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예수는 무죄다 / 누가복음 23:38-49
여섯 번째의 사순절 주일을 맞았습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의미하는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실상 이제부터는 죽음의 입구에 들어선 것과 다름없이 십자가 처형순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수난과 부활의 드라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드라마입니다. 절대로 관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드라마 주인공은 두 명의 강도와 로마인 백부장입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누가복음에는 예수의 수난과정이 잔인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고통을 묵상하려면 마가나 마태를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멜 깁슨(Mel Gibson)이 감독으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Passion of Christ에 나오는 처절한 채찍질의 고통스러운 장면은 보는 이들의 눈물을 엄청나게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고통에 공감하고 주님께 연민(compassion)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수난주제는 <죄 없는 의로운 분의 처형>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를 재판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신성모독의 범죄로 여기고 처형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처형은 통치자에게 이관되어서 헤롯 안티파스가 심문했지만, 예수는 그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의 죄패를 붙인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처형의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폭동을 선동하지도 않았고,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강도”라고 불리는 “무장저항세력” 두 사람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때 한 강도가 예수를 조롱합니다. “메시아라면, 너도 살리고 나도 살려보라.”는 강도의 말 속에는 예수를 <우상>으로 보는 시각이 숨어있습니다. 메시아의 힘, 기적적인 능력만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반면 다른 강도는 그 강도를 꾸짖습니다. 죄가 있어서 죽는 우리와 달리 저분은 죄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죄 없는 이의 처형”이라는 말 속에는 “의로운 분의 죽음이 암시하는 진정한 가치”가 보인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강도가 무슨 가치를 보았기에 예수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빌었을까요?
예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명패가 붙어있었습니다. 당연히 조롱입니다. 그런데, 그 강도는 예수가 그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라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이 무엇이었든지, 당신의 나라에서 인정받기를 바라는 강도에게 예수는 낙원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강도는 죽으면서 낙원을 경험합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백부장은 숨이 끊어진 예수를 올려다보며 말합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 직전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시편31:5)
원래 이 시편 31편은 하나님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의 시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마지막 말은 “자신은 죽지만, 자신이 이루려고 하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정신만큼은 보존하여 달라”는 기도가 아닐까요? 그 다음절 시편을 읽어보면 명확해집니다. “썩어 없어질 우상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미워하시니, 나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시31:6) 여기서 자신의 영혼(생명)을 지키는 일과 썩어 없어질 우상을 섬기는 일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우상을 버리고 생명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사순절 세 번째 묵상주제가 예수의 광야시험 중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라는 시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경제적 시험입니다. 경제란 먹고사는 일이고 물질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맘몬숭배가 됩니다. 내가 내 손 안에 물질을 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가 물질 안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맘몬의 위력을 인정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신을 가지고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며, 어떤 대접을 받고 사는 지만 생각한다면, 그것이 어느 순간에 썩어질 우상을 믿고 사는 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부활절까지 꼭 일주일 남았습니다. 혹시 우리가 헛된 우상들의 위세에 눌려서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시간입니다. 그 우상들은 어디서 왔는지, 혹시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 나의 정신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죄 없는 의로운 분의 죽음 앞에서 그분께 생명을 맡긴 나에게 어떤 삶의 소망이 생겨나는지 말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2024년 3월 24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