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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는 원래 |
요란함 |
없건마는 – 있어지나니 |
어리석음 | ||
그름 |
한 줄씩만 해도 몇 시간씩 해야 하는데.. 먼저 심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습니다. 심지는 원래 이렇다는 말입니다.
[없건마는 ~ 있어지나니,]
여기까지가 심지의 설명입니다. 심지는 없건마는 있어진다.
없건마는 있어지는 것이 심지라는 것입니다. 잡초가 나는 것입니다.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다. 그것만 없겠어요? 다 없습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아름다움도 없고 추함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무(無)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공과 무가 그냥 텅빈 공이요 없는 무가 아닙니다. 비어서 꽉 찬
공이요 없으면서 있는 무입니다. 그래서 진공이라 합니다. 이 공(空)을
공이불공이라고 합니다. 공은 공인데 공은 아니다. 란 말입니다.
무는 무이비유 라. 없기는 없는데 없지 않다.
헷갈리죠? 수학과 학생들은 성질 납니다.
문과 생들은 이해를 잘 하는데 이과 생들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공이불공 空而不空
무이비유 無而非有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 이렇게 대표적인 것을 뽑아 놓았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교무님 저는 원래 강연을 못해요.’, ‘교무님 저는 원래 나서지를 못해요’.
다 거짓말입니다. 원래 나서지 못하나요? 원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잘 나서는 것도 ‘원래 잘 나선다’ 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고
원래 못한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원래는 그 어떤 것도 아이에요.
이 자리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면서 능히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어렵죠? 어려워야 나도 해먹죠., ^^
- ㅎㅎㅎ
옛날에 어떤 학생이 훈련을 안 간다고 해서 왜 안 가냐고 물으니 자기는
강연을 못하는데 강연 때문에 안 가련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는 특별히
강연에서 빼준다고 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지금은 그 학생이 강연을 잘
합니다.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너 옛날에 강연 못한다고
하더니 거짓말 했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아요.
자기가 자기를 규정지어서 속습니다. 지가 관념이죠.
이것을 에고EGO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의 관계가 요란해지면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면 글러지기도 하지만 자기 맘입니다. 어리석어져서
요란해지고 글러지기도 하고 글러서 어리석어지고 요란해지기도 합니다.
맘대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삼학 공부는 동시 삼학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표현 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은 사과 맛을 어떻게 표현 할
것이에요? 시면서 달면서 향기가 있으면서.. 그러잖아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요? 우리의 마음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제가 원불교 학과를 갔더니 고기가 일주일에 딱 한 번 나옵니다.
한 두 번은 아침에 달걀이 나옵니다. 그날은 불꽃 튀깁니다. 일찌감치
줄 서 있습니다. 중들이 고기 나오고 달걀 나오는 날은 눈이 빨게
가지고 일찍 나옵니다. 기숙사에서 없으니까 상추를 옆에서 키워서 맨날
상추만 줍니다. 낮에 밥 먹고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졸리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상추에 졸리는
성분이 있답니다.
내 앞에 가는 친구가 밥을 식판에 퍼 담고는 주걱으로 밥 가운데를 푹
팝니다. 그래서 내가 자세히 보았습니다.
‘저 애가 왜 팔까? 소식하려고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데,,
기숙사라 달걀 수 십 개를 함께 붙여서 놓는데 이 친구가 달걀 하나를
밥 구멍 속에 넣고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를 위에 덮었습니다.
겉에서 보니까 달걀이 하나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것을 배웠습니다.
그것 참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재미있습니다.
대개 욕심이 동하면 요란해집니다. 욕심이 동하니까 마음에 분별심과
주착심이 생깁니다. ‘오.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그러면 더 먹겠네..’
그러니까 어리석어지죠? 그냥 따라서 합니다. 원래는 그렇게 하는
사람도 못하게 말려야지요. 그래야 신분검사 할 때 10점입니다. 그런데
나는 따라서 했습니다. 처음에는 세 장을 못했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두 장으로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한 장 먹은 줄 알죠.
제가 그날 저녁에 일기에 이렇게 기재를 했습니다. 탐심에 쫙.
제가 원불교 학과 회장을 했잖아요. 옛 말에 쌀 석 섬은 지고 가도
중 셋은 못 지고 간다는 말이 있듯이 다들 개성이 있어서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진심이 막 나는 것입니다. 저녁에 계문에 빡빡 긋는데.
일기 대조를 할 때마다 신경질이 나는 것입니다.
‘야. 출가한 네가 왜 탐심은 자주 나고
화내는 마음은 왜 이렇게 내냐? 너는 그것밖에 안되냐? ’
이렇게 생각하면서 일기에 체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학대를 합니다.
‘애라, 자식 또 그었냐?’, ‘애라, 자식 또 그었냐..?’
치심은 맨날 걸리잖아요? 신용을 어겨도 치심이요. 늦잠을 자도 치심..
치심은 항상 다 걸립니다. 탐•진•치에 계속 걸립니다.
제가 나중에는 달걀을 딱 한 장만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는 두 장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장
가지고 싶은 마음이 났으니까 이것은 탐심이 아니냐며 계문에 탁
그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다가 보니까 화딱지가 나잖아요?
머리에 스팀이 올라오면 진심에 탁 그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경계가 없는 산으로 갑니다. 일을 안 맡으려고 합니다.
일이 적으면 경계도 적어지니까 성질 날 일이 적어지겠지요? 경계에 안
거슬려야 하니까 먹는 것도 최대한 소식으로 합니다.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원리를 모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제가 일상 수행의 요법에서 마음의 대소유무의 원리를
공부하다가 ‘아하.. 내가 여태 공부를 잘못했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원리는 원래는 없건마는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달걀을 한 장만 가지고 갔어도 두 장 갖고 싶은 마음이 동했으면
욕심이 있는 거잖아요. 더구나 일체중생을 건진다는 출가자가 달걀을
두 장이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출가 수도자가 맨날 성질이나
내고 있고.. 탐•진•치가 다 걸립니다.
그런데 원래 없던 마음 이것을 대(大)자리, 진공자리라고 합니다.
원래는 없었습니다. 달걀 보기 전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잖아요?
그냥 밥 먹으러 갔을 뿐이죠. 달걀을 보는 순간 동한 것입니다.
‘달걀 두 장 먹고 싶다..’
때로는 세 장 먹는 사람을 보면
‘너는 나보다 욕심이 많은 놈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시 볼 때도
‘저 사람은 달걀 세 장이고 나중에 교무가 되어도 욕심이 많을 것이야..’
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피고 있는 것입니다. 탐•진•치가
어우러져서 어리석음과 그름까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이것을 묘유라고 합니다. 묘하게 있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공부를 잘 했으면 탐심이
안 나야지.. 공부를 잘 했으면 성질을 안 내야지.. 누구는 일생에 성질을
한 번도 안 냈다는데.. 공부를 잘못하니까 있어지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먹은 교도님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요..’
여러분 나태심이 일어납니다. 왜 나태심이 일어나요?
공부가 부족해서 그렇죠? 중생이니까 그러잖아요?
있어지는 원리를 아셔야 합니다. 있어지는 원리의 첫째는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 있어지면 어떻게 하겠어요? 제가 어릴 때 연탄을
땠습니다. 밭에 계속 잡초가 나니까 연탄재를 밭에다 싹 깔아서 팍팍팍
밟아버려요. 그러면 잡초가 안 납니다. 잡초만 안 나면 괜찮은데
파, 마늘, 상추, 배추, 열무도 심어서 먹어야 하는데 같이 안 납니다.
정산 종사님이 자식을 사랑하니까 어떤 제자가 대종사님께 물었습니다.
‘정산 종사님을 보니까 자녀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대종사님께서 답하기를
‘너는 목석 같은 사람을 도인으로 알고 있구나..’
대종사님은 말 안 듣는 제자가 있으면 크게 혼냈습니다. 대종사님은
화가 났을 때는 호랑이 같이 눈썹이 위로 올라갑니다. 정산 종사님도
그랬습니다. 대종사님과 정산 종사님은 공부를 못한 것입니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속습니다.
일종의 픽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주로 경계에 따라 감정이 동하지
않는.. 있어지지 않는 사람을 도인으로 설정해 놓습니다. 그래서 누구는
얼마 동안 밥을 안 먹었다더라… 누구는 잠을 며칠간 안 잤다더라…
누구는 한 번도 성질 낸 적이 없다더라… 여러분 운전 면허를 따서
운전을 하지 않으면 딱지를 한 번도 떼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사고라고
합니다. 맞아요? 이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알면 안 됩니다.
둘째, 이것은 이치입니다. ‘있어지는 것’ 이 마음의 이치라는 것입니다.
심지는 경계에 따라 있어지는 것입니다. 원래는 좋은 마음, 안 좋은
마음도 없습니다. 원래는 무선무악입니다. 그런데 경계에 따라
능선능악입니다. 저도 어쩔 때는 마음 속으로 ‘교무 맞아?’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능선능악으로 마음이 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묘유의 이치에 의해서 그렇다. 경계를 따라서 묘하게 있어지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알면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습관과 업력, 근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있어지기는 있어지는데 달라집니다. 제가 만약에 여기서 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앉아서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교무님은 왜 돈을 밝히는 거야.. 기분 나쁘게..’
아니면 내가 여기서 몸무게를 이야기 했을 경우에도 이 중에 누군가는
‘교무님은 하필 몸무게를 이야기해요…’
또는 학벌이야기를 했다면.. 서울대생을 이야기하고
하바드생 또는 에일대생을 이야기를 하면
‘교무님은 기분 나쁘게 교당에서도 학벌 이야기를 하고..’
경계에 따라 있어지는 데 무엇을 따라 있어지느냐? 살아 있으니까
있어지고 이치에 따라 있어지는데 그 사람의 습관과 업력, 근기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인상을 자주 찌푸리는 사람과 잘 웃는
사람은 경계를 딱 주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을 살짝 찔러보면
돌아보면서 ‘뭐여..’ 라고 하겠지만, 욕을 잘하는 사람을 살짝 찔러보면
바로 ‘야. XX..’ 부터 나옵니다. 그 사람은 그것에 습관이 들여 있습니다.
그래서 있어지는데 욕으로 있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의 어떤 것들이 우리 내면에 계속 쌓인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형체는 없지만 쌓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어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상담을 하는데 ‘교무님 제가 저녁만 되면 야한 걸 자꾸
봐집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래. 낮에도 여자를 보면 같이
연결해서 생각이 나겠다. 재미있지?’ 라고 했습니다.
저녁에 자꾸 그런 것을 보면 나중에도 연상 작용이 쉽게 일어납니다.
저녁에 염불한 사람은 어쩌겠어요? 아침에 청소를 하다가 방송에서
우연히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출근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노래를 부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연속극을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연속극이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 잠 자기 전에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죽을 때도 똑 같습니다. 최후 일념이 최초의 일념입니다.
우리의 습관과 업력, 근기에 따라서 각기 달리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안 있어지지 않겠어요?’
심신 작용 心身作用
일원상 서원문에 보면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혹은 진급으로 혹은 강급으로 혹은 은생어해로 혹은
해생어은으로> 라고 나와 있죠? 그런데 일기법에 보니까 <심신 작용의
처리 건을 기재하는 것>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심신 작용이
없는 것이 도인이 아니라, 심신 작용은 있어지는데 그것이 있어질 때
어떻게 빨리 처리를 하느냐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행을 타고 어떤
사람은 완행을 타고 또 어떤 사람은 딱 멈춥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도 미운놈 밉고, 이쁜놈은 이쁘다.’
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처사를 할 때는 어떻게 해요?
‘원근친소에 끌리지 않고 한다’
고 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은 도인이 덜 되었죠? 마음에 밉고 이쁘고 하잖아요?
소설이나 영화가 잘못하면 큰 죄업을 지어요? 많은 사람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나는 저 경지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인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제자 팔산님이 돌아가셨을 때 펑펑 우셨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너무 상심 말라고 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상심이야 하겠냐 만은 슬프지 않느냐.’ 많은 사람들이 슬피 우는
대종사님을 바라보고 과거의 소설과 비교하는 사람은
‘저 분은 부처님이 아닐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먹고 싸죠? 일을 하다가 보면 시비가 생깁니다. 조직을
운영하다가 보면 누군가는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봅니다. 인사를 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안 뽑힌 사람은 손해를 봅니다. 일을 하다가 보면
시비이해와 음양이치를 따라서 반드시 반대 급부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렇게 있어지는 것은 신앙하지 못한 사람은
‘저 사람은 부처님이 아니다’, ‘저 사람은 도인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다 그분이 죽고 나면 존경을 합니다.
‘나중에 봤더니 여래위였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대산 종사님의 법문을 보면 너무 좋아요.
그런데 보니까 시비이해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저분은 여래위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요새는 참회를 합니다.
‘아 이분이 살아 있는 부처였는데 내가 몰랐구나..’
우리 중생들은 자꾸 죽고 나면 그때서야 존경하고 우러러보려고 합니다.
왜? 있어지는 것을 신앙하지 못하니까.
옛날에 초등학생이 그랬답니다. 선생님하고 같이 화장실에 들어
갔습니다. 옆에 가만히 있는데 선생님이 똥을 뽕 싸니까.
‘음메 선생님도 똥 싸네..’ 라며 놀랐답니다. 그 애는 선생님은 우러러
보았는데 놀란 것이죠.
사람들이 웃기는 것이 있는데 가까이 사는 사람의 시비이해를 보고
존경하고 받들 줄 모르고 멀리 있는 사람. 아까 똥 안 싸는 모습을 보고
가끔 한 번씩 보면서 또는 돌아가신 사람만 존경합니다.
그가 부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처라는 것에 대해서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일 속에서
시비이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나에게 손해가 되면 그 놈은 나쁜 놈이 됩니다. 그 사람이
이치적으로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취사를 했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만 바라본
분별성과 주착심으로써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니까
가까인 있는 사람 중에는 아무도 부처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가서 생략하면서 하겠습니다.
다음은 그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죠?
마음의 원리는 없다가 다시 있어지는 것이 이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있어지는데 그것이 변화를 합니다. 있어졌다가 없어졌다가.. 제가
달걀을 먹을 마음이 났다가 안 된다는 마음이 났다가 또 누가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해버리고 합니다. 그러죠? 유무로 변화를 합니다.
< 있어질 때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 혜, 계를 세우자. >
여러분들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누구하고 싸우거나 성질 날 일이 있거나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합니까?
만약에 내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교회에 가서
‘주여 제가 한 주일 동안 못된 짓거리를 많이 했습니다. 저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 잘 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원불교 일기를 쓰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오늘 낮에 잘못을 해 놓고 저녁에 일기를 쓰면서
‘제가 오늘 잘못했습니다.’ 라고 반성을 합니다.
그런데 원불교 진짜 공부인은 위의 두 가지를 다 합니다.
법회에 와서 참회도 하고 일기를 쓰면서 반성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원불교 불공을 당처 불공, 실지 불공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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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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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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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
어리석음 |
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
혜 |
를 세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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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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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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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 라는 것은 그때, 거기서, 그 마음을 이란 뜻입니다.
그때 거기서 그 마음을.. ‘그 요란함, 그 어리석음, 그 그름’ 을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설거지를 예로 들면 간단합니다. 무언가를 튀겨 먹거나 누룽지가
눌어붙었는데 며칠 후에 그것을 설거지 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날
저녁에 하면 덜 힘들지만 그래도 힘듭니다. 그러나 식사 후에 물에
담그었다가 바로 닦으면 쉽게 닦아집니다.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때 그 순간에 해야 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게 할 때 자성의 정, 혜, 계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세울 것이냐? 말입니다. 그때만 세울 것이냐?
요새 마음 공부를 하는 팀 중에 그런 팀이 있습니다. 좌선은 안
한답니다. 왜? 그때 그때 경계에 따라 마음만 챙기면 되니까.
이런 뿔다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공부의 80%는 어디에 있는 줄 아세요? 이것은 모든 이치에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기업을 살리는 데도 학생이 공부를 하는데도 원불교
마음공부도 마찬가집니다. 뭐가 중요하죠? 미리 준비가 중요합니다.
계획과 구상을 잡아서 저금을 했다가 사업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대종사님은 수행편부터 안 냈습니다. 먼저 총서편에서 설계도를 딱
짰습니다. 또 변산에서 총부로 바로 안 나오고 먼저 영산에서 기도를 한
다음에 변산에서 법을 짜면서 주축이 되는 제자를 모아 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익산에 가서 회상을 창립했습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은
어떻게 해요? 회상부터 창립합니다. 그 다음에 법을 짜고 사람을
찾습니다. 대종사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미리 연마, 미리 준비입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 가면 미운 사람이 있답니다. 그러면 미운 사람을 볼
때마다 마음을 챙길 것입니까? 아닙니다. 뭐 하라는 이야기입니까?
미리 하라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에 80%가 달려있습니다.
그 요란함의 ‘그’는 ‘그때 그 순간’ 입니다.
그 경계 속에서 마음을 바로 챙겨라 그 말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보라는 것입니다.
‘아, 내가 끌려가고 있네.. 또는 내가 요란해졌네..’
그러면 녹아나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 경계에 끌린 마음과 경계에 끌린 마음을 보는 내가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둘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경계에 끌려가는 욕심의 자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본심의 나가
있습니다. ‘일일시시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것이요.’
이것이 대적공입니다.
직장에 나를 계속 괴롭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기도합니다. ‘법신불 사은님 오늘도 제가
그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내일은 좀더 잘 해보렵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텅 빈 마음으로.. 자성자리에 가야 합니다. 자성 자리..
즉, 심지에는 원래 미움도 예쁨도 없는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또 있어지면 나는 공부를 못해서 있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미움도 예쁨도 없는데 경계에 따라 있어집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자성 자리를 미리 연마를 통해서..
즉, 깨침과 자성 반조를 통해서 미리 내가 챙깁니다.
그리고 회사에 출근해서 그 미운 사람을 보기 전에 또 한 번 챙깁니다.
‘사은님 오늘 조금만 동하게 해주세요’ 자주 사은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대하는 그분이 점진적으로 달라집니다.
그 경계가 끝나고 나면 내가 또 대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얼마나 경계에 마음을 챙겼는지를 대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부는 미리 계획이나 준비를 하고 경계의 그 순간에 내가
마음을 챙기고 그리고 경계가 끝나고 나면 대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획과 실행과 대조 아니에요?
회사도 안 되는 회사는 대조를 안 합니다. 원불교 공부도 왜 성장이 안
되는 줄 아세요? 대조를 안 하니까 그렇습니다. 대조는 자기 스스로도
하고 단장님이나 교무님에게 점검을 받으셔야 합니다. 대조를 안 하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에 빠져서 계속 헤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근병입니다.
지금 원불교에 마음 공부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순간, 그 어리석음,
그 그름만 공부하는 팀이 있고, 있어질 때 내 안의 원인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팀이 있습니다. 누구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볼 때는
100%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을 내인, 연을 외연이라고 합니다.
내(內) |
인(因) |
외(外) |
연(緣) |
|
과(果) |
제가 강원도에 갔는데 나무를 잘라서 놓았는데 다 다릅니다.
껍질이 다르고 안에 나이테도 다르고 다 다릅니다. 왜 다르죠?
첫째는 씨가 달라서 즉, 인이 달라서도 다르지만, 또 하나는 연이
다르기 때문에 다릅니다. 물이 별로 없거나 햇빛이 안 들거나 바람이
세게 분다던가 땅이 영양가가 없어서 너무 척박하면 연이 안 좋으면
나무가 작고 나이테 사이가 좁습니다.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은 인입니다.
대나무에서 대나무가 나오지 콩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그 대나무가
나와서도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크거나 작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들 아침마당 보았죠? 주로 뭐라고 해요?
‘네가 문제라고 합니다.’ 특히 여자들은 남편 얼마나 원망하는 줄
몰라요? 전부 남편이 잘못 했답니다. 남편은 경계, 즉,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마음을 비춰보는 대상입니다.
그렇지만 인만으로써 과가 오지 않습니다. 콩씨가 땅을 만나야 싹이
틉니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이 경계의 탓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뭐예요?
보름달이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보름달이 뭐로 보여요?
옛날에 보름달 빵이 있었는데 지금도 나오는지 모르겠네.. ^^
달콤해서 맛있었습니다. 안에 하얀 크림도 맛있었는데…
- ㅎㅎㅎ
그 보름달을 보면, 분명히 달은 가만히 있습니다. 달이라는 경계가
하늘에 떠 있는데 배가 고픈 사람은 빵으로 보입니다.
어떤 여자가 군대간 남자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는데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저녁에 가는데 달도 밝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었답니다.
그런데 만나서 결혼 날짜를 말할 줄 알았는데 이 남자가 새로 사귀는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밝은
달도 바람도 모두 슬프게 보였답니다.
그럼 지금 달이 문제입니까? 달이 슬픈 것입니까? 내 마음의 분별성과
주착심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네가 나를 무시해서..’ 그럽니다. 약자일수록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혹은 무시하는 마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진짜 강자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큰 병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별로 표시도
안 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병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금방
잉크 빛으로 물들어버립니다. 내 마음의 그릇이 크고 비어있으면 경계가
와도 영향을 조금밖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우리 선허가 성격이 특이한데 나하고 얽혔습니다.
상담하는 사람이 나에게 ‘네 잘못이다. 네 마음 공부해라.’ 고 합니다.
그런데 선허를 만나는 사람마다 똑 같은 소리를 한다면?
선허가 경계이고 연입니다. 선허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잘난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 되게 잘난체하네?’ 라고 생각하고는 ‘어 내가 분별심이 있네..
이런 마음이 든 것은 내 잘못이야..’ 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도 상이 있는 것입니다. 나만 혼자 그 생각을
가졌다면 내가 원인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잘난 척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도 문제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우리가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더 큰 것은 무엇이냐? 가만히 있는 달이 슬프게도 보이고
기쁘게도 보이고 빵 같이 보이는 것은 더 들어가면 안에 내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좋은 사람은 두 시간짜리 영화가 금방
지나갑니다. 경전을 사경 하라고 하면 두 시간이면 미쳐버리려고 합니다.
두 시간 선을 하라고 하면… 책을 보라고 하면 어느새 자고 있습니다.
게임 하라고 하면 두 시간이 금방 가버립니다.
시간은 그대로 지나가고 있죠. 그런데 마음의 시간은 다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금방 가버리고 안 좋아하는 것은 그렇게도 시간이
안 갈까요? 시간은 평등성이 있다고 하죠. 그 사람 시계와 내 시계가
똑 같습니다 그런데 다르더란 말입니다.
원불교 학과에 성가 시간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죽으려고 합니다.
여지들은 좋아하는데 남자들은 음악 별로 안 좋아해요. 남자들은 재미
없다고 안 하려고 합니다. 여학생들은 너무 재미있다고 좋아합니다.
힘든 시간인데 왜 이리 금방 끝나냐고 합니다. 이것이 내 마음의
인•연•과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 공부를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마음이 문제이니까 네 마음만 잘 바라보아라. 또는 그때 그 마음만
바라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연•과에서 과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내 마음에서만 해소가 되면 되는 것인가?
예를 들면 우리 대현이와 무슨 일이 있어서 서로 얽혔습니다. 그래서
내가 대현이에게 ‘대현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럼 끝납니까? 대현이는 이미 기분이 나빠있는데..?
성질 난 대현이의 마음, 그것은 대현이의 공부입니까?
자칫 잘못하면 나 혼자 자아 도취해서 내 마음만 공부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사은과 함께하는 결과여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결과가 은혜가 되면 좋겠지만 처음에는 챙겼냐 안 챙겼나를 보는 것이
과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울 때 못 세웠어도 마음을 챙겼으면
유념입니다. 나중에는 나 혼자 마음 좋으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되어야지 세운 것입니다.
그 과가 제대로 은혜가 되어야지 마음 공부가 끝난 것입니다.
그것도 사은의 박수 속에서… 나는 괜찮은데 적이 있으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없게 하는 것으로써 와 없애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기력이 쇠해져서 곧 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생사 초월 공부를
해야겠다고 염불을 하는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이고 나
죽네. 나 죽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것은 무슨 공부에요?
이 둘 중에서
없게 하는 것으로써 |
– 자성의 정공부 |
없애는 것으로써 |
- 정공부 |
위의 것입니까 아래 것입니까?
- 아래
원불교 공부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성을 회복하고 자성을
세우면 없게 됩니다. 자성자리에는 본래 생사가 없습니다. ‘심지는 원래
생사가 없건마는 경계에 따라 생이 있고 때가 되면 사가 있나니, 그것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자.’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 없건마는’ 에 딱 빠집니다. 자성의 원리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죽기 싫으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생사 있는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 염불 공부를 하는 것은 ‘없애는 것으로써’ 그것을 ‘정공부’ 라고
합니다.
그럼 ‘자성의 정공부’는 무엇이냐? 자성 자리에는 생사가 본래 없습니다.
이치의 원리를 압니다. 그래서 ‘아 생사가 본래 없지.’ 그래서 그 자리를
딱 대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염불을 하는데 생사가 없는 그 자리에
마음 자리를 가져다 대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의 정공부’는 생사가 없는 자성 자리에 들이대는 것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자심미타에 귀의합니다.
그래. 자심미타에 생사가 원래 없지.’
원리를 알고 하면 없게 되고, 모르는 사람은 없애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알기 전에는 없애는 것도 필요합니다.
없애는 공부를 잘하다 보면 나중에 폭발합니다.
‘이것이 보자 보자 하니까 다섯 번 참았는데 안되겠어. 너 한대 맞아라.’
왜 그러느냐? 이 사람은 인위적으로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성 자리는 그때 그때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성의 정•혜•계 공부는 불리자성 공부입니다.
그때 그때 참았다는 것이 없습니다. 기억은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참는다 만다 한 것이 자성 자리에 딱 가니까 녹는 줄 모르게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사람은 마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왜? 그 사람은 축적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때 그때 비워버리니까
그때 그때 새로운 것입니다. 자성은 누가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는 것은 자성 반조라고 합니다. 자성 반조와
같은 말로 혜광 반조라고 합니다. 지혜의 빛을 돌이켜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은 교법을
반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상 수행의 요법의 교리에 대조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지영이가 훈련을 다녀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전에는 단장이나 제가 어떤 말을 하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너 왜 법회 때 늦냐? 왜 중앙이 카페에 글도 안 쓰냐? 너 왜 지각하냐?
너 왜 신촌 가서 노래 부르는데 저녁에 싸 돌아다니느냐?’
이렇게 말을 해도 자기는
‘나 이 정도면 잘하지.. 내가 이 정도면 열심히 하는 거야.’
그러면서 기준을 자기보다 못하는 사람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저놈보다 내가 낫다 낫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에 훈련을 가고 나니 ‘내가 잘못 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죠? 신심과 서원이 솟아오르고 법에 대한 앎이 있어지면 알아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자성 자리가 본심이고 정심입니다. 정심이 솟아
오르니까 사심이 알아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신심과 서원이 아주 고마운
것입니다. 참 반가운 일입니다. 자기 스스로 알아서 답이 나옵니다.
이런 정심이 안 날 때는 교무님 말이 자꾸 부담스러워요. 알아서
교무님을 피하고 다닙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이러면서
살살 피하고 다닙니다. 왜? 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합리화하고 정당성을 부여 하고
자꾸 좁아집니다.
이 없애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원리를 모르고 하기 때문에 형식만
따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죽기 싫어서 죽어라 염불하고는
‘나는 염불 몇 시간 했다’ 고 형식만 따르는 것입니다.
없게 하는 공부는 풀이 나오면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없애는 공부는 풀이 나오면 풀 위에 돌로 눌러 놓는 것입니다.
당장은 안 보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악착 같이 기어
나옵니다. 즉, 원리를 모르고 하면 언젠가는 비집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교당을 멀리합니다.
‘교무님 강원도에 다녀 오겠습니다.’
‘왜?’
‘해돋이 보면서 기도 좀 하려고 합니다.’
근원적으로 그때 그 마음을 내 자성자리에서 내가 해결하지 못하고 술을
먹던가 좋은 팬션 같은 데 가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작은 문제는 해결이
되어도 뿌리가 확실히 있는 것은 그것으로 해결이 안됩니다.
본래 뿌리 없는 나무, 뿌리 없는 그 마음, 자성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자성을 대조해야 합니다.
없게 하는 것은 절대의 세계라 하고
없애는 것은 상대의 세계라고 합니다.
생사가 있는 마음으로 ‘아이고 두려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생과 사가 있는 상대의 마음으로 없애기 위해서 염불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절대의 세계는 생사가 없는 것을 바탕 해서 능히 생사가 있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상대를 포함 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만법과 더불어 짝합니다. 그러나 절대는 짝하지 않는 그 자리.
이것이 자성 자리입니다. 생사가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제자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상심이야 하겠느냐 만은..’
그 소리는 상심이 없는 그 자리에 바탕 해서 능히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무자리로 다시 마음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애는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자성 자리를
모릅니다. 슬프면 슬프하고 기쁘면 기뻐합니다. 왔다 갔다 상대심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하고 아침에 수양을 하는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 있는
상대의 세계에서 살다 보면 그것이 내 본래의 세계인 줄 알고
착각합니다. 그러니까 아침 수양이나 저녁에 참회 반조를 통해서 절대의
세계에 자꾸 안주해 가라는 것입니다. 절대의 세계에 바탕 해서 상대의
세계를 운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세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의 세계에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의 원리의 세계를 알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아까 우리 삼성 교우가 참 잘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 그름이 없는 자리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누구나 좋아한다.’
맞아요. 여러분 대의에 합하고 정의에 합하고 그쪽 길로 가면 다 박수를
쳐줍니다. 내 안의 욕심과 어두운 가족이 박수를 안 칠 뿐입니다.
그 대의에 합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 본래 그 마음이기 때문에
다 박수를 쳐 줍니다.
왜? 심지는 원래 그런 대의가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내 욕심이
대의가 없고 무명에 갇힌 내 가족, 원근친소에 끌린 사람이 대의가 없을
뿐입니다. 사심이 녹고 정심으로 살고 소의, 작은 뜻이 아니라 대의에
맞게 살면 본래 그것이 내 모습이기 때문에 다 박수를 쳐주고 환영해
주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가 예쁩니다.
감사합니다.
타이핑:
편 집:
950112_화공_38_제1장 일상 수행의 요법-2.3.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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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혹시 有而非有가 아닌가요? 無而非有라 하셨는데...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동영상을 다시 확인해 보았는데 교무님이 정확하게 무이비유라고 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