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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浦和집회월보 '파라클레이토스' 316호-
세키네요시오(関根義夫)
1. 한 권의 낡고 작은 신약성서
내 방의 작은 책꽂이에는 작은, 벌써 꽤 낡아버린, 한 권의 '시편 붙임 신약성서'가 꽂혀 있습니다. 원래는 검은 가죽이었는데, 이미 모서리도 표지도 가죽이 해어져 갈색이 되었고, 묶인 끈도 헐렁해졌습니다. 하지만 이책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한, 소중한 성서입니다.
겉장을 펼치면, 만년필로 쓴 희미해진 이름과 '1972.1 교문관에서 구입'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45년 전 긴자(도쿄 번화가)까지 가서 교문관에서 산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무렵 나는 통근 때 이 성서를 항상 윗옷 안쪽 주머니에 넣고 다녔는데, 줄을 긋거나 생각나는 말씀을 찾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어쨌든 윗옷 안쪽 주머니에 이 작은 성서가 있다는 것이 그 무렵 나에게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내 속에서 희미하게 등불이 켜지기 시작한 희망이, 모두 이 작은 성서에 담겨있다는 생각이었으니까요.
특히 그 중에서도 읽고 또 읽었던 말씀이 로마서 5장 5절의 "희망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였습니다. 이부분에는 밑줄이 몇 번이나 겹쳐서 두꺼운 선이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마음 속에 희미하게 등불이 켜지기 시작한 희망'이라 말했는데, 당시 나는 그 희미했던 빛으로 인해, 즉 '결코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바울의 이 말씀에 의지하고, 격려받고, 살아가는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희망'이란 몰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묶여있기 때문에 절대로 실망할 수 없다는 것으로, 지금도 저를 조용히 격려해 줍니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선배가 "주 예수는 우리들처럼 약속을 먹어버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안심이다." 했던 것을 확실히 기억합니다. 이것이 일본구어역(口語譯)에서는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라 번역되었지만, 우리가 보는 신공동역(新共同譯)은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신공동역에서는 그저 '희망'이지만, 특정한 것을 가리키므로, '이 희망' 이라고 하여 '이-'를 붙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희망은 단순히 우리가 바라는 희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특별한 희망을 가리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프란체스코회 성서연구소(가톨릭교회)譯은 "이 희망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쓰카모토(塚本)역은 "이 희망은 반드시 실현되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마에다고로(前田護郞)역은 "이 희망은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 예수에게 있는 이 특별한 희망은 반드시 실현된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확실하게 보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역시 주예수에게 있는 이 희망이 믿는 자에게 결코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며, 실망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2.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바울은 이렇게 확신에 찬 말씀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보여주고 있는 곳이 이어서 계속되는 다음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때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로마서를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이 "희망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에 이어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에 너무나 강하게 영혼의 울림을 받았습니다.
이 바울의 말씀은 읽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것은 바울이 성령에 가득차서, 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들어왔음을 확실히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틀림없이 자신을 깊이 사랑해 주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뚜렷이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하게 전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진정 바울의 실제 체험, 즉 우찌무라의 표현을 빌리면, '실험(實驗)'에 의한 영혼의 언어가 표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와 있다"고. 그가 어떠한 의심도 없이 확실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으로 인해서다라고. '성령'. 그것은 물론 부활하시고, 지금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3. 내가 아직 약했을 때 죽어주신 그리스도
그렇다면 그가 성령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압도적 확신을 갖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실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약했을 때, 정하신 때에 죽어 주셨다'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하다는 말은 결코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약했던 때란, 진실이 모두 보이지 않았던 때, 혹은 보이지않았음에도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때, 즉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던 때. 실제로는 전혀 아닌데도 그렇다고 믿으며 의심하지 않았던 때입니다. 우리는 정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럽게 교만에 가득찼던 때가 아니겠습니까?
이미 아시는 것처럼, 그때 바울은 아직 사울이라 불리고 있었으며, 자존심 강한 젊은이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스스로 솔선하여 박해하고 그 사람들의 목숨을 해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일이라 확신했습니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시각, 바울은 그때를 돌아보며 아픈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아픈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라 해도 그를 위해 죽는 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먼저, '우리가 약했을 때'라고 말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들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 비통한 사실을 직시하게 된 것이 어느 때였을까요? 그것이 언제였는지 엄밀하게 따져 보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저 다메섹에서 주를 직접 만났던 때였거나, 혹은 그일을 겪은 직후가 아니었을까요? 이때의 일은 사도행전에서 바울 자신의 말로 세 번이나 나오고 있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오래전 312호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다른 점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4. 부활하신 주 예수의 나타남(顯現)
부활의 주가 나타나심은 누가의 사도행전 9,22,26장에 세 번 기록되어 있는데, 9장에 의하면, 그 요점을 아래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처음은 그가, "일찌기 주의 제자들을 협박하여 죽이려는 마음을 먹고, 대제사에게 가서 다메섹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그것은 '이 도를 따르는 자를 보거든 남녀를 불문하고 포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연행'하기 위해서였다.(행 9:1-2)
그리고 두 번째는, '사울이 길을 가던 중 다메섹 가까이 왔을 때였다. 돌연 하늘로부터 빛이 그에게 내리쬐었고, 바울은 땅에 쓰러졌다. 그러자 그때 "사울, 사울! 왜 나를 박해하는가? 가시 막대기를 발길질 하면 참혹한 꼴만 당하지 않느냐."고 히브리말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그 소리의 주인을 향하여,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이 있었다, 이어서 "일어나 마을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다. 바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메섹으로 데려갔다. 사울은 3일간 눈이 보이지 않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이 기간 동안, 몸도 마음도 전인격까지 혼란스러웠던 사울에게서,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감에 차서 자부심 강했던 인간, 낡은 사울의 껍질을 완전히 박살내는 것으로 가능했습니다.
5. 바울에게 보이신 참 예수님
하지만 주께서는,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정직한 이 청년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한 가지를 믿으면 그것에 올인하고야 마는 그 성격을 주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청년에게서, 오로지 자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던 완고한 부분을 철저하게 부숴버려야 했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진실인가를 확실히 알게 하기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그가 아닌, 새로운, 다른 바울이 탄생해야 했던 것입니다.
과연 그때 그가, 예수라는 분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사람과는 다른 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는 율법을 경시하여 태연하게 범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스스로를 감히 신이라 떠벌리고 있는 점ㄷ이 거슬렸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신에 대한 모독이며, 그에게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지금까지의 자신이 완전히 박살나고 보니,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나타난 예수는 적대시하고 미워했던 자신을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에는 어딘가 깊은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그럴 리가 없는, 부정할래야 할 수 없는, 점점 선명하게 다가오는 모습. 그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르심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적대시하고 반항해 왔던 예수가,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이것은 사울에게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6. 스데반의 순교
그 순간, 자신도 깊이 관여했던 한 장면이 문득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는 일이었지요. 당시 자신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동료의 옷을 지키려고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스데반이 당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찬성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붙잡아 대제사에게로 끌어갔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위증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눈을 감은 채 되어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마치 천사처럼 빛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는 스데반에게 "고소당한 그대로인가?" 물었지만, 그는 조용히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천천히, 당당하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하는 태도에 압도되어,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동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집중하여 들을 수밖에 없을 만큼 그의 말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안에서부터 넘쳐나오는 감동때문이었을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외치고 있었습니다. "완고하여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여러분은 언제나 성령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조가 박해하지 않았던 예언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로운 분이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당신들은 그분을 배반하는 자, 죽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천사들을 통해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여기까지 말하자, 지금까지 침묵하며 듣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참지 못하고, '격하게 노하여'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스데반은 주위의 그런 험한 분위기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마치 성령에 가득차 있는 듯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과 우편에 계신 예수를 보고,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계신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그말이 끝나서인지 아닌지 모르나,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귀를 손으로 막고 일제히 덤벼들어 그를 시내 밖으로 끌어다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자, 스데반은 주를 부르며 "주 예수여, 저의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고 큰 소리로 외쳤고, 이윽고 스데반은......잠이 들었습니다."(사도행전 7장)
7. 예수, 그리고 스데반
사울은 하나하나의 장면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분명히 기억이 났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아무렇지 않게 동료들과 함께, "집집마다 들어가 집회를 없애고, 남녀를 불문, 잡아서 감옥으로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도 누군가가 이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을까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예수를 올려다보며,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3일만에 세운다던 자,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신을 구해보라!" 모욕하고, 또한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하나가 되어, "타인을 구한다더니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메시아, 이스라엘의 왕,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게 좋아. 그것을 보면 믿겠어."라고 조롱했던 것에 대해서요.(마가15:2-32)
이때에 예수는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누가 23:34)
여기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예수라는 사람을 완전히 오해한 것을 그제서야 깨닫고는 놀라서 절망적인 기분이 덮쳐오는 것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도, 또한 몇 일전에 돌을 던졌던 사람에 대해서도, 그 모습이 얼마나 빛났던가 하는 것과, 자신을 미워하고 욕하는 자들을 향해 하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잠드는 모습은 생각할수록 끊임없이 그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깊은 감동을 맛본 것이 언제였을까?
'나는 지금까지 율법을 금과옥조로 확신하여 인간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던가,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 쪽이 얼마나 더 진실하며, 소망이 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지 않는가?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왜 저 십자가에 달려 참혹하게 생애를 마쳐야 했는가?'
8.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자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사울의 마음 속에 도저히 멈출 수 없는 섬광이 찔렀습니다.
"반대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신 거다.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이 올라간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게 하시고, 그 겸손을 통해 이 세상의 어떤 낮은 자보다 낮은 생애를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믿는 자는 모두 구원받는 길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의 아들의 십자가 죽음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못할 만큼 죄에 물들어 있는 자를 구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사랑해 주셨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저 하나님을 적대했던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종으로 완전히 환골탈태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바울이여, 정직하게 당신의 실험(실제 체험)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어 감사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로 인해 나도 또한 주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죄 속의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 예수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201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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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편이 뒤에 붙은 작은 가죽 신약성경'이라면 우리도 다 한 권씩 가졌던 경험이 있지 않나요? 매일 그것을 꺼내 읽었을 20대의 청년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지네요. '희망은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에게도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나는 성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자신이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나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구제불능의 이 죄인을 감히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만이 나를 건질 수 있다.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이 한가지 사랑에 의존한다. 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