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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십자가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로 십자가 상설 전시장이 뜸하더니,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다. 지난 주간 도림교회에서 모인 두 전시장의 실무자 모임은 그 봄소식을 알리는 아지랑이와 같이 느껴졌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방문 예약이 늘다 보니 봉사자들의 마음도 다급해진 모양이다. 전시장의 십자가들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고맙다. 게다가 전문 큐레이터까지 합세하니 그동안 숙제처럼 여겨졌던 전시 설명 기법도 쉽게 해결될 전망이다.
십자가 상설 전시장이 처음 문을 연 것은 2009년 10월이다. 고촌감리교회 크로스갤러리 오픈은 박정훈 목사와의 오랜 친분 때문에 가능하였다. 둘이 독일 개신교회의 날(Kirchentag)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던 비행기 안에서 제안을 받았다. 고촌교회가 재개발로 이전하여 신축하는데, 로비에 갤러리를 만들테니 십자가 상설 전시가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평소 예술을 사랑하는 분이기에 그 제안이 낯설지 않았다. 평소 십자가 보관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하였다.
고촌교회 장로 여러분들이 2009년 사순절,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세계의 십자가 展’을 방문한 후 결심을 굳혔다. 그것이 지난 14년째 고촌교회에 크로스갤러리가 존재하는 이유다. 교회 신축과정에서 가장 소중한 공간을 선뜻 내준 일이 감사하고, 지금껏 유지하는 한결같은 마음도 정성스럽다. 실은 전시를 위한 부대비용도 꽤 들기에 남다른 의지가 아니면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2018년 12월에 문을 연 도림장로교회의 예빛갤러리의 동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고촌교회 십자가 전시장에 들렀다가 그곳을 방문한 정명철 목사님과 만남이 출발점이었다. 네 차례 방문할 만큼 십자가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는데 얼마 후 초대를 받았다. 역시 교회 신축 계획을 말하면서 완공 후 십자가 전시회를 성대하게 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런데 건축이 조금씩 지체되면서 아예 상설 전시장 계획으로 바뀌었다.
전시장 유치를 위해 온 교인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감리교 목사가 장로교회에 예빛갤러리를 마련하게 된 사연이다. 십자가가 본래 교회의 일치를 드러내는 유일한 에큐메니칼 상징이니 교단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시장은 에디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비롯하여 곱틱, 겔틱, 비잔틴, 아르메니아를 비롯해 동방과 서방, 대륙과 나라를 가릴 것 없이 민족과 문화 그리고 전통에 뿌리를 둔 십자가의 세계이니 말이다.
물론 두 교회 모두에게 다짐받은 약속이 있다. 그것은 함께 꿈을 꾸는 일이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남과 북 사이 DMZ에 평화생태공원을 조성할 때가 오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때 한국 개신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예배당이든, 거룩한 상징물이든 민족 화해센터를 세울 것이 분명하다. 고성 통일전망대에 여러 종교의 예배 공간과 시설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좋은 사례이다. 그때 십자가 전시장만큼 세계인이 공감할 의미있는 공간이 또 있을까 싶다. 분단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크로스갤러리와 예빛갤러리의 담당자들이 함께 모여 전시 기획과 관리뿐 아니라 영성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서로 연결점을 찾은 것은 바람직한 시도이다. 종종 출장 전시를 하지만, 많은 시간 창고에 머물고 있는 십자가들의 ‘제3 전시’를 위한 준비도 적극성을 띄게 되었다. 앞으로 십자가를 만드는 작가와 공방들과 어울려 보다 규모있는 네트워크도 가능해질 것이다.
어제 김포 푸른언덕교회에서 열린 박흥규 목사님 10주기 추도식을 마치고, 오래전 김포시절에 만난 반가운 이들과 어울려 차담을 나누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 함께 문수산에 올라가 은사시나무를 베어 십자가를 만든 김용태 님도, 지금 공방을 운영하며 빼어난 솜씨로 십자가를 만드는 작가 심현규 님도 함께하였다. 고무적인 것은 김포 염하 해변의 철조망 철거작업이 현재 진행 중인데, 그 조각들을 얻기로 약속받았다. 이 일이 현실화 되어 우리 민족의 아픔을 고백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십자가로 재탄생하기를 소망한다.
1991년 6월, 교회 봉헌 후 예배당 중심에 높이 자리 잡은 은사시나무십자가 표면에 전방에서 녹슨 철조망을 구해 또 하나의 십자가를 붙여 두었다. 이중십자가인 셈이다. 그리고 6.25와 8.15가 되면 들꽃을 꺾어 꽂아 두고 예배드렸다. 48번 국도변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문수산성교회’라고 입간판을 세웠다. 모두 옛이야기이다. 지금 커다란 십자가의 나라에 살면서 그 아픔과 고난을 짐짓 느끼지 못한다면, 새삼 심각한 얼굴로 고난주간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심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