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심전심(以心傳心)
최 용 규
교토 역사를 나서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유월 하순에 내리는 비는 매실이 익을 무렵 내린다하여 매우(梅雨)라고 한다는 것을, 마중나와 계셨던 K선생님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커다란 우산을 내주시는 선생님의 두 손에서는 여전히 힘이 느껴졌다.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시는 얼굴 표정도 여전하셨다. 역앞 주차장에서 선생님이 몰고 나오신 차는 회청색 SUV였는데, 육십령 고개를 내려서는 연세인데 SUV를 모시다니 선생님이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이유를 그제서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 내리는 교토 거리를 달려 처음 찾아간 곳은 니조성(二条城)이었다. 본래는 사찰이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교토에 머무는 동안 사저로 썼다는 곳이다. 비가 꽤 많이 쏟아지는데도 일요일이라 그런지 찾는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은 후, 목조로 된 건물의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설명 자료에 따르면 그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건물에는 서른세 개의 방이 있고 모두 팔백 개의 다다미가 깔려 있다고 한다. 우리의 상식으로 건평이 몇 평인지 알 수 없으나 밖에서 볼 때와 달리 내부는 매우 넓었다. 낮은 조명 아래 길게 이어진 복도 그리고 여닫이문으로 구획된 여러 방들을 지나며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명장면, 즉 쇼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가신과 다이묘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니조성에서 일본 사무라이 문화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K선생님은 교토 서민들의 삶의 정취가 어린 특별한 곳으로 안내 하셨다. 그 지역은 교토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 아라시야마 부근의 거리인데 우리의 민속 마을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었다. K선생님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내외에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추억거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것은 바로, 인력거를 타고 주변 일대를 일주하는 관광체험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간혹 일제 강점기의 풍물로 눈여겨보았던 인력거를 타게 되다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조금은 흥분이 되었다. 나와 아내 두 사람을 인력거에 함께 태우고 마을을 돌아보는데 드는 비용은 적은 비용이 아닌 듯 했다. K선생님은 지불하는 요금의 액수를 우리가 짐작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가린 채 지불하셨기에, 요금이 궁금했지만 짐짓 모른 체 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의 인력거꾼은 경쾌한 몸짓으로 인사를 한 후 인력거에 오르도록 도왔고 내리는 비에 바지가 젖지 않도록 바지 앞쪽으로 가리개를 씌워 주었다. 인력거 회사의 담당 직원인 듯한 젊은 여인과 아직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인력거꾼들이 좌우로 도열하여 우리들의 출발을 박수로 환송해 주었다. 그리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로 허리를 깊숙이 굽혀 절까지 하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호기로운 사람이라면 ‘어’ 하고 손을 들어 답례를 할만도 하련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미안하고 머쓱한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인력거는 이내 민속품을 파는 상점과 음식점들이 늘어선 제법 인파가 일렁이는 거리를 지나기 시작했다. 인력거를 끄는 젊은 청년은 그중 한 전통가옥 앞에서 멈추더니 일본어로 그 집의 내력을 설명하였다. 그 건물의 광고판에 기모노 차림의 예인(藝人) 사진이 있었는데, 왕년에 일본인들의 심금을 울린 엔가 명인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 집이 그녀의 기념관이자 소규모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다는 설명을 대충 눈치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설명을 끝내면서 덧붙인 그의 말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력거꾼 청년의 조부모와 부모 세대들은 그녀를 조센징으로 기억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조센징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인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의 현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력거는 거리를 벗어나 아지랑이 산이란 뜻을 지닌 아라시야마의 원경을 바라보면서 산길로 나아가다가 이내 산속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길의 양편에는 직경이 10cm도 넘는 굵은 대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 숲에서는 습기를 머금고 있지만 가슴을 상쾌하게 하는 미풍이 불었고 은은한 죽순 향기가 배어나왔다. 일본 오사카에 도착하면서부터 눈에 띈, 점심 도시락에 오른 크고 작은 대나무 그릇과 대나무 문양의 장식들, 그리고 대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여러 가지 민속 상품 등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생활 문화가 바로 여기, 대나무 숲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숲을 지나면서 길은 비탈길로 이어졌다. 인력거꾼은 발에 장화를 신고 머리엔 작은 삿갓모양의 모자를 쓰고, 삿갓 밑에 흰 머리띠를 두른 것이 전형적인 일본 서민의 차림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힘주어 인력거를 끄는 청년에게 일본어로 비까지 오는데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돌아보며 “다이죠브데스”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을 태운 인력거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는데 어찌 힘이 들지 않겠냐마는, 힘든 내색을 않는 청년의 태도는 이들의 철두철미한 서비스 정신과 자기 일에 대한 긍지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인력거는 어느덧 대나무 숲을 빠져 나와 마을 어귀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지나는 얼마쯤의 시간동안 인력거꾼은 말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좀 지친 듯 보였다. 나는 전통 의상을 입은 청년의 등을 응시하면서 불현듯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1924년 작)에 나오는 인력거꾼 김첨지를 떠올렸다. 소설 배경속의 그 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손님 두 사람을 태워 40전을 번 김첨지는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였다. 여느 날과 달리 손님도 많았다. 김첨지는 늦은 저녁 술 한잔 걸치는 호기도 부렸으나 병든 아내가 마음에 걸려, 설렁탕 한 그릇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내는 이미 숨져있었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1920년대 인력거꾼의 비참한 삶을 통해 식민지 시대를 산 우리 민족의 삶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때의 인력거꾼 김첨지의 뒷모습은 어떠했을까? 인력거를 탄 어느 관리 혹은 부유층 혹은 기생은 설렁탕 국물 한 그릇을 마셔보지도 못하고 죽어간 김첨지의 병든 아내로 표상된 동시대의 아픔을 얼마만큼이나 실감할 수 있었을까? 나는 짧은 상념에서 벗어나 눈앞에 보이는 일본인 청년 인력거꾼의 뒷모습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한국 관광객 부부를 태운 채 인력거를 힘들게 끌고 있는 이 일본 청년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생각하느라 말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는 것일까?
인력거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전통가옥들 사이의 좁고 구불구불 한 골목길을 빠져나와 강둑을 끼고 있는 도로로 얼마쯤 지나더니 이윽고 출발했던 장소로 되돌아 왔다. 투어를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몇몇 사람이 멈춰선 인력거 주변으로 모여 박수로 환영하면서 즐거운 여행이 되었는지 또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물었다. 인력거꾼의 삶을 소재로 한 만화엽서를 작별의 선물로 내주기도 하였다. 교토 아라시야마에서의 인력거 투어는 30분여의 짧은 체험으로 끝났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서로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고 인간에 대한 정을 교감할 수 없었던 아쉬움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아울러 일본 청년 인력거꾼의 등을 바라보며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의 등을 떠올린 것 역시, 결국 서로 다가설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거리감 탓인지도 모르겠다.
오후의 일정으로 방문한 료안지(龍安寺)와 킨카쿠지(金閣寺) 관람도 오전의 관광 못지않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작은 흰색의 조약돌과 그 위에 크고 작은 15개의 자연석을 배치하여 바다와 섬을 선(禪)의 경지로 표현한 가레산스이 정원이 돋보이는 료안지와 연못에 비친 황금빛 3층 누각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킨카쿠지, 이 두 곳 모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대표적인 관광명소였음을 알게 되었다. 교토의 이곳저곳에 산재한 여러 문화유산들을 모두 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K선생님이 감각적으로 선택한 네 곳-니조성, 아라시야마 지역의 인력거 투어, 료안지, 킨카쿠지를 둘러보는 내내 유월 말의 때 이른 장맛비는 강하게 그리고 약하게를 반복하며 계속 내렸다. 선생님이 준비한 마지막 코스는 교토의 음식문화 탐방이었다. 두부와 콩이 주재료인 저녁은 본래는 사찰음식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했다. 하나의 소재인 두부가 이토록 다양한 모습과 새로운 맛, 예를 들면 두부국수, 연두부 튀김, 두부 아이스크림, 콩이 씹히는 두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퓨전 요리로 변신 할 수 있다는 점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후의 디저트로 커피가 나왔는데, 커피에 일본의 검은콩을 배합하여 새로운 맛을 창조해낸 아이디어가 매우 신선했다. 커피 잔 옆에는 작은 메모지에 “단파흑두의 단맛과 브라질 커피향의 절묘한 조화”를 추구하였다는 안내문까지 내 놓고 있으니, 이 또한 이 음식점만의 전통 요리 보전에 대한 긍지와 새로움을 창조해 나가고자 하는 장인정신의 발로라 생각 되었다.
K 선생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우리내외는 교토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JR전철에 올랐다. 플랫폼까지 입장하셔서 우리가 무사히 오사카 행 전차에 오르는 것까지 확인하신 K선생님께, 나는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비록 하루 동안의 상봉이었지만 이날의 만남을 위해 나는 십여 년을 준비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자리 잡도록 이끌어주시고 난 후 2년이 지난 1995년, 일본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신 K선생님을 일본에 가서 만나 뵐 수 있을 날을 기약해 왔는데, 그로부터 12년이 지나고 나서야 뜻을 이룬 것이다. K선생님이 근무하는 대학을 방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그렇게라도 만나 뵙고 돌아오니 큰 계획을 성취한 듯 마음이 흡족했다.
교토의 한나절을 같이 보내면서 나눈 이야기 가운데 K선생님의 “사람의 됨됨이는 상황이 바뀌었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씀이 화선지 위의 먹물처럼 내 마음을 적셨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인정과 상황이 바뀌어도 이해(利害)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관계를 바라는 것은 어찌 K선생님만의 소망일 것인가?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고야 마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마음과 관계를 지키고 싶은 것이 K선생님의 기대이고, 나의 바람인 것이다.
비록 아내와의 결혼 30주년 기념을 위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나의 저시력증으로 인해 앞으로의 행보가 조금은 고달플 것이고, 그 고달픔을 새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을 K선생님께 알려 드리고 싶었던 마음의 행로였다. 아마도 이런 내 마음을 K선생님께서는 눈치 채셨으리라.
진심으로 다가서는 이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진정으로 대하는 이에게 먼저 마음을 내어주는 관계를 단적으로 표현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인간관계의 진정성에 대한 희망의 표징이다. 각박해져만 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실과 진정한 관계의 소중함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던 교토 여행은 매우 짧았지만, 마음의 소통이 이루어진 그 날의 추억만큼은 끊이지 않는 강물처럼 긴 여운으로 흐를 것이다.(2007.7.16)
첫댓글 선생님! 오랫만에 감동적인 글을 읽은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도 일본 여행 잘 했네요 고맙습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따라 일본 修學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저도 이렇게 써보고 싶은 글입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