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 첨록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홍공(洪公) 묘갈명 병서
나는 홍사고(洪師古)와 바로 옆집에 살고 있어 병이나 일이 있지 않으면 조석으로 늘 보았다. 하루는 그가 와서 홀연 눈물을 글썽이며 시름에 잠겨 말하기를, “나의 선친을 안장할 때 그대의 선친이 실로 묘지(墓誌)를 써 주셨습니다. 이제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우고자 하니, 그대가 아니면 명(銘)을 지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기에 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삼가 수락했다.
이렇게 한 지가 3년이 지났는데 홍사고가 죽고 그 아들 여필(汝弼)이 상주 차림으로 와서 울며 말하기를, “선친이 선조(先祖)의 일을 공에게 부탁하시고 미처 성취하지 못한 채 지하에 가셨습니다. 이제 불초고가 선친의 비석을 세우고자 하여 선친이 부탁하신 바를 부탁하니, 원컨대 공은 선친에게 수락하셨던 것처럼 수락해 주십시오.” 하였다.
아, 내가 우리 양가(兩家)의 정의로 보아 가신 분의 선친에 대한 부탁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였는데 하물며 가신 분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홍사고(洪 師古)는 이름은 준(遵)이고 자호는 괴음(槐陰)으로, 풍신(風神)이 침중하고 자질이 돈후 선량하였으며 의론이 평정(平正)하여 입으로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술을 잘 마셨고 흥이 나면 노래를 부르며 자적(自適)하기를 밤낮이 지나도록 지치지 않았다.
관직 생활에서는 분수에 따르고 청탁에 뜻을 끊어 세상의 영욕과 득실 때문에 그 조수(操守)를 바꾸지 않았다. 남과 사귈 때는 언제나 신의가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친족과 화목하였다. 가산(家産)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보살펴 주었다. 군수(郡守)를 맡을 때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보살펴 주어 식객들의 신발이 늘 문 앞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은 빈한하고 검소하여 처자식은 늘 군핍한 기색이 있었다.
정사년(丁巳年, 1557, 명종 12)에 태어나 기묘년(己卯年, 1579, 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고, 경인년(庚寅年, 1590, 선조 23)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주서(注書), 내한(內翰)에 천거되었고, 형조(刑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좌랑(佐郞), 함경 도사(咸鏡都事), 함종 현령(咸從縣令)으로 승진하였다.
누차 자리를 옮겨 지평(持平), 문학(文學), 헌납(獻納), 장령(掌令)을 역임하고 필선(弼善), 보덕(輔德), 수찬(修撰), 교리(校理),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겸임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02, 선조 35)에 승진하여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 여론이 바야흐로 우계(牛溪)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옥당(玉堂)에 있을 때 이에 반대하는 의론을 내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다시 서용(敍用)되어 해운 판관(海運判官)에 제수되었다. 천거를 받아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어서는 관방(關防)을 단단히 점검하고 학교를 일으켜 그 지방 사람들이 지금도 그 은덕을 잊지 않고 있다.
사행(使行)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 순천 군수(順天郡守)가 되었고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며, 또 외직으로 나가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었다. 질병으로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시국이 위태한 것을 보고 더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어졌다. 그래서 교외에 5년 동안 살면서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군 7)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신천 군수(信天郡守)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해옥(海獄)이 일어나 매우 많은 사람이 연루되었다. 사고도 성명이 비슷한 사람으로 오인되어 감옥에 갇혀 문초를 받았는데 공초(供招)가 명백하여 실상이 드러났다.
그래서 상(上)이 장차 석방하려 하였는데 금오랑(金吾郞)이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려고 사고를 몹시 학대하여 등창이 났는데도 약을 주지 않았다. 병세가 알려지자 상이 즉시 명하여 출옥(出獄)시켰으나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상이 그 소식을 듣고 하교하기를, “병이 들었는데도 구해 주지 않아 죽게 하였으니, 내가 몹시 놀랍고 슬퍼 마음을 가눌 수 없구나.” 하고는 그 금오랑을 파직하고 의관(醫官)을 문책하였다.
아!,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로다. 아아,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로다.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저성(著姓)으로, 장양공(莊襄公) 사석(師錫) 때에 처음으로 크게 현달하였다. 증조 이평(以平)은 사성(司成)이고 조부 덕렴(德濂)은 직장(直長)이며 부친 인건(仁健)은 사성(司成)이다.
부인 상씨(尙氏)는 영의정 진(震)의 증손이요 판관(判官) 시손(蓍孫)의 따님으로 정순(貞順)하여 숙행(淑行)이 있었다. 사고가 죽자 머리털을 자르고 죽을 것을 맹세하더니, 반년도 채 못 되어 죽었다. 양주(楊州) 수남리(水南里)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進士) 여필(汝弼)이고 딸은 현감(縣監) 조박(趙璞), 생원(生員) 최익지(崔翼之)에게 출가하였다.
여필은 1녀를 낳았다. 조박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전소(全素)이다. 최익지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그대의 죽음이 / 謂子之死
하늘 탓이요 사람 탓이 아니라 한다면 / 天也非人
하늘의 이치가 어찌 혹시라도 어긋나랴 / 理豈或爽
하늘은 오직 어진 이를 돕는 법이지 / 唯天佑仁
그대의 죽음이 / 謂子之死
사람 탓이요 하늘 탓이 아니라 한다면 / 人也非天
그대 같은 사람을 돕지 않고 / 吾君不與
누가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 誰使之然
오호라 아아 / 嗚呼嚱嘻
하늘 탓이든 사람 탓이든 / 其天其人
결국은 하늘의 책임인 셈이다 / 竟歸之天
오호라 아아 / 嗚呼嚱嘻
하늘의 탓인가 사람의 탓인가 / 天乎人乎
이 무덤엔 아무런 손상이 없어라 / 無傷此阡
[주-D001] 해옥(海獄) :
임해군(臨海君)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사사(賜死)되었던 옥사를 가리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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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洪遵 墓碣銘[李廷龜]
余與洪師古居竝舍, 非病有事, 未嘗不朝夕繼見。 一日來忽汪然而慽曰: “我先人之藏也, 子之先公實誌之。 今欲樹石墓道, 非子莫爲銘。” 余亦汪然涕而敬諾焉。 如是者三年, 而師古亡, 其孤汝弼纍然絰杖, 泣且言曰: “先人托先事於公, 未及就而泉下矣。 不肖孤謀不朽於先人, 唯先人所托是托, 願公之諾於先人者而諾焉。” 噫! 吾兩家世相托, 旣不忍已諾於逝者之先, 況於逝者乎?
師古名遵, 自號槐陰。 風神凝重, 質厚資良, 論議正平, 口不言人過。 善食酒, 遇興歌呼自適, 窮日夜不倦。 爲官隨分, 絶意造請, 不以榮辱、得喪易其守。 與人交, 無不信, 居家孝睦, 賑施貧孤, 不問有無費。 及典郡, 持是道益博, 食客屨恒滿, 自飭寒儉, 妻子常有窶色。
生於丁巳。 中己卯進士。 庚寅, 及第, 選槐院。 薦注書、內翰, 陞刑・戶・禮佐郞、咸鏡都事、咸從縣令。 屢遷持平、文學、獻納、掌令、兼弼善、輔德、修撰、校理、執義、司諫。 壬寅, 陞拜鍾城府使。 時議方攻牛溪, 以玉堂時論議相左坐罷。 敍拜海運判官。 薦授東萊府使, 飭關防, 興學校, 邊人至今思之。 朝京還, 刺順天, 拜同副承旨、工曹參議, 又出爲成川府使。 謝病歸, 見時事艱危, 益無仕宦念。 郊居五年, 詩酒送日。 乙卯, 還除信川郡守。 無何, 海獄起蔓甚, 以姓名聲相近, 傳致獄庭, 供白見狀。 上且將原, 金吾郞承望偏虐, 疽發不與藥。 病聞, 上遽命出獄, 已不救矣。 上聞之, 敎曰: “病不救令死, 予甚驚悼, 無以爲心。” 仍命罷金吾郞, 罪醫官。 嗚呼! 尙何及哉, 嗚呼! 尙何及哉。
洪南陽著姓。 莊襄公師錫始大顯。 曾祖以平, 司成: 祖德濂, 直長。 考仁健, 司成。 夫人尙氏, 領議政震之曾孫, 判官蓍孫之女。 貞順有淑行, 斷髮矢死, 未半年竟卒, 祔葬楊州水南里。 擧一男二女: 男進士汝弼。 女適縣監趙璞, 生員崔翼之。 汝弼生一女。 趙生三男三女: 男全素。 崔生一男女, 幼。 銘曰:
謂子之死, 天也非人。 理豈或爽? 唯天佑仁。 謂子之死, 人也非天。 吾君不與, 誰使之然? 嗚呼嚱嘻! 其天其人, 竟歸之天。 嗚呼嚱嘻! 天乎人乎, 無傷此阡。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