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신과 홈스쿨링 에피소드
털신. 도시에서는 생경하겠지만 시골에서는 정겨운 country-style shoes다. 값 싸고, 보온성 좋고, 신고벗기도 편해서 좋다. 겨울의 약간의 눈길이나 따뜻한 오후 얇게 녹은 진흙창에서는 장화급 water-proof shoes이기도 하다.
털신을 신다신다 닳고닳아 털이 해졌다. 게다가 뒤꿈치 쪽은 세로로 갈라졌다. 도대체 몇 해 겨울을 함께 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되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2008년 봄 서울대 정문에서 우리 아이들
털신 하면 옛날 잊기 어려운 홈스쿨링 에피소드가 있다. 털신 신고 서울대 캠퍼스 돌아다니던 낭패 경험이다. 2008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큰 애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홈스쿨링 시작한지 딱 3년이 지난 시점이다. 3년간 홈스쿨링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대학은 안가더라도 공부는 해야한다. 공부의 만능키는 독서다. 많이 읽고 말하면 된다.
지구촌시대가 열린다는데 영어 하나는 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이 듣고 읽으면 된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담긴다. 열심히 일하고 잘 놀면 된다.
또래가 그리우냐? 또래에게 보내주마. 한달에 한번 4~5일씩 홈스쿨러 캠프에 참가했다.
홈스쿨링 3년이 되어갈 즈음 아이들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권태. 어느날 동굴에 갇힌 동물이 덩치는 작아지고, 눈은 퇴화되고, 소화기관도 없어지는 진화과정을 잠깐 그려봤다. 진화는 적응이이니 퇴화가 아니다. 큰 애는 자기에게 끼가 없어 캠프 프로그램이 힘들단다. "그럼... 대학 갈래?" 했더니 망설임없이 그러겠다고 한다.
대학 보내겠다는 생각이 없던 나는 바빠졌다. 나의 미션은 이랬다. 요즘 대학은 어떻게 가는가? 수능, 등급, 표준점수, 백분위, 가군나군... 내겐 외계어였다. 세상과 이어진 거라고는 달랑 인터넷선 하나 뿐인, 백두대간 바로 밑 산골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고1 나이 딸의 미션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뭘 공부해야 하는가?' 였다.
그리고 벚꽃 피던 어느날, 꿈은 크게 가져야 한다면서 서울대 구경가기로 했다. 중앙도서관도 둘러보고, 자하연 옆 학생식당에서 점심도 먹고 했는데... 아뿔싸! 내 신발이 털신이다! 외출복은 잘 챙겨입고는 습관대로 털신에 발을 넣은 것이다. 뾰죽한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허리띠 느슨하게 풀고, 품 좁은 청바지를 힙합스타일로 내려입어야 했다. 올라가려는 청바지(!) 수시로 내리면서. 왜 계단을 오르면 바지가 올라가는가! 그 시절 6인승 봉고더블캡 1톤트럭 타고 호텔 주차장에 들어갈 때도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도 어색했었는데 그 때보다도 더 어색했다. 호텔에서 트럭 발레파킹 부탁하면? ㄷㄷㄷ
그로부터 2년 8개월 뒤. 딸애는 수능성적이 국영수에서 단 하나 틀렸음에도 국사,한문 3등급이 걸림돌이 되어 서울대 정시에서 떨어졌다. 도대체 서울대 가는 애들은 어떤 애들인지... 하긴 내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아이들 중 서울대 들어간 열 댓명은 얼굴도 잘 모른다. 한 교실에서 일년을 함께 했음에도. 도대체 책에서 얼굴을 떼질 않으니... 참고로 나 모르는 애들은 많지 않았다-_-!
털신 때문에 갑자기 시간여행을 했다. 이제 털신이 여행을 떠날 때다.
첫댓글 재밌네요 ㅋㅋ 오랫동안 함께해준 존재에 대한 고마움과 습관의 무서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ㅎㅎ
털신에 대한 추억이 있었네요 ㅋㅋㅋㅋㅋ
홈스쿨링은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로 선택하는것 같습니다.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고맙습니다~
어떻게 보면 학교는 아이를 십중팔구 무기력하게 만들어 '믿져도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택이 오히려 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