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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화영 吳華英 (1879~1960) "세 차례 옥고에도 변절하지 않은 독립지사"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金岩面) 대촌리(垈村里)에서 농사를 짓던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창(高敞)이고, 호(號)는 국사(菊史)이며, 이명으로 오하영(吳夏英)을 사용하였다.
어려서 백부(伯父)인 오석기(吳錫錡)에게 출계(出系)되었고, 고창(高敞) 오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평산군 문무면(文武面) 물안리(物安里)로 이거(移居)하여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90년부터 1898년까지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 무렵 동학(東學)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1900년 무렵 돌아와 27세 되던 1906년까지 곡물무역상(穀物貿易商)을 하였다. 기독교에 입신하여 1906년 5월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에서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크램(W. G. Cram, 奇義男)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후 31세 되던 1910년까지 농사의 감농(監農)으로 있으면서, 1909년 1월 남감리회전도인으로 임명되어 1911년까지 개성서구역(開城西歐域)을 담당하였다.
1911년 전도사 직첩을 받고, 1913년까지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협동으로 서울 냉천동에 교사를 마련한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후에 감리교신학교로 개칭)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 후에 원산중앙교회로 개칭)로 전임하였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金永鶴), 최태곤(崔泰崑) 등과 함께 미국 남감리회 감독 앳킨스(Bishop James Atkins)에게 집사목사(執事牧師, deacon) 안수를 받고, 그대로 원산상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7년 9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서울 종교교회(宗橋敎會) 부담임으로 파송받았다. 1918년 10월 개성에서 열린 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장로목사(長老牧師, elder) 안수를 받고, 서울 종교구역 담임 목사로 파송받았다. 1918년 12월 12일 협성신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였다.
이 무렵 남감리회는 1919년 1월부터 감리교회 선교100년 기념활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중순경 이 일과 관련하여 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친구 정춘수(鄭春洙)가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2월 16일 주일예배 설교를 그에게 부탁했는데, 그를 통해서 서울에서 추진되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3 · 1운동에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월 17일 정춘수와 함께 박희도(朴熙道)를 찾아가 독립운동 추진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2월 19일경 서울 서대문에 있던 피어선성경학원에서 수표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친구 신석구(申錫九) 목사를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여 추진하려고 하는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박희도의 연락을 받고 2월 20일 박희도가 교감으로 있던 영신학교(永信學校) 사무실로 정춘수, 오기선(吳基善), 신홍식(申洪植) 등과 함께 찾아갔다. 마침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李昇薰)을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 동지 포섭 문제등을 의논하고, 개성 지역 동지 포섭을 맡기로 하였다.
2월 21일 오후 7시경 남대문 이갑성(李甲成) 집에서 이승훈, 함태영(咸台永), 신홍식, 안세환(安世桓), 현순(玄楯) 등과 만나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안세환을 일본 도쿄(東京)에 현순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2일 개성으로 가서 25일까지 친동생인 오상근(吳尙根)의 집에 숙박하면서 이경중(李敬重), 김지환(金智煥) 등을 만나 서울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그곳에서 찬성자를 모집하여 서명 날인을 받으라고 부탁하였다.
2월 23일 김지환의 부탁으로 개성 남부예배당(南部禮拜堂)에서 설교한 후 오후에 만월대(滿月臺)에서 이경중, 김지환 등 8~9명과 다시 만났으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서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저녁 10시경 북부교회에서 이경중, 김지환, 최중순(崔重淳), 오진세(吳鎭世), 이강래(李康來) 등과 다시 만나 독립운동 준비상황을 설명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2월 26일 개성에서 강조원(姜助遠)이 내방하자, 그에게 전에 개성을 방문했을 때 독립선언서 발표일이 3월 4일이라고 하였으나, 서울에서 다시 의논하여 3월 1일로 변경되었음을 알려주었다.
2월 27일 신석구 목사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와 함께 그날 오후 1시경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 사무실에서 가진 기독교측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초안을 확인하고,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측 민족대표자 16인을 선정하는 데 참여하고, 개성지역 선언서 배포를 맡기로 하였다.
2월 28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봉함하여 종교교회 부근에 사는 40세 가량의 신자에게 개성에 가서 이경중에게 전하고, 이경중이 부재중이면 강조원에게 전하도록 부탁하였다. 그 사람이 그날 밤에 돌아와 강조원에게 전했다고 알려주었다. 2월 28일 저녁 가회동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자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독립선언식 장소를 이갑성의 장소 변경 건의와 손병희의 제안으로 명월관(明月館) 지점인 태화관(泰華館)으로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이승훈 등 다른 민족대표와 함께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상순 일본 경찰과 검찰의 취조가 일단락되고, 검사국에 의해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다.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관할위(管轄違)’로 예심종결 결정을 받고, 최고심인 고등법원에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한다.’는 특별 예심 결정을 선고하여 다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공소 불수리’ 판결을 하여 다시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경성복심법원 항소심 공판은 9월 20일 시작되었는데, 그 셋째날인 9월 22일 법정에서 재판장의 “합병을 반대하고 (아직도) 독립을 희망하는가?”라는 신문에 “사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앗겼거든 반대하는 회포와 독립하고자 하는 희망이야 어찌 다 말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문제이나 어느 때든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 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런 수치를 당하면서도 생명을 보존하여, 익어가는 조선 독립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고 대답하여 독립의지를 피력하였다.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남선(崔南善), 이갑성, 김창준(金昌俊)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월과 미결구류일수 360일을 형기에 산입하는 판결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5월 5일 이갑성과 함께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출옥 소감을 묻는 『동아일보』 기자의 질문에 “교역자의 생활을 여러 해 했으나 이번 감옥 생활을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을 얻은 일은 없었고, 밖에 있을 때는 매우 우리민족의 전도(前道)에 대하여 비관하였으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조선 사람도 금후로부터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났고, 조선인의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니 우리가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없는 현상을 구제하여야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출옥 후 잠시 수표교교회를 담임하였다가, 1922년 9월 다시 종교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종교교회에 시무하고 있던 1923년 1월 12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자작회(自作會)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우리의 생도(生途)는 오직 자작자급(自作自給)’이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자작회는 1922년 11월 연희전문학교 학생 염태진(廉台振) 등 50여명이 경제자립과 물산장려를 목표로 창립한 물산장려운동 단체였다. 1924년 1월 24일 혁청단(革淸團)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하여 ‘풍기개선(風紀改善)에 대하여’라는 연제로 강연하였다. 혁청단은 1923년 12월 서울에서 전문학교 및 중학교 교사와 종교가 등이 주도하여 일제가 공인하던 공창제(公娼制) 폐지를 비롯한 사회풍속 교정을 목표로 설립한 단체였다.
1925년 3월 22일 신흥우 집에서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유성준(兪星濬), 장두현(張斗鉉), 구자옥(具滋玉), 유억겸(兪億兼), 이갑성, 박동완(朴東完) 등과 함께 동지회(同志會) 계열의 국내 조직인 흥업구락부(興業具樂部)를 결성하였다. 흥업구락부는 표면상으로는 민족의 복지 향상과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해외 독립운동과 연계된 정치적 비밀결사였다.
그 무렵 오랜 투옥생활과 격무로 건강을 해쳐 목회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1925년 4월 종교교회 담임의 사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고 휴직 상태로 있다가, 같은 해 9월 연회에서 개성 북부교회로 파송받아 1927년 9월까지 그 교회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다.
개성 북부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1927년 2월 서울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협동전선의 최고 기관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될 때 51명의 본부 간사 중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신간회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출범하려 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 “단결 공고”, “기회주의 일체 부인” 등 간결하고 온건한 강령을 내세웠지만, 그 후 본부와 각지회의 현실적 정책 제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민족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해방, 자치운동의 부인, 타협적 개량주의의배격, 민족의 대동단결, 민족적 권익의 실현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였다.
1927년 9월 서울 종교예배당에서 열린 조선남감리회 연회에서 조선감리교회의 합동과 독립을 미국 남감리회 총회에 청원하기로 하였다. 양주삼(梁柱三), 홍종숙, 윤치호, 홍병선(洪秉琁) 등과 함께 청원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연회에서 다시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아 시무하면서 신간회 본부 간사를 겸하였다.
전국 각지에 군단위의 신간회 지회가 설치되고, 간도 · 일본 등지에까지 지회가 설치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일제는 신간회 본부는 물론 지회들까지도 ‘과격한 불온단체’로 보고, 그 임원들을 ‘요시찰인물’로 감시하며, 집회나 활동을 불허하거나 방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정된 정기대회마저 불허하여 1929년 3월 정기대회를 앞두고는 변호사 허헌(許憲)을 위원장으로 하는 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여기서 서무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의 불허로 이 대회도 열리지 못하고 6월 복대표대회라는 약식 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 규약을 개정하여 회장제를 집행위원장제로 바꾸었다.
이 무렵 수표교교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였으나,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 종교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12월 경 이를 지원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여 시위하려던 허헌, 이관용(李灌鎔), 홍명희(洪命熹), 조병옥(趙炳玉) 등의 계획에 찬동하여 참여하려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다.
1930년 12월 남감리회와 북감리회가 통합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할 때 남감리회측의 특선위원(特選委員)으로 참여하였다. 1931년 4월 28일 조선물산장려회 신임이사회에서 유성준, 설태희(薛泰熙), 김용기(金容起) 등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31년 5월 12일 서울 종로에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설립한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을 개원하고 초대 원장을 맡았다. 1932년 5월 12일 사회영중앙실비진료원유지회(社會營中央實費診療院維持會) 제2회 정기총회에서 현동완(玄東完), 이대위(李大偉), 홍병선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4년 6월 4일 민중의원유지회 제4회 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고, 1935년 7월 9일 서울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사회영민중의원 유지회 정기총회에서도 이사로 연임되었다. 그 동안 목회는 1931~1932년 서울 수표교교회, 1932~1934년 서울 상동교회, 1934~1935년 서울 연화봉교회(蓮花峯敎會)에 파송받아 담임으로 시무하였다. 1935년 조선감리회 중부연회에서 수표교교회에 파송받아 시무하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하였다.
그후 고양군 지도면화정리로 이주하여 과수원을 경영하던 중 1938년 5월 22일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신흥우, 윤치영(尹致暎), 구자옥, 정춘수 등과 함께 서대문경찰서에서 가혹한 신문을 받고 9월 4일 흥업구락부원 일동의 이름으로 이른바 ‘전향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1일 여운형(呂運亨)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받았다. 9월 19일 이갑성, 남상철(南相喆), 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 총무부를 맡았다. 10월 18일 독립운동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조직된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1월 18일 중국 동북지구를 중심으로 한 · 중 양국 전재동포의 근본적 구조대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에 취임하였다. 11월 24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강당에서 실업자, 고물가, 빈민구제, 38도 남북 물자교류, 주택, 기타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결성된 조선사회문제대책중앙협의회(朝鮮社會問題對策中央協議會)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5년 12월 22일, 남한 내 23개 정당이 합동하여 결성한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의 정치국 국장에 임명되었다. 12월 28일 신한민족당을 대표하여 신탁통치반대 결의를 표명하고,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託治反對國民總動員會)가 통합하여 새로 조직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이 무렵 「3 · 1운동과 나」라는 제목의 글을 『자유신문』 1946년 2월 27일자에 기고하여,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 · 1(운동) 그 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喚起)해야만 될 것 같다.”고 회고하였다.
1946년 5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 회장을 맡아 국민대회를 치르고 미군정 당국에 체포되어 5월 17일 군정재판에서 이른바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3개월과 벌금 2만원의 언도를 받았으나 집행이 유예되었다. 6월 11일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주최 전국대표대회 사회를 맡았다.
이어서 6월 13일 운현궁에서 열린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임되었다.
1947년 11월 18일 과도입법위원 시국요강심사 특별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1930년대 사회영민중의원을 운영할 때 함께 했던 이대위, 유석창(劉錫昶) 등과 함께 대학설립운동에도 관여하였다. 정치대학 기성회 회장을 맡아 1948년 재단법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설립하고, 그 이사 및 관장을 맡았다. 1949년 9월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이 되면서 초대 학장을 맡았다. 1949년 3월 12일 민족정신선양회에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종로구(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6월 19일 제2대 국회 개원식 사회를 맡았다. 그러나 곧 바로 6 · 25전쟁이 일어나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1950년 가을 납북되었다.
납북 후 북한에서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북한 당국도 70이 넘은 고령이고 독립운동 경력이 있어 함부로 대우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축사를 하였고 같이 납북되었던 조소앙(趙素昻),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그 최고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1960년 9월 2일 별세하여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오화영(吳華英)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국사(菊史), 다른 이름으로는 화영(華泳), 하영(夏英)이 있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오재식의 책에 따르면, 1904~1908년 사이에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 동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구국의 열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 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는 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시절 원산여(女)선교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 성경학원에서 발족되었는데 흔히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다. 이 성경학원은 전도부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원산여선교회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 Noyes)는 아래와 같은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이곳(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 회(band)를 하나 만들었는데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내서 전도부인 1명을 보조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님 사업에 있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종교교회 담임목사 시절 그는 도도히 흐르는 3.1혁명의 역사적 물줄기와 만나게 된다.
3.1혁명 보름 전인 1919년 2월 16일, 정춘수가 그가 시무하고 있던 종교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당시 원산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정춘수는 오화영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날 밤 정춘수는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에게서 들은 말이라며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천도교 측에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화영 역시 신문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듣고서 조선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다. 한일병탄 후 '심한 고통과 불안감'을 갖고 있던 그로선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박희도를 만났다. 박희도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3일 뒤인 2월 20일 밤, 오화영은 창신동 박희도 집에서 이승훈·신홍식·오기선·정춘수 등과 만나 천도교단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은 개성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 무렵 그는 신석구에게 동참을 권하였고, 27일 그로부터 최종적으로 약속을 받아냈다.
이튿날 21일에는 함태영·이승훈·현순·박희도·신홍식·오기선·안세환 등과 함께 이갑성의 집에 모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 문제를 다시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화영은 개성을, 이갑성은 경상도를 맡기로 했다. 또 일본 정부 등에 제출할 청원서는 함태영이 책임지고 준비하고 현순은 상해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통지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22일, 그는 약속한 대로 개성으로 떠났다. 개성 남부예배당에서 김지환·오세진·이경중·최중순·이강래 등을 만나 서울의 거사 준비 소식을 알려주면서 동참을 호소했다. 23일에는 보통학교 교사 이만주와 미국인 교장 이영덕에게도 서울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날 그는 남성(南星)병원으로 친동생 오은영(吳殷英)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의 집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25일 박희도로부터 거사일이 3월 4일에서 1일로 변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에는 함태영·이승훈·박희도·이갑성·이필주·안세환·최성모 등과 만나 일본에 보낼 기독교 대표로 안세환을 결정했다. 이날 이들은 한강 인도교에서 만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많아서 인근 일식집으로 옮겨 얘기를 나누었다.
27일 이필주 집에 이승훈 등 10명이 모여 선언서와 청원서 초고를 살펴보았다. 거사 전날 28일 밤, 재동 손병희 집에 동지들이 모여 최종점검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갑성이 학생 등 많은 사람이 공원에 모이다 보면 소요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결국 거사장소를 탑동공원에서 명월관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29명이었다. 선언식이 끝난 후 33인 일행은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나온 관헌들에게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당일부터 경찰이 취조를 하였고 얼마 뒤부터 재판이 이어졌다. 3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있은 검찰 취조 때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그는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연유 등을 당당하게 밝혔다. '언제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그는 '남의 조선이 된 조선이 또 다시 나의 조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갖고 있었다'고 답했다. (매일신보, 1920.7.16.)
▲ 오화영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매일신보)
3일 뒤 열린 재판에서는 허헌(許憲) 변호사의 문제제기로 '공소 불수리' 문제로 논란이 됐다. 그러자 오화영은 피고석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향해 '지금까지 재판장이 심문하는 방법을 보건대 피고들에게 이 사건이 생긴 근본원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재판장 생각에 피고들이 죄가 될 만한 점만 물어보고 정 물어볼 것은 물을 줄도 모른다'며 강하게 힐난했다. 그의 신문조사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그대는 선언서를 배포하였는데 어째서 그럴 일을 하게 되었는가?
답: 조선은 일본이 합병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다가 대정8년(1919년) 2월 16·17일경 원산에서 온 야소교 목사 정춘수가 조선도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하므로 그 일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었다.
문: 그 선언서에 따라 조선을 독립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합병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생각해보면 이전보다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은 도저히 일본사람과 동화할 수 없는 형편이고 또한 조선은 상당한 역사가 있으므로 독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합병은 강제적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독립을 위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한 것이다.
문: 그대는 이 선언서 외에도 또 다른 서면을 작성한 일이 있는가?
답: 청원서가 있으나 최린이 관계하고 있으므로 상세한 것은 모르겠다.
문: 그대들은 독립을 시켜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만일 이 일이 성립된다든지 안 된다든지 하면 어찌 할 것인가?
답: 불성립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은 정하지 않았으나 된다고 하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모든 일을 결정할 것이다.
문: 그대가 야소교인이니까 외국 사람의 원조와 후원으로 이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답: 그런 것은 아니다.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
(3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피고는 이 운동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한 줄로 생각하는가?
답: 나는 한일합병의 취지가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합병하는 것이지 영구히 합병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민족자결의 제창이 있자 조선독립을 일본이 허락할 줄로 알았다.
문: 민족자결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관계없는 조선과 같은 지역에는 문제의 범위 밖인 줄 알지 못하는가?
답: 민족자결은 전 세계 민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 5대 강국의 하나로서 열국과 교섭하고 있으므로 민족자결이라는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킴으로써 타국에 대하여 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여느 독립운동가 집안도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가 수감된 뒤 집안 형편은 몹시 어려웠다. 33인 유족들의 생활상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1922.1.2.)에 따르면, 당시 집안은 개화학당 교사로 있던 장녀(응선)가 꾸려가고 있었다. 옥중의 그 역시 곤궁하였던 모양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1원만 더 차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 차례나 옥고... 전향하지 않고 지조 지켜
1922년 5월 5일 그는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 했다. 이튿날 동아일보가 전한 그의 출옥소감은 이색적이다. 감옥에서 영적·사회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교역자 생활을 여러 해 하였으나 이번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感應)을 얻은 일은 없었다. 밖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도(前途)에 대해 매우 비관하였으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조선 사람도 앞으로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조선인에게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니 우리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 없는 현상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장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그 해 9월 다시 종교교회(宗橋敎會) 목사로 옮겼다. 1925년 9월에는 개성 북부교회로 옮겼다가 2년 뒤 1927년 9월에 다시 수표교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1년간 목회활동을 한 후 그는 YMCA 종교부 간사가 되었다.
그 무렵 그의 대외활동도 매우 활발했다. 1926년 10월 말에 열린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또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信友會)의 평의원으로 참여해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11월초 광주에서 일어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은 급기야 광주지역 학생들의 대규모 반일시위로 이어졌다. 이른바 '광주학생독립만세사건'이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과 자택에서 모여 사후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체포돼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그는 이듬해 9월 수표교 교회에서 사임하였다.
그러나 공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31년 다시 1년간 수표교 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시무한 후 상동과 연화봉 교회로 각각 1년간 파송되어 담임목사로 일하였다. 그 후 1935년에 수표교 교회 담임목사로 다시 파송되었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退會)하여 수표교 교회 본처목사(本處牧師)가 되었다. 본처목사란 개신교의 감리교회에서 휴직 중에 있는 목사를 일컫는 말이다.
독립선언 건으로 감옥을 살고 나온 오화영이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복귀해 근무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1925년 3월 22일, 그는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실업단체로 위장한 흥업구락부는 1920~19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단체였다. YMCA 총무 출신의 신흥우가 이상재·윤치호를 중심으로 YMCA·감리교 등 기독교계 인사들로 조직했다. 회원 가운데는 오화영처럼 신간회 결성에 참가하거나 비밀리에 미국의 이승만에게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이로부터 12년 뒤였다. 이 단체가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한 있던 일제는 1937년 가을 신흥우·장덕수·유억겸 등 청구구락부 관계자들을 먼저 잡아들였다. 이어 이듬해 5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 중 5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바로 이 사건에 오화영도 연루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신흥우 등 대다수는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섰으나 오화영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해방 후엔 정계 투신... 북한군 퇴각 때 납북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그는 정치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 시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한국지사(志士)영접위원회 참여였다. 그는 허헌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정세력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어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또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 반탁운동에 앞장섰으며,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 등을 맡아 신생조국 건설에 힘썼다.
해방 직후 남한의 정국은 극도로 혼란했다. 국내파·해외파로 나뉜 데다 초창기 미군정의 용인으로 좌파진영까지 합세해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했다. 그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각 정파 간의 단결과 합심을 호소했다.
"(3.1혁명 때)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금의 각 당이 각각 독자(獨自)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통일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에서 천도교로 혹은 불교에서 학생에게로 '우리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기 위하여 운동을 합치자'고 대표를 보내면 즉시 서로 양해 성립되어 서로 부여잡고 얼싸안았다. 다같이 죽음으로 독립을 찾자는 생각에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랴마는 지금을 그때보다 결심의 도가 약하다 할 수 없다. 우리의 독립운동을 직접 총칼로 위협할 압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독립을 전취(戰取)키 위해서 죽음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1 그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해야만 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7.2.27.)
▲ 건국대 정치대학 설립 축하식에서 축사하는 오화영(오른쪽) ⓒ 건국대학교
1947년 12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다. 이듬해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그 해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이사·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 정치대학관의 초대 이사장은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이었다. 강기덕은 연희전문의 김원벽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때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 때 오화영은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채 한 달도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한동안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2002년 통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오화영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 오화영 추모비(고양시 덕양구) ⓒ 고양시
한동안 그는 남한사회에서 금기의 인물로 치부돼 왔다. 독립유공자 포상 또한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월·납북 문학인들의 작품 해금과 함께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그 일환으로 1988년 12월 국가보훈처는 월·납북된 독립유공자 26명에 대해 포상을 결정했다. 이듬해 3월 1일 정부는 조소앙·김규식·안재홍·유동열·윤기섭·조완구·최동오·엄항섭·백관수·박열 등에 대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오화영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다.
세브란스 간호부장 출신의 아내 함명숙(咸明淑·1973년 작고)은 생전에 그를 두고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의 사나이였다"고 추억했다.(경향신문, 1966.2.25.)
그러나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는 묘소 대신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감리교신학대는 1978년 그를 포함해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자락에는 2014년 고창오씨 대종회에서 세운 추모비가 서 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오화영 편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오화영, '3·1운동과 나 -부럽다 당시의 단결력, 각 당 각파가 혼연일치', <자유신문>, 1946.2.27
- 허동현, '3·1운동에 미친 민족대표의 역할 재조명 : 기독교계 대표 오화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 오순덕, '국사 오화영의 리더십 연구 : 3·1 독립운동과 광복 후 정치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연세대학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자유신문, 경향신문, 통일신보 등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