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서 박달재 덕평 자연 휴양림까지
일요일 1부 예배를 드리고서야 출발한 터라 부모님 계신 곳 까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버이 날이 다가 오고 있어 먼저 안부 인사를 드리고 가슴에 꽃도 달아드렸다. 늦은 시간 수안보로 올라 간다. 생각보다 일정이 바뿌게 되었다. 수안보에서 1박하고 문경에서의 일정을 위해 달린다. 멀리 들어오는 문경 시가지가 고엽하다. 정말 산골인것 같아보였다. (수안보 가는 중에,,, 멀리보이는 문경시가지 새벽 풍경...)
아침 일찍 서두른 덕분에 투어차도 탈수 있었다.
낮 부터 관광객이 너무 많이 몰려서 안전사고가 우려된다고 투어 차량은 운행이 중지 되었다.
황금연휴와 상춘객들, 어린이날 가족 외출 부터 많은 인파가 몰린 탓이다. (투어차량에서 본 문경새재 제1관문)
한국관광공사 발표도 한 몫했다. 관광지 1위에 문경새재가 선정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경 새재는 문경에 있는 조령이다. 새=조, 재=령을 순 우리말로 풀어 낸 것이 문경 새제이다.
조령 산맥의 중심인 조령은 1,2,3 관문으로 옛 "영남 3대 대로" 중 하나 였다.
추풍령을 통과하는 대로와 함께 문경 새재가 있고 그 동쪽으로 죽령이 있었는데 재밌는 이야기는
서울로 과거를 보려 가는 선비들은 하나 같이 문경 새제를 택하여 올라 갔기에 "과거 길"로도 불렸다.
'추풍낙옆 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과 '죽 쓰게 된다'는 죽령 길을 포기하고 굳이 새재를 택한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지난해 큰아이 고3 때 느낀 심정이다. 모든 것이 수능 임박시 조심 스러웠다.
일생의 결단을 위해 입신양명해야 될 선비의 발길이 새재로 몰리는 것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공감 되는 것이다. (제2관문인 조흘관)
반면 "낙방길"도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간다. 금의환양하겠다며 과거여비 만들어 올라갔으나 낙방한 선비가 어찌 염치 없이 쭐르륵 고향으로 갈 수 있었을까? 또 급제한 선비들이 잔치를 치른 후에 가면 소문에 저절로 떨어진 것을 식솔들이 알게 될터 번거롭게 예길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갔다. 그럼 그들의 "낙방길"은 어디 였을까?
옛 조선에서 서울 외각 중 "송파나루"(지금의 송파동)이었다. 이곳은 천호동 옆과 당시 누에를 키우며 생계를 유지하던 '잠실' 사이다.
천호동은 천개의 민가가 있는 당시 매우 큰 읍성이다. 그에 비해 송파나루는 작았지만 광주와 수원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이어서 어정대다 영암으로 향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이번 문경새재 방문으로 다시 알게 된것 중 한가지가 꼬불꼬불 아리랑고개다. 그 한많은 길위의 삶이 그대로 인생역경으로 표현된 노래가 '아리랑'아닌가. 뿐만 아니라 "일지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고단한 삶과 부조리에 대한 모순을 단적으로 드러낸 일지매를 생각해보니 그래도 지금이 좋은 사회다.
(문경새재 박물관 내 자료 중 일지매에 대한 정비석의 소설 중에서)
한편 '뜨악!!'하는 것조 있었다. 문경에 '광화문'이 새워져 있다는 사실 다녀간 사람만 안다. 그뿐 아니다. 서울에도 없는 '육조' 거리도 있다. 드라마 세트장이다. 이곳에서 뜻밗에 잘지어진 세트장을 만나게 되면서 역사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러워 졌다.
이런 까닭에 관광공사도 전국 가볼만한 관광지 1위로 문경새재를 선정했던것 같다. 문경 과거 길, 둘레길과 역사성 짙은 관문, 그리고 드라마 세트장 까지 완비 된곳이 몇몇 없을 것 같다.
( 드라마 세트장의 광화문-골고개 성황당-꾸구리전설이 서린 곳-문경 제1관문 주흘관)
이참에 임진왜란에 대해 살짝 한말씀 올린다. 만일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지 않고 종사관인 김여물 장군이 주장한 문경새재에서 막았다면 임진 왜란의 양상도 바뀌지 않았을까? 당시 조선 군사 체계는 지금의 예비군 체계 처럼 군사 훈련은 생업중 소집되어 받았다. 따라서 정규병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었다. 명나라에서 조선군의 정규화를 마땅하게 생각지 않은 것도 한 까닭이었고 사대성도 한 몫했었다고 본다. 어쩨거나 조선 본진(8,000명 당시는 이정도 였다)이 탄금대에서 전멸 당하면서 한양까지 일시에 왜군이 몰아 쳤다. 임금은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피첩했고 온 나라는 7년이라는 장기 수난으로 빠져 들었다.
이때 왜구가 택한 길이 부산 동래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돌격한 영남대로 길이었다. 문경 세재는 이런 아품을 지닌 길이기도 했다. 문경 새재에는 몇몇 전설이 서려 있다. 앞서 애기한 '일지매'는 탐관오리의 난립을 풍자했다. 신구 경상감사가 임무를 교대하던 귀교정과 과거길에 혼래를 올린 신부를 버린 선비의 이야기인 돌고개 성황당 구령이 전설, 신비한 꾸구리 전설등 오가던 선비들이 지나는 주막 마다 서린 이야기가 올곳이 흐르고 있다.
아! 이 모든 문경의 이야기 보다 나는 정겨운 모녀를 들을 뒤에서 감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문경에서 큰딸과 엄마가 정겨운 산길을 걷더니 덕평자연휴양림에선 막내와 함께 도란 도란 애기하는 모습이 좋아서 몰래 포커스를 두어다. ^^
(박달재 덕평자연휴양림에서,,,, 문경새제에서..... )
마음을 쉬우기 위해 덕평의 오솔길을 걸었다. 인적이 들지 않는 길을 택해서 인지 자연의 본질을 느끼기에 충만하였다.
내내 들려오는 물소리와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가 심신을 안정 시켜 준다. 공기가 깨긋해서 일까?
산소 밀도가 높아서 일까? 저절로 깊은 호흡이 되었다. 숲길이 아름답게 펼처져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짧은 동영상을 올린다.
(덕평 자연 휴양림의 오솔길... )
숙소에 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기 참 좋았다. 상대적으로 덕평자연휴양림은 덜 알려진 탓에 아직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름 휴가 철이면 이곳 역시 많이 번잡해 진다. 길의 폭이 좁은 편에 갖길이 없어 계울을 이용하는 사람이 몰리면 차량 통행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탐방객이 없다 보니 호적한 풍경과 힐링 제대로 했다. 곳곳에 팬션이 건립되고 있었다. 그만큼 아직은 즐길만 한 곳이란 것을 방증한다. 올해 여름을 위해 벌써 몇몇채는 건립되었고 일부 건립중인 곳도 있었다.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자연 그대로 즐기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것을 생각해보게 된다.
즐길수 있을 때 충분히 즐겨야 겠다.
종종 자연으로 떠나는 시간을 만들어야 겠다.
이번 여행은 지난 가족여행보다 먼거리를 이동했다.
합천-수안보-문경(새재)-재천(박달재덕평자연휴양림)-원주(연세대)-퇴촌-서울로 이어지는 코스라 약 870km를 이동했다.
또 많은 인파가 모리는 시간 중에 이동한 까닭에 도로 위에서 지체도 있었지만 차량 이동 중에 즐거움도 있었다.
큰아이는 위치 찾기 서비스를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나는 네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다. 흔한 표현으로 감으로 길을 찾아가는 편이다. 과거 많은 곳을 여행했던 경험 탓에 유명지는 그냥 간다. 이번 처럼 인파가 모릴지만 안는다면 위치 찾기 서비스도 필요 없었겠지만 국도가 안닌 간선도로 또는 지도에도 포시가 없는 시골 마을길을 통과해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동안 서비스는 매우 유용했다.
덕분에 귀경하던 중에 퇴촌길로 빠진후 맞이한 한강변 코오스는 멋진 드라이브의 기쁨을 주었다. 원주의 토속음식인 고구마 막구수가 벌써 그립다. 이른 날에 먹어서일까 속이 얼얼 할 정도였다.
작은 아이가 물었다. 왜 막국수냐고? 흔한 말로 ㅡ막먹는다고 막국수라고 하지만 사실 막국수는 지난해 40주년을 맞이한 소양강 땜 건설 때문에 유명해 졌다. 당시 화전민이 많았던 강원도 산막에서 노동자가 필요했던 대규모 토목공사에 인부로 많은 사람이 모였다. 가원도의 감자나 메밀등으로 전분을 내어 만들어 먹던 음식인 국시기가 이때 전국으로 확산 되었다. 막국수는 이를 갈아서 전분을 걸러 바로 해 먹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큰아이를 기숙사에 내려 두고 서울로 향했다. 왠지 가슴 한곳이 비었다. 위치 찾기 원격 서비스도 그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