역사[歷史]의 기록[記錄] 만으로도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는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가 아니라는 것이 그대로 밝혀지고 있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같은 기록[記錄]을 남기고 있다.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도, 각 사서[史書]마다 이렇게 모순[矛盾]으로 얼룩져 있다.
천년고도[千年古都] 신라[新羅]의 경주[慶州]에 단 하나밖에 없는 첨성대[瞻星臺]에 대하여, 이렇게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이 어긋나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수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첨성대[瞻星臺]를 찾아 첨성대[瞻星臺]를 직접보고 오르내리며, 수 많은 시[詩]를 남기고, 그 감흥[感興]을 노래하였다.
분명[分明]히,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동사강목[東史綱目]의 첨성대[瞻星臺]에 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대하여, 그 누군가가 원문[原文]을 산삭[刪削]하고, 첨성대[瞻星臺]가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원문[原文]을 변조[變造]하고 왜곡[歪曲]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의 문자[文字]가 틀려도 허용되지 않는 엄중[嚴重]한 국사[國史]의 기록[記錄]들이 이렇게 어지러이 어긋날 수 있을 것인가 ?
그리고 첨성대[瞻星臺]의 위치[位置]에 대한 것이다.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는, 부성[府城]의 남[南]쪽 모퉁이에 있다. 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본부 동남쪽 3리에 있다. 하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도, 지금 경주부[慶州府]의 동남 3리[里]에 있다. 고 말하고 있다.
세 기록[記錄] 모두 첨성대[瞻星臺]의 위치[位置]가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에 맞추어져 있다.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의 기록[記錄]만으로도,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는, 신라[新羅] 경주[慶州]의 첨성대[瞻星臺]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첨성대[瞻星臺]의 위치[位置]가 모두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일제[日帝]의 식민사관[植民史觀]과 반도사관[半島史觀]의 허구[虛構]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알타이산맥 벨루하산의 첩첩[疊疊]한 고산준령[高山峻嶺]이 천리[千里]를 내리 뻗어 달리는 남[南]쪽의 깊은 산[山]속에는, 자갈을 쌓아 올려 만든 큰 석총[石塚]이 자리 잡고 있다.
현지[現地]에서도 그저 왕릉[王陵]으로만 불리우고 있을 뿐, 이 석총[石塚]이 누구의 왕릉[王陵]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저 추정[推定]과 가설[假說]이 난무[亂舞]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고총[古塚]이 있는 남[南]쪽 지역[地域]의 산[山]위에는, 고대[古代]에 작은 돌들을 쌓아 올려서 만든 돌탑으로 된 하나의 대[臺]가 높이 서 있다.
그 모양과 형태[形態]는,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와 거의 비슷하다. 모양이 다른 것은,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위에 사각으로 걸쳐진 돌만이 없을 뿐이다.
이 돌을 쌓아 만든 탑[塔]은, 북방[北方]의 문화[文化]와 역사[歷史]에 대한 풍속[風俗]으로 보아, 천지[天地]에 감응[感應]하고, 제천[祭天]과 성운[星雲], 그리고 성[聖]스러운 기운[氣運]에 이르는 그 어떤 기원[祈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위하여 쌓은 것인지 현재[現在]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성[聖]스럽고 신비[神秘]로운 돌로 쌓은 탑[塔]으로부터, 동[東]쪽으로 만여리[萬餘里] 떨어져 있는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같은 유형[類型]의 대[臺]가 서 있다는 것은, 지금 경주[慶州]의 역사[歷史]와, 첨성대[瞻星臺]에 관한 우리 역사[歷史]의 사실[史實]과 진실[眞實]에 대하여,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모습을 새로이 하게 될 것이다.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는 평지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첨성대[瞻星臺]가 지금 경주[慶州]에 있는 것과 같이 평지에 세워진 것이라면, 첨성대[瞻星臺] 아래에 단풍이 물들고 구름이 흘러 갈 수 있을 것인가 ?
첨성대[瞻星臺]에 관하여 역사[歷史]의 기록[記錄]과 선대[先代]들이 남긴 시[詩]들을 살펴보고,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는 과연 어느 지역[地域]에 있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점필재집[佔畢齋集]
영일현 인빈당 기[迎日縣寅賓堂記]
김종직[金宗直]
東海之濱。有縣曰迎日。或稱臨汀。盖新羅東表之地也。新羅初。渾沌未。制度無聞。及其中葉。賢君繼作。始通中國。稽攷彌文。朝日夕月。載諸國語。賓出餞納。紀於堯典 [중략]
동해[東海] 가에 한 고을이 있는데, 그 이름은 영일[迎日]이었다. 더러는 임정[臨政]이라고도 하니, 대개 신라[新羅] 동[東]쪽의 땅이었다. 신라[新羅] 초기에, 인문이 열리지 못하고, 제도가 성립되지 못하였더니, 그 중엽[中葉]에 이르러서 어진 임금이 계속해 일어나, 비로소 중국[中國]의 문헌을 통하여 상고하면, 아침 해와 저녁달이 국어[國語]에 실려 있고, 떠오르는 해를 공경하고 지는 해를 전송하는 글이 요전[僥典]에 기록되었던 것이었다. [중략]
以爲古昔帝王欽昊天。授人時。其政不過如斯而已。雖無祖宗之故。亦可以義起。官置太史。臺崇瞻星。而曆象圭測之制。隨以寢備于其時 [중략]
그들이 생각하기를, 옛날 제왕[帝王]들이 하늘을 공경하여 인시[人時]를 마련해 주는 것에 있어서, 그 정치[政治]는 불과 이와 같을 뿐이요, 비록 조종[祖宗]의 고사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의[義]를 참작하여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여, 태사[太史]의 벼슬을 두고 첨성대[瞻星臺]를 높이 쌓아, 역상[曆象]과 규측[圭測]의 제도가 뒤를 따라 점차 갖추어졌던 것이다. [중략]
동문선[東文選]
첨성대[瞻星臺]
조위[曺偉]
화서가 더북더북 무성한 천맥 離離禾黍暗阡陌
한가운데 솟은 대는 높이가 백 자 中有崇臺高百尺
뿌리는 지축 속에 깊숙이 이었고 根連黃媼地中深
그림자는 청산을 대하여 구름 밖에 우뚝 影對靑山雲外矗
떡 깨물던 옛날에 민물이 순박하여 齒餠當年民物醇
희화의 역상을 차례차례 마련했더니라 羲和曆象次第陳
규를 세워 해와 달의 그림자를 관측하고 立圭測景觀日月
대[臺]에 올라 구름 보고 별들을 점치니 登臺望雲占星辰 [중략]
겁화[刧火]에도 타지 않고 너만 홀로 남아서 刧火不燒渠獨在
쌓은 돌이 우뚝 풍우[風雨] 밖에 서 있구나. 累石巋然風雨外
노나라의 관대는 지금 있기나 한지 魯中觀臺今有無
신라 때 제작이 감탄 할 만하구나. 羅時制作堪一噫 [중략]
무명자집[無名子集]
詠東史
영동사 232수[首] [詠東史其二百三十二首]
영휘 연호 사용하니 수레며 문자 같아지고 永徽年號一車書
장복도 화[華]를 따르겠다 처음으로 청하였네 章服從華上請初
의관을 가지런히 정비하여 제도를 일신하고 濟濟衣冠新制度
첨성대 아래에서 임금를 공손히 받들었네 瞻星臺下拱辰居
金春秋又請改章服。以從華制。始行永徽年號。善德主時。作瞻星臺。
신라[新羅]의 김춘추[金春秋]가 또 장복[章服]을 바꾸어서 화[華]의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처음으로 영휘[永徽]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선덕여왕[善德女王]때 첨성대[瞻星臺]를 만들었다. [중략]
사가집[四佳集]
送梁中樞 順石 出尹慶州四首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부임하는 양 중추[梁中樞] 순석[順石] 를 보내다 4수
중략
사람들은 자사[刺史]가 옛 제후[諸侯]라고 말하거니와 人言刺史古諸侯
더구나 계림[鷄林]은 바로 크나큰 고을임에랴 何況鷄林是大州
인물의 번화함은 아직도 옛 나라 모습이요 人物繁華猶故國
강산의 아름다움은 절로 좋은 놀이터일세 ] 江山佳麗自淸遊 [중략]
나는 지금 백발로 예전 놀이를 연연하거니 白髮吾今戀舊遊
소년 시절의 행락이 꿈속에 유유할 뿐이네 少年行樂夢悠悠
첨성대[瞻星臺]는 오래여라 산[山]이 아직 남아 있고 瞻星臺老山猶在
반월성[半月城]은 텅 빈 가운데 물만 절로 흐르리 半月城空水自流 [중략]
첨성대[瞻星臺]가 자리 잡고 있는 산[山]의 모습
사가집[四佳集)
□□
곡령의 솔은 푸르고 계림의 나뭇잎은 노래라 □松一靑鷄葉黃
김왕의 영토 바친 것이 흡사 전왕 같았었네 金王納土如錢王
나라 -2자 판독 불능, 3자 원문 결락- 國▨▨□□□郡
그 유풍 여운이 아직도 아주 순후하고말고 餘風遺俗猶淳厖 [중략]
오산[鼇山]은 우뚝우뚝 아환처럼 둘러 있고 鼇山矗矗縈鴉鬟
문천의 잔물결은 청둥오리처럼 새파랗고 蚊川鱗鱗生鴨頭
반월성[半月城] 가에는 수양버들이 하늘거리고 半月城邊楊柳□
첨성대[瞻星臺] 밑에는 단풍잎이 하마 가을일 텐데 瞻星臺下楓葉秋
황량한 포석정의 옛일 한번 위문하고 나면 鮑石荒涼一弔古
오릉의 초목은 공연히 시름만 더하겠지 五陵草樹空添愁
황룡사와 분황사에는 黃龍□□芬皇寺
장륙은 벌써 불탔고 백탑도 다 무너졌고 丈六已燒白塔墮 [중략]
부사집[浮査集]
동도 회고[東都懷古]
계림[鷄林]의 누런 잎이 서풍에 흩어지고 鷄林黃葉起西風
옥피리 소리 속에 물은 동으로 흐르네 玉笛聲中逝水東
오십 대 전한 궁궐은 주춧돌이 남아있으나 五十代傳宮礎在
천 년 지난 궁중 전각은 빈터만 덩그렁하네 一千年過殿基空
가을날 황량하게 푸른 곳은 포석정이고 亭名鮑石秋蕪綠
석양 노을빛에 붉은 곳은 첨성대[瞻星臺]이네 臺號瞻星夕照紅
옛 자취 의연하여 맥수를 슬퍼하면서 陳跡依然悲麥秀
거문고 들고 한가히 앉아 나는 기러기를 보내네 撫琴閒坐送飛鴻
반월성[半月城] 머리엔 노란 단풍잎이 떨어지고 半月城頭黃葉落
첨성대[瞻星臺] 아래엔 흰 구름이 겹겹 쌓였으리 瞻星臺下白雲堆
상인은 천지간의 독특한 안목을 갖췄기에 上人一隻乾坤眼
동해[東海]를 작은 술잔처럼 앉아서 내려볼 테지 坐瞰東溟小似杯 [중략]
右揔言精舍景趣이상은 정사[精舍]의 경취[景趣]를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첨성대[瞻星臺]가 위치한 산[山]의 전경
첨성대
근재집[謹齋集]
안부 백문보께 올리는 노래 8수 병서인[白文寶按部上謠 八首 幷序引]
월성 첨성대[月城瞻星臺]
전 시대의 흥망 세월 겪고도 前代興亡歲月經
석대는 하늘에 천 자나 솟아 있네 石臺千尺聳靑冥
누가 오늘 천상을 보고 何人今日觀天象
한 점 문성이 사성이 됨을 알겠는가 一點文星作使星
암서집[巖棲集]
東都懷古
동도에서 옛일을 회고하다.
백대[百代] 신라[新羅]의 나라는 百代新羅國
가을바람 한 차례 겪고 말았네 秋風爲一經
성[城]의 모습 아직도 당시와 같고 城形猶似
그림자를 드리운 옛날 첨성대[瞻星臺] 臺影舊瞻星
계림[鷄林] 숲엔 산뜻한 해가 비치고 澹日鷄林樹
포석정엔 차가운 안개 덥혔네 寒烟鮑石亭
금종 소린 어찌 그리 애절하던지 金鍾豈哀怨
오로지 세인들은 듣기만 할 뿐 只自世人聽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는 위는 방형[方形], 상방[上方]으로 오르는 계단과 푸른 풀로 덮인 첨성대[瞻星臺]의 모습
오산집[五山集]
봉차약포운2수[奉次藥圃韻 二首]
만가[萬家]가 폐허 되어 인연이 희소하고 萬家墟井少人煙
경물은 황량한데 또다시 세모 되었구나. 景物荒涼又暮年
산 아래 옛 궁전이 낡을 대로 낡았으니 山下舊宮零落盡
영광처럼 높은 기상 어디에서 찾아보나. 靈光何處覓巍然
첨성대[瞻星臺] 주변 수림 연기 전혀 없으니 瞻星臺畔樹無煙
어느 해에 석축[石築]이 파괴돼 기울었나. 石破天傾問幾年
나라는 망했어도 산천[山川]은 변함이 없으니 亡國如鴻山不老
석양 무렵 바라보자 다시 창연하구나. 夕陽寒望更蒼然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는 위는 방형[方形]으로 된 대[臺]의 내부 모습과, 방형[方形], 상방[上方]의 대[臺]에서 바라보이는 첨성대[瞻星臺]
사가집[四佳集]
送尹同年 子濚 分巡慶尙道。仍覲親丹城
경상도[慶尙道]를 분별[分別] 순행[巡行]하고 인하여 단성[丹城]으로 근친[覲親]하러 가는 윤 동년[尹同年] 자영[子濚]을 보내다.
[중략]
계림[鷄林]의 인물들은 시문 속에 들올 게고 鷄林人物歸囊橐
금오산의 풍광은 술잔을 주관하리라. 鼇岫風光領酒杯
어찌하면 밝은 달밤에 옥적을 휴대하고 安得月明携玉笛
첨성대[瞻星臺] 위에 올라가 함께 배회해볼꼬 瞻星臺上共徘徊 [중략]
점필재집[佔畢齋集]
첨성대[瞻星臺]
반월성[半月城] 가에 뿌연 안개 활짝 걷히니 半月城邊嵐霧開
우뚝 솟은 석탑[石塔]이 사람을 맞는 듯하네 亭亭石塔迎人來
신라[新羅]의 옛 구물[舊物]은 산[山]만이 홀로 있는데 新羅舊物山獨在
뜻밖에 다시 첨성대[瞻星臺]가 남아 있구나. 不意更有瞻星臺
기형으로 칠정 다스리는 건순우의 일이니 璣衡齊政舜禹事
황당무계한 그 제작을 어디에 쓰겠는가? 制作無稽安用哉
임금의 자리를 감히 여인에게 부여했으니 敢將神器付晨牝
천고에 진평왕이 화의 조짐이 되었도다. 千古眞平爲禍胎
원형[圓形]으로 만들어진 첨성대[瞻星臺]와 첨성대[瞻星臺]의 계단
부사집[浮査集]
동도 유적 27수 [東都遺跡 二十七首]
돌을 다듬어 대를 만드니 높이가 몇 척인가 鍊石爲臺高幾尺
가운데를 통해 오르내리며 천문을 살폈다네 通中上下察天文
잔약한 후손이 천 년의 왕업을 지키지 못해 孱孫不守千年業
첨성대[瞻星臺]만 홀로 우뚝하게 석양빛에 비치네 臺獨嵬然照夕曛
右瞻星臺 善德女王時。鍊石築臺。高十九尺。通其中。人由中而上下。以候天文故云。
이는 첨성대[瞻星臺]를 노래한 것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돌을 다듬어 대[臺]를 쌓았는데 높이가 19척[十九尺]이고, 그 가운데를 뚫어 놓았다. 사람이 그 가운데로 오르내리면서 천문[天文]을 관측하였다.
첨성대[瞻星臺]를 오르는 첨성대[瞻星臺] 내부의 돌로 만들어진 계단
사상록[槎上錄]
次權學官韻
附從事次韻
종사의 차운을 붙임
중략]
옛날의 월성[月城]을 지나가면서 經過古月城
첨성대[瞻星臺] 위에서 노래 부르고 放歌星臺上
귀신을 울리는 한 편의 시는 一篇泣鬼神
천 년의 망국한을 물었더니라 千年弔淪喪
변성이라 구월달 찬바람 불고 邊城九月風
가을비에 파도도 우람하구나 秋雨波濤壯
대마도는 본래 우리 바깥 울이라 馬島本外藩
부산과는 이웃처럼 대어 있도다. 釜山接隣壤 [중략]
첨성대[瞻星臺]의 모습과, 첨성대[瞻星臺]로 들어가는 문, 그리고 첨성대[瞻星臺]앞의 모습
첨성대[瞻星臺]가 위치[位置]한 주변 지역의 산세[山勢]와 수려한 산천[山川]
지금 중국[中國] 대륙[大陸]의 동남[東南] 지역에 있는 임해[臨海]는,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명활성[明活城] 지역이다.
명활성[明活城]의 성곽[城郭]은 웅장[雄壯]하고 견고[堅固]하게 축조[築造]되어 있다.
서루[西樓]에 올라 바라보니, 계림[鷄林] 경주[慶州]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역사[歷史] 기록[記錄]의 설명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명활성[明活城]은 서북[西北]의 산[山] 을 끌어 않고 축조[築造]되어 있는데, 그 산의 정상[頂上] 능선으로 성곽[城郭]이 지나가고 있으며, 서루[西樓]도 능선의 성곽[城郭]위에 서 있다.
대륙[大陸]의 동남[東南] 지역에 있는 임해[臨海]에서 서북[西北]으로 100여리[百餘里]떨어진 지역에,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가 자리 잡고 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는 오방[五方]으로 둥글게 산[山]으로 쌓여 있다고 하였다.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에서 설명하고 있는 첨성대[瞻星臺]의 모습과 임해[臨海] 첨성대[瞻星臺]의 구조[構造]와 형태[形態]는,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일치되고 있으며, 선대[先代]들이 남긴 문집[文集]속의 설명들과는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어긋나지 않는다.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가 있는 이 지역에는, 조선[朝鮮]의 중기[中期]에 좌의정[左議政左]을 지낸 ㅁㅁㅁ분의 종사[宗祠]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분의 존함[尊銜]과 종사[宗祠]의 내력은 밝히지 않습니다. 회원님들께서 이해 하시리라 사료 됩니다.◉
이분의 종사[宗祠]가 있는 산천[山川]과 전지[田地]를 둘러보고,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한 고택[古宅]을 둘러보며,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에 밀려오는 분노[憤怒]와 회한[悔恨]은,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자행으로 후학[後學]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한국[韓國] 역사[歷史]의 불행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함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천하[天下]에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일전[日前]에, 여러분들은 앞으로 큰 그릇으로 성장[成長]하여 천하[天下]를 다스리고 이끌어 나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라는 중국[中國] 연변[延邊] 조선족[朝鮮族] 교장[校長]의 훈시[訓示]가 회자[膾炙]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반도사관[半島史觀]에 얽메여 한 치의 앞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역사[歷史]를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韓國]의 모습,.... 무엇이 근원[根源]이고, 무엇이 시초[始初]이며, 무엇이 말단[末端] 인지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다.
엣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그 근본[根本]이 어지러운데 말단[末端]이 다스려지는 법은 없다. 其本亂而末治者否矣 고 하였다.
신라[新羅]가 반도[半島]의 경주[慶州]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는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역사서[歷史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삼한[三韓]의 78개국[七十八個國]이 반도[半島]에 있었다고 주장[主張]한다.
그들이 말하는 반도[半島] 경주[慶州]에 있는 첨성대[瞻星臺]는,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가 아니다.
신라[新羅]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一年]에 경주[慶州]에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다.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는 동서[東西]가 1000리[千里]이고 남북[南北]이 3000리[三千里]이다. 동[東]쪽은 장인국[長人國]에 닿았고, 동남[東南]쪽은 일본[日本], 서[西]쪽은 백제[百濟], 남[南]쪽은 바다, 북[北]쪽은 고구려[高句麗]에 닿았다.
위지[魏志], 진한[辰韓]의 12개 국[國]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고, 북사[北史]를 보면, 신라[新羅]를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양서[梁書], 수서[隋書],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邱儉]이 고구려[高句麗]를 토벌하여 격파하자, 고구려[高句麗] 왕[王]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그 뒤에 다시 고구려[高句麗] 왕[王]이 옛 땅으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던 자들이 드디어 신라[新羅]를 세웠다.
그러므로 그 나라 사람 가운데는 중국인[中國人], 고구려인高句麗人], 백제인[百濟人]이 뒤섞여 있으며, 옥저[沃沮], 불내[不耐], 예[穢], 한[韓]의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였다.
신라[新羅]의 경우는, 시조[始祖]가 금성[金城]의 궁실을 영건하였고, 자비왕[慈悲王]이 명활성[明活城]의 궁실을 축조하였으며, 소지왕[炤知王]이 월성[月城]의 궁실을 건설하여서 모두 도읍[都邑]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新羅]가 당[唐]나라와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를 평정하고는, 드디어 9주[九州]를 두었다.
9주[九州] 가 관할하는 군현[郡縣]은 무려 450개[四百五十個]였는바, 신라[新羅]의 지리적[地理的] 범위가 이렇듯 넓었다.
도곡집[陶谷集]
서른두 번째[其三十二]
신라[新羅]의 큰 고을 고타야[古陁耶]는 雞林巨郡古陁耶
연하[煙霞]의 별세계[別世界]이니 영가[永嘉]라 부르네 別界煙霞號永嘉
영호루[映湖樓] 위에 글자 아직 남아 있어 留得映湖樓上字
현릉[玄陵]의 유적[遺跡]을 지금까지 자랑하는구나. 玄陵遺迹至今誇
安東卽新羅古陁耶郡。又號永嘉。恭愍王避紅賊到此。書映湖樓額。
안동[安東]은 신라[新羅]의 고타야군[古陁耶郡]이니, 또 영가[永嘉]라고 한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여기에 왔다가 영호루[映湖樓]의 편액을 썼다.
임해[臨海]에서 서[西]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옛 안동[安東]에 이르게 된다.
안동[安東]의 옛 고호[古號]가 영가[永嘉]이다. 지금도 현지에서는 지역 이름에 영가[永嘉]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영가부용촌부용정[永嘉芙蓉村芙蓉亭]은,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 올려진 것인데,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대륙[大陸] 임해[臨海] 지역의 신라[新羅] 첨성대[瞻星臺]는 현지에서는 황제[黃帝] 제천단[祭天檀]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는 알에서 나왔다고 알고 있었으나, 그 것은 신비[神秘]하고 기이[奇異]한 전설을 가미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 때문에 그렇게 알려진 것 뿐이다.
신라[新羅] 역사[歷史]의 시조[始祖]는,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에서 시작 되고 있다.
현지에서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를 황제[黃帝] 제천단[祭天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 할 것이 없다.
신라[新羅]도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 황제[黃帝]의 후손[後孫]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은 다음에 게재[揭載] 할 것이다.
그 동안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지금 경주[慶州]의 첨성대[瞻星臺]를 [이것이 별을 관측하는 첨성대인지도 알 수 없음]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라고 국민[國民]들과 후학[後學]들을 기만[欺瞞] 해 왔다.
세종[世宗] 지리지[地理志]의 기록[記錄] 하나 만으로도 그 역사[歷史]의 거짓이 곧 바로 들어나는데도,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충실히 반도사관[半島史觀]의 주장[主張]들을 배우고 익혀 왔다.
그러나 천년[千年] 신라[新羅]의 첨성대[瞻星臺]는, 본래의 그 자리에서, 일월[日月]의 영겁[永劫]을 뛰어 넘고, 성좌[星座]의 조화[造化] 우러르며, 본디의 모습 그대로,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을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첫댓글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조선사의 놀라운 진면목이 하나 하나 드러나고 있는 현장이군요. 임해라면 돌아가신 재야사학자인신 000 분이 신라가 '임해'에 있었다는 주장을 한 것도 같은데........기억이 좀 그러네요. 사진을 보니, 기록속에서 말하는 내용과 너무도 유사하니.......솔직히 말하면, 반도 신라의 첨성대는 애들 장난감 같은 모습이죠. 오래 전의 첨성대 사진을 보면 논밭 가운데 허름한 모습으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올라가 사진도 찍고....뭐 그런 곳이었죠. 반도사학은 이젠 정신 좀 차려야 합니다. 식민사학과 반도 땅에 매달려, 헤맬지 불보듯 뻔합니다. 좀 넓게 생각해 보면 답이 보이는데, 왜 사고를 못할까요?
이번에 문제가 된 사학관련 문제도 사실은 젊은이들이 총대를 매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뒤에......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추측일 뿐이니,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발상전환이라는 사고는 한 번 전환이 되면, 그때부터 사물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달라집니다. 우리 학계도 제발 정신 좀 차려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슴이 메이도록 절절한 내용의 글을 올려주신 "환국고려"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첨성대 건은 너무 놀라서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사진까지 겹들이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늘 건강하심을 기원드립니다.
안녕 하십니까 ?
문무 선생님 감사 합니다.
한국의 국민들은 관광으로, 학생들도 수학여행을 통하여 경주의 첨성대를 견학 합니다.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천년 고도라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공교육을 통하여 가르치고 있는데, 답답 한 심사를 금 할 길이 없습니다.
더 의아스러운 것은 누구하나 경주의 첨성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서들을 통하여 들어나는 역사의 허구를, 사학자들 조차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서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역사, 이해하기가 불가 한 일 입니다.
@환국고려 항상 노고가 많으신 문무 선생님께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선생님의 댁내에 항상 변함 없는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에 그저 놀라울따름입니다. 천문을 관측하기위해 저 높은 산을 올라야 했다니 또 우뚝솟아있는 첨성대가 보였다면 올라가기에 쉬웠을까요? 그런데 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낙양이 경주로 나오는걸까요? 또 숭산의 옛 지명이 계림산이라고 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걸까요?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작된걸카요? 암튼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림니다. 늘건강 하세요.
대부여님 감사 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오고 알고 있는 신라의 역사는, 신라의 중요한 역사의 사실에 대하여, 극히 일부에 불과 함을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신라는 여섯 왕을 두고 구주를 다스렸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낙양이 그 중 하나 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사서에서 낙동강은 동으로 흐르고, 그 낙동강의 물줄기는 신라의 세 왕성을 감싸 않고 흘러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의 고도가 낙읍이라는 기록들이 사서에 많이 실려 있습니다.
숭산이라고 부르는 지명들은 왕성이 있는 곳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꼭 낙양의 숭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료 됩니다.
@환국고려 대부여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리며, 대부여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과 만복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이런 글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김영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역사, 우리 선조들의 역사, 역사이기 이전에 우리 조상님들의 생생 한 일들에 대한 거짓과 왜곡은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늘 성원을 보내 주시는 김영주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립니다.
김영주님의 댁내에, 만복이 늘 충만 하시고,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위의 게재된 내용에 비춰보면 : 지금 대륙의 각 지방마다 옛 조선의 유물유적들이 이름만 바뀐 채 그대로 살아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대도회지를 제외하고 각 지방은 종족이나 호족들의 입김이 세기 때문에 함부로 파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 많은 옛 고적들이 생생하게 존치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군요. 이런 이야기는 반도인들만 모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면, 바보가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공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집권자들의 의도대로 세뇌교육에 자라온 우리 세대들은, 바보가 되었다고 봐도 과한 표현이 아닐 것이며, 한국의 사학계는 괴물이 되었다고 봅니다.
환국고려님의 글을 보고, 시간을 내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 및 유학자들의 문집속의 첨성대를 검색해 보니, 과연 허허벌판에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충격이랄까요! 저렇게 현존하고 있는 조선의 유물!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반도 평양이 낙랑군이었다는 것에 거품을 무는 현실을 보니, 이 나라의 앞 날이 매우 걱정되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강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사대하는 이 나라의 위정자들과 힘없는 약자들인 국민들에게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내리찍은 위정자들! 이건 결국 우연의 일치가 아닌, 나라의 정통성이 없는 것과 맞물리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절강성 임해 서북40Km 산꼭대기에 첨성대가 있다니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군요.대륙조선의 중거들을 하나하나 찾아 낼때마다 정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낌니다. 언젠가 저곳을 꼭 답사해보고 싶군요.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대륙유산 답사가님, 감사 합니다.
우리의 역사는 근세의 조선까지, 동서로 대륙의 일만리 역사가 사실이었으며, 그 것을 고증하고 증명할 수 있는 사료들이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대륙유산 답사가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허구 반도설이 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왜놈들이 대륙에서 유적을 옴겨 조작한 유물들에 진짜 고향을 찾아 주어야 합니다 ,,,,
태양해님 감사 합니다.
유적과 유물을 조작하는 자들은, 이미 역사학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그 지위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진리는 엄중하고 천리 자연의 진리와 같은 것 입니다.
인위적으로 왜곡하고 조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태양해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건강과 만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이제와서 시간내어 본문을 다시 읽어보고 구글에서 찾아서 비교해보니 본문 유적이 첨성대라고 하기에는 좀 억측인것 같습니다. 문헌상 크기와 모양이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문헌상 크기와 모양은 차라리 경주첨성대가 일치하는게 사실이구요. 임해북쪽 계곡유원지 산꼭대기 유적은 크기와 모양이 기록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첨성대 유적이라고 동의할수가 없내요. 감사합니다.
첨언해서 다른 대륙내 유적이라고 주장하는 글들도 아무리 읽어봐도 한반도내 유적보다 더 신뢰가 가는 증거들이 안보입니다. 문헌상 주장 보다 현재 현지에 있는 실물의 실증적인 증거들이 더 신뢰가 가는것은 어쩔수가 없내요. 죄송합니다.
대륙유산답사가님, 말씀하시는 문헌은, 어떤 문헌을 말씀 하시는지 궁금 합니다. 그리고 그 문헌을 소개해 주실 수 없는지요.
어떠한 문헌을 보고 말씀 하시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주의 첨성대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역사의 전반적인 기록과 일치 할 수 있겠습니까 ?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이 아닐 것입니다. 조선사를 왜곡한 자들이, 우리의 역사에 대한 본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도록 그리 허술하게 왜곡하고 조작해 놓았을까요.
글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토함산 불국사, 석굴암은, 지금도 임해의 남쪽에 당시의 모습대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토함산은 사서의 기록대로, 신라 오악중의 하나 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게 토함산은 천하의 절승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러한 산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으며,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습니다.
무영탑은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기록이 전해진 이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토함산 불국사를 찾은 선유들이 시를 통하여 노래하기를 한쪽 산에는 비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 비는 매일 내리고 있습니다.
조선사의 의문에 대한 새로운 기록들이 있으시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로 드리는 말씀이나 참고가 되시리라 사료 됩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별을 관측하는데 평지에서 할 리가 없지요. 천문은 높은 곳에서 관측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역시 첨성대는 산꼭데기에 설치했었군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