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떡을 먹으라(성령강림후 열한번째 주일)
요한복음 6:41-51
‘김병만의 정글의 법칙’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출연자들을 정글에 풀어놓고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알아서 해결하게 하고, 그 과정을 편집하여 시청자들에게 제공합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유행입니다. ‘먹방’이란, ‘먹는 방송’의 줄임말인데, 연예인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먹고 싶어지는지라, 방송에 한번 소개되면 그날은 배달이 밀릴 정도로 주문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모든 재료가 다 갖춰진 먹방 프로그램은 별로 내키지 않는데, 자연에서 얻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정글의 법칙은 뭔가 많이 끌립니다. 배고픔 끝에 얻은 과일 하나에 감격하고, 별다른 양념도 없는 음식도 맛나게 먹습니다. TV로 보면 엄청나게 맛있어 보이지만, 양념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음식이 뭐 그리 맛이겠습니까? 그래도 출연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처럼 먹는 모습이 가식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도루묵’에 이라는 생선에 관한 이야기를 다들 아시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답니다. 배가 고팠던 선조가 수라상에 올라온 생선을 맛있게 먹은 후 그 이름을 물으니 ‘묵’이라는 생선이라고 합니다. 선조는 이렇게 맛있는 생선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며 즉석에서 은어(銀魚)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환궁한 선조가 피난지에서 맛보았던 은어가 생각나 다시 먹어보았더니 옛날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맛에 실망한 임금이 역정을 내면서 “도로 묵이라고 불러라!”라고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인간의 한계와 위대함
똑같은 음식이라도 처한 상황에 따라 맛도 다르게 느껴지고, 소중함이 크기도 다릅니다. 음식이 변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바뀐 것이고, 사람의 입맛이 상황에 따라 변한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주릴 때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가 너무 맛나고, 소중해서 필요 이상의 것까지 긁어모으다가 매일매일 만나가 주어지니 ‘지겹다’고 불평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필요한 것이 모두 채워져도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위대한 점은 심각하게 필요가 결핍된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긍정적인 삶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곤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만 한다고 그렇게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와 위대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존재입니다.
■ 예수님으로 채우라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때 우리는 저절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온통 채우고 있는 이런저런 염려와 근심, 원망과 질투, 오만함과 적대감과 작별하고 싶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안에 채우고 우리의 눈이 아닌 예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손익 계산이 빠른 세상은 어리석은 삶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이들은 우직하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십자가요, 그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소금이고 빛입니다.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닌 신앙인, 소금도 빛도 아닌 교회가 넘쳐납니다. 그런 교회들과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끊임없이 채워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나 십자가나 복음의 말씀으로 채워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을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현혹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을 상고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데, 멸망하는 자들이 구하는 미련한 것들로 채워주기를 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둔갑시켰으니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요원합니다.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 십자가의 도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고자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의 삶
이런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채우라!”라고 합니다. 이미 충분한데도 “더 많이 가지라!”고 합니다.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추깁니다.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가지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합리화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욕망의 속성은 계속해서 채우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의 결핍을 바라보게 합니다.
인간의 양면성이기도 한데, 우리는 타인을 통해서 위로받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 위로를 받습니까?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을 보면 위로받습니다. 어떤 경우에 상처를 받습니까? 나보다 잘난 사람을 보면 상처받습니다. 더군다나, 나보다 못난 사람 같은데 잘나가면 더 상처를 받고, 세상은 불공평하다며 적개심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공의로운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한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기 때문에 훈련해야 합니다. 어떤 훈련이냐 하면, 빼는 훈련입니다. 좀 종교적인 언어로 ‘비움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빼는 만큼, 비우는 만큼 우리는 홀가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하지만, 세상의 성공을 이루지 못했어도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욕심을 빼십시오. 미움과 다툼과 시기하는 마음을 빼십시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마음을 빼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를 채우십시오. 그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은 포기하는 것을 무슨 실패자들이나 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청년의 때에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 말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했습니다만, 요즘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며 스트레스받지 말고 내가 오를 수 있는 나무를 바라보라는 말로 받습니다.
■ 삶의 방식을 바꾸라!
높은 나무에 올라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릴 적 밤이나 도토리를 따려고 아주 높은 나무를 오르곤 했습니다.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면 성취감도 있지만,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리는 높은 나뭇가지에서는 떨어질까 불안해서 행동이 제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나무에 올라가지 않아도 높은 나무에 있는 도토리나 밤을 딸 수 있습니다. 나무 밑동을 망치로 칠 수도 있고, 익으면 저절로 땅에 떨어집니다. 가을 이른 아침에 밤나무 아래에 가보면 이슬방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떨어진 알밤을 주울 수 있습니다. 나무에 올라갈 수도 있지만, 올라가지 않아도 도토리나 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현대 사회는 무슨 일이든 ‘리스크를 감수(위험성감수)’해야 한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이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세상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서로 수군거립니다(요 6:41).’ 뭐라 수군거리는 것일까요? 22절부터 이 말씀은 이어지는데,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27), 하나님의 일이란 나를 믿은 것이다(29),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다(35),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40)’는 등의 말씀이 얼토당토않다고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만나와 같은 떡을 구하는 것만이 능사요,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아니,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해. 내가 생명의 떡이니까 내 살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다.” 하시며 다른 방법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림자를 좇는 사람들
그림자는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그림자를 진짜인 것처럼 호도합니다.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권력, 돈, 명예 같은 것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세상은 마치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벌레 탑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나비’를 품었는데, 애벌레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아무것도 없는 벌레 탑을 기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남들이 올라가니까 덩달아 올라가다가 꼭대기에 이르러 아무것도 없음을 보는 순간 “쉿, 올라오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면 안 되니까 조용히 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이런 삶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가 없는 삶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고 싶습니까? 빼십시오. 세상의 욕심을 빼십시오. 그래야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밋밋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맛난 것이구나 깨닫게 됩니다. 아무 맛도 없을 것 같은 자연에서 얻은 음식이 그토록 소중하고 맛나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처럼, 날 것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이 시편 119:103절의 말씀대로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떡을 먹으라!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요,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생명의 떡을 어떻게 먹습니까? ‘믿음’으로 먹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의 계명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형제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함축되어있습니다. 형제 사랑과 이웃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상을 보는 것(히 11:1)인데 우리 형제와 이웃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와 이웃은 자기의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욕심으로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는 형제와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을 먹으려면, 내 마음의 빼기를 잘해야 합니다. 빼기의 영성, 비움의 영성을 실천하면 우리의 삶의 가벼워집니다. 그 길이 바로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요, 생명의 떡이 차려진 잔칫상으로 초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3:5절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헛된 그림자에 흔들리지 마시고 생명의 떡이 가득한 상,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담은 잔, 예수를 여러분 마음에 채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