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 김윤길 (편집위원) | 2016. 제2호
[편집자 주]
신대승 e-매거진은 각 분야에서 자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 사회와 불교계에 뜻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강호의 인물들을 찾아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이를 정리하여 게재하는 <강호대담, 선우·선지식을 찾아서>를 진행합니다. 그 첫 번째로 경상대학교 철학과 ‘권오민 교수를 찾아서: 암하실 방담’을 다음과 같이 3회에 나누어서 연재합니다.
① 불교?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진리입니다. ② 불교학? 학문도, 대학도 기본이 중요합니다. ③ 조계종?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
불교?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진리입니다.
글·대담정리 : 김윤길(본지 편집주간)
● 대담자: 김윤길(본지 편집주간), 윤남진(본지 편집위원, 트랜드&리서치센터소장)
● 일시: 2016년 5월 27일 18:00부터 5월 28일 10:00까지
● 장소: 경남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 농막(巖下室)
큰 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다.
세상이 어지럽다. 이것저것 얽히고설켜 빠르게 돌아가는 소용돌이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발 내딛으면 거센 물줄기가 발목을 휘감는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벼랑 끝 경계에 서있는 느낌이다. 목청껏 소리를 질러본다.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악다구니가 귀청을 때린다. 말문이 막힌다.
그나마 늘 만나던 사람들이 위안이다. 그러나 대화는 어느 지점에서 도돌이표가 된다. 침묵이 흐른다. 유일한 공감대는 답답함이다. 난세에는 말벗도 줄어든다.
어려울 때일수록 좋은 벗이 필요하다. 좋은 벗은 나이도, 성별도, 출신도, 귀천도 따지지 않는다. 좋은 벗은 그냥 선우(善友)요, 선지식(善知識)이다. 같은 길을 가는 벗이라면 서로가 부대낄지라도 함께 걸어야 한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면 가끔 소식이라도 듣고 전해야 한다. 내가 만나고 싶거나,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좋은 벗이 있다면 때로는 멈추어 기다리거나 잠시 길을 돌아가서라도 만나야 한다.
언제나 만나고 싶은 좋은 벗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아무 걸림 없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만남이다.
윤남진 소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십여 년 재가불교운동의 현장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한 것일까, 삐쩍 마르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쇠어버린 그를 보면 가슴 한 구석이 아리다. 삼십년 직장생활을 접고 명예퇴직이 확정된 직후의 홀가분함이 윤 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허허로워졌다. 나는 소진한 것인가 탕진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텅 비워있었던가. 경남 산청으로 권오민 선생을 만나러가자는 윤 소장의 제안에 두말없이 동의한 이유는 그런 허허로움이었을까?
산청의 옛 이름은 산음(山陰)이다.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이곳을 한마디로 평했다. “산음은 음침해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 굳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는 곳을 찾아드는 그 곡절의 남다른 마음가짐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청담은 여러 번 사화(士禍)를 겪으며 절도유곡(絶島幽谷)에서 유배의 나날을 보내고, 전국을 유랑하며 지리를 살펴 살만한 곳을 골라서 《택리지》를 썼다. 그가 남긴 말은 은둔의 망설임을 정곡으로 찌른다. “초야에 물러나 살고자 하면, 만첩 푸른 산과 천 겹 푸른 물이 없는 것은 아니건마는 쉽게 가지도 못한다.”
이중환은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山林)뿐”이라고 했다. 지리산 능선의 연봉이 한눈에 보이는 경남 산청의 외딴 산자락에 작은 농막을 지어놓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밤새 막걸리를 마시며 거침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불교철학자, 아비달마불교 연구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진 경상대 철학과 권오민 교수를 만나러가는 길은 멀긴 했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지리산 북동쪽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산청은 이제 서울에서 하루에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산청군 외송리 간디고등학교 앞을 지나서 좁은 비포장 길을 가파르게 올라서니 언덕배기 모퉁이에 선생이 마중 나와 있었다. 선생은 우리를 털털하면서도 날카로운 톤의 경상도 사투리로 반갑게 맞이했다. 몇 년 전 충무로에서 『아비달마구사론』 재번역 출판을 상의한 뒤로는 만나 뵙지 못했지만 더벅머리 백발에 도수 높은 안경, 빙긋이 웃는 모습은 한결같은 느낌이다. 농막은 단출하고 검소했다. 암하실(巖下室)이라는 현판 글씨가 인상적이다. 큰 바위 아래 거처, 바위의 무게를 지고 살면 허허롭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집 앞으로 펼쳐진 겹겹의 산들 저 너머로 지리산맥이 아득한 이곳은 둔철산(屯鐵山, 823m) 능선의 투구봉 자락이다. 덕유산에서 남쪽으로 갈라지는 백두대간 진양기맥(晋陽岐脈)의 기세가 산청과 합천의 경계를 이룬 황매산에서 서남으로 뻗치는 곳이다. 장대한 지리산을 바라보며 견디기 위해서는 심중에 철을 품어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암하실에서 큰 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둔철산 투구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 (사진: 홍기섭 블로그 ‘산과바람’에서)
해질 무렵부터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꼬박 밤을 지새우며 세 사람은 종횡무진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불교학자로서, 종립대학의 교직원으로서, 재가불교단체의 활동가로서 각자 살아온 행적은 달랐지만 불교계를 바라보는 마음의 눈길만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했다. 불교와 불교학에 대해서, 종단의 현실과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해서 거침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때론 날선 비판과 격양된 울분이 교차하였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기도 했지만 불교학자로서 권오민 선생이 치열하게 탐구해온 ‘지혜와 지성’에 대한 사유가 밤샘 대화의 중심가닥을 잡고 있었다.
툇마루 처마 밑에 걸린 암하실(巖下室) 현판 글씨가 이채롭다. ⓒ신대승 e-매거진
‘오늘의 불교도들에게 지혜가 있는가, 지성이 작동하는가?’
“이제 오늘 우리는 불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불타의 깨달음, 즉 법성(法性)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시대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오늘의 불교도들에게 그러한 지각판단의 능력(智慧)이 있는가? 불교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택(簡擇)할만한‘지성’이 작동하는가?”
2015년 7월 10일 미붓아카데미(대표 이학종)가 진행하는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의 첫 강좌(주제: 지성과 불교)에서 권오민 교수가 던진 질문이다.
<참고> 미디어붓다 최승천 기자의 보도기사 일부 (2015.7.13. 원문보기)
아비달마 불교 최고 권위자의 대중강연에 불교·철학계 관심 폭발
80명 수용 가능한 방배동 마지 갤러리에는 두 배에 가까운 140여 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서서 강연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면서 강좌에 참석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결코 쉽지 않은 수준의 대하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이날 나타난 동참 열기는 이전의 불교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중략) “역동성을 상실한 채, 지난날의 영광에 의탁한 채, 다만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한 채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초기불교가 친설(親說)/원음(原音)이라느니, 간화선만이 구경도(究竟道)라 외치면서….”
권 교수는 이날 간화선 일변도, 선정 일변도, 지성이 아닌 신비적이고 신화적인 신행에 치중해온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강하게 비판했다. 권 교수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오직 ‘혜(慧)’임을 역설했다. 불교의 모든 경전이나 가르침들이 이를 일관되게 가리키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불교에서는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지성불교의 흐름이 외면되어 왔다고 일갈했다. (중략)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가? 불교는 ‘있어라’하니 있었다고 믿는 종교가 아니며, ‘행하라’해서 행해야 하는 종교도 아니다”라고 강조한 권 교수는 그 이유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성의 철학이기 때문’이며, 지혜란 간택, 즉 비판적 탐구, 분별적 이해를 본질로 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권 교수는 “미래의 불교는, 과거의 전통이나 문화가 아닌 오늘 현재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우리가 만들어 갈 미래의 불교는 지성의 철학, 지혜의 불교여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
권오민: 불교운동 하시는 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는 불교성전을 제대로 접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경(經)을 많이 보긴 하는데 어려워요. 반야심경만 해도 그걸 제대로 읽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반야심경 첫 문장은 어마어마하게 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 이게 무슨 뜻이죠? 오온(五蘊)이 공(空)이다, 대체로 공이란 뜻인데, 오온이 이 세계, 일체(一切)의 본질인데, 오온이 공이라고요? 그건 ‘이 세계에 괴로움 자체가 원래 없다’라는 겁니다. 우리가 만약 그 뜻을 새길 수 있다면, ‘내 괴로움이 사실 괴로움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야겠죠. 그런데, 누가 이 문장을 그런 의미로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반야심경은 법회 등 불교행사에서 주문처럼 암송하여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경전이다. 그런데 그 첫 문장의 뜻을 제대로 새길 수 있는 불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보면 익숙한 것일수록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하다.
권오민: 참 큰 문제는 성전(聖典) 자체가 불교하고 이미 선이 그어져있다는 사실이죠. 많은 사람들이 법정 스님 책 보고 좋아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으신가, 먼지티끌 하나 없이… 글 보면 참 존경스럽고 감성적인 분이잖아요. 어쨌든 대게 신도들이 접하는 건 그런 감성적인 종류의 글이지 경전을 접할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게 사실 문제에요. 어떤 측면에선 법정스님 같은 분이 도리어 불교를 왜곡시켰다고 볼 수도 있어요. 68년도엔가 나온 《불교성전》이라는 게 있었는데, 요즘엔 찾아보기도 어렵죠. 어쨌든 기독교에서는 경전을 끼고 살잖아요. 불교는 끼고 살만한 경전도 없고, 있어봤자 대개가 공덕용으로 독송하는 것이지. 이게 문제가 있어요.
김윤길: 요즘에도 《불교성전》이 동국역경원에서 나오긴 합니다. 계속 찍어내고 있지만 일반유통은 거의 없죠. 삼사십년 전 편찬된 그대로라 용어들이나 맞춤법도 어색하고… 불교용어를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조계종단에선 역경사업을 아예 포기한 거 같아요.
권오민: 신자들이 성전을 접할 수가 없고, 접해도 온갖 추상화되어서 어렵습니다. 조계종도 달달 외울만한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종단에서 성전편찬이 필요하다고 말하긴 하죠. 조계종 3대 종책사업으로 역경, 포교, 도제(인재)양성을 내걸었지만, 안타깝습니다. 나는 사실 원하는 게 동국대에서 불교학 전공하는 대학원생들, 다른 대학에서 철학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원전공부 제대로 하는 겁니다. 강의하러 갔을 때, 그런 학생들 원했는데...
윤남진: 언해불전에서 ‘각(覺)’자를 한글로 ‘안다’라고 번역한 걸 본적이 있습니다. ‘안다’라는 것이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과 다른 의미로 썼을 거라고 봅니다. 옛날에는 ‘사량(思量)’으로…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생각한다, 깨닫는다, 이런걸 ‘알고 사량한다’, 그렇게 번역을 했더라고요. 요즘에는 다 통일시켜서 ‘생각’이라고 쓰는 것 같아요.
권오민: 작년에 서울에 강의하러 갔을 때, 교육원장 스님이 보자고 하더라고… 스님이 깨달음에 대해서 의미를 물어보더군요. 옥편에서 “깨달을 각(覺)”으로 쓰는데,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예요. ‘깨닫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요. 불교용어가 너무 현실하고 동떨어져 있어요. 일반적으로 ‘지각(知覺)’이라는 말을 쓰죠. 안다는 말이잖아요. 지각이란 말은 철학에서는 중요한 개념이지만, 일상에서는 “지각이 없다”는 등 이 말을 막 쓰는데, 이 경우에 깨달았다는 뜻으로 쓴 건 아니죠. 깨닫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사실은 ‘안다’해도 별 상관이 없죠. 그 워딩이 일반철학에서는 ‘알다’라는 뜻입니다.
윤남진: 교수님 책 《불교학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해하고 탐구하는 것하고는 변별되게 쓰셨더라고요. 제 주변에서 그런 질문이, 저에게 깨달음에 대해서 물어보면 참 난감합니다. 깨달음 논쟁이 붙었잖아요. 현응스님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던지셨죠. 그냥 제가 거칠게 받아들이는데. 증험하고 증득, 체득, 얼핏 그건 다른 문제 아닌가, 이런 느낌이 있어서….
| 불교학과 불교, 359쪽 권오민 저 2009,8.20. 민족사 간행 |
불교경전이 어려워 불자들이 접할 수 없다는 것이 한국불교의 가장 큰 난제라는 문제의식은 최근 불교계를 뜨겁게 달군 ‘깨달음 논쟁’과 맞닿아 있다. 작년 9월에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의 책 《깨달음과 역사(불광출판사)》 발간 25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스님이 직접 발제한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원문보기)가 논쟁의 발단이었다. 선방 스님들의 의견을 모아서 전국선원수좌회가 입장문을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서 현응스님의 답변(원문보기)이 있었다. 여기에 수불스님 반론(원문보기)이 발표되면서 승가에서부터 달궈지기 시작한 논쟁은 점차 불교학자들을 비롯한 재가불자들까지 가세하여 치열한 백가쟁명이 펼쳐졌다.
권교수는 《불교학과 불교》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거짓이라면, 진실은 무엇이며, 거짓된 현실세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러한 진실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지난 2500년의 불교사상사는 이에 대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제2장 p53)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탐구가 이른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과 공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전의 편찬과 번역의 지난한 과정에서 진리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과 체계성을 확립하기 위한 해석과 연구로서의 ‘(불)교학’은 깨달음의 한 방편일 뿐인가? 그 결과로서 우리가 접하는 경전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도 ‘깨달음’은 가능할 것인가?
“부처님이 말해서 진리가 아니고, 논리적으로 타당해야 진리다.”
권오민: 《불교성전》이 앞뒤로 논리적인 체계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개개인이 각자 성전 만들어라, 별 수 없다. 불교에서는 그걸 허용한다.’ 그렇게 된 겁니다. 로마에서 313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수차례 종교회의를 거쳐서 397년인가 정전을 확립해서 성경이 편찬되잖아요. 그리고 끝인데,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편찬됩니다. 중국에 와서도 위경(僞經)의 이름으로 편찬됐잖아요. 능엄경도, 원각경도 위경입니다. 위경 목록에 들어가 있습니다. 위경이란 가짜 경전이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게 가짜가 아닙니다. 능엄경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죠. 불교경전은 반드시 부처님이 설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철학에서 인식방법이라는 게 있는데, 보통 인도철학에서는 여섯 가지 혹은 세 가지나 네 가지로 나누는데, 불교에선 지각과 추리, 두 가지밖에 없어요.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이죠. 인도논리학에선 3번째가 정언(正言), 성언량(聖言量) 즉, 말씀입니다. 불교논리학인 인명(因明)에서는 그 ‘말씀’을 빼버려요. 중국에서는 들어오는데 인도에서는 빼버렸어요. 부처님 말씀은 부처님이 말해서 진리가 아니고,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인도불교의 전통이 이미 그렇습니다. 현량과 비량만으로 진리를 검증합니다. 경전에 쓰였다는 사실만 가지고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기본정신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경전을 누구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사회에서 그걸 불교경전으로 인정해주느냐의 문제가 남는 겁니다. 조계종에서도 성전을 만들 수 있겠지만 구성원들이 그걸 인정해야 되잖아요. 불교학자들한테 검증도 받아야 하고, 그게 쉽지 않습니다. 돈 주고 너 한번 써봐라, 그런 식으로 옛날 오십년 전 불교성전 만든 겁니다. 그래서 그게 효력이 별로 없잖아요. 차라리 개인적으로 성전을 만들라 이 말입니다. 옛날에 사기(私記)라고 하는 거 있잖아요. 요즘도 어느 스님이 감명 받은 구절이 있다면 당신 제자 중에 누가 “우리 스님이 늘 독송하던 구절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코멘트 달고, 책 내드리고… 신도들에게 말하기도 좋잖아요. “우리 스님 책이다.” 제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성전을 가지라는 겁니다. 운동의 성질을 가질 수 있잖아요. 이런 것도 종교 활동이 됩니다.
김윤길: 정전(正典)을 확립하기 어려운 게 불교군요. 기독교는 위에서 하향식으로 '이게 정전이다. 믿어라.' 그렇게 하나로 끝냈는데, 불교는 상향식으로 아래에서부터 누구나 경전을 만들 수 있으니 한편으론 다양성이 보장된 것이네요.
권오민: 어떤 식으로든 하나로 꿰어야 합니다. 동아시아 불교 전체를 하나로 꿰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고 하는 꿰는 작업… 지금은 남방불교까지 들어와서 더 중구난방이 되어버렸죠. 가장 부딪히는 게 용어문제입니다. 불교용어가 수천수만 개가 있는데. 안 맞아요. 오온(五蘊)을 ‘무더기’라고, 이렇게 번역해야 하는 것인지… 그건 약과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윤남진: 그런 용어문제 가지고 논쟁이 있었습니까?
권오민: 논쟁이 되겠어요?
김윤길: 우리말 ‘몸’과 ‘마음’의 어원을 ‘모으다’의 명사형인 ‘모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온(蘊)이라는 한자어가 ‘쌓다’, ‘모으다’는 뜻이잖아요.
권오민: ‘몸’이 단순히 살덩어리, ‘육신(肉身)’이라 할 때, 영어로는 'flesh' 인가요? 그냥 그런 살덩어리가 아니지요.
김윤길: ‘오온’이라는 불교의 개념어를 우리 조상들이 ‘몸’과 ‘마음’으로 풀이한 것은 아닐까요?
권오민: 불교술어 중에 유신견(有身見)이라는 게 있습니다. 있을 유(有), 몸 신(身), 까야(kaya)라고 하죠. 에고(ego)라는 뜻입니다. “오온의 집합을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견해”, 쉽게 말해서 “오온의 집합이 ‘나’라고 하는 것”을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까야’를 한자어로는 몸, 육체(身)라고 했지만, ‘까야’는 집합, 모인 것이에요. 중국 사람들에게 몸의 반대말은 마음이죠. 심신(心身)을 분리해서 서로 반대로 보는 겁니다. 유신견을 “몸이 있다고 여기는 견해”, 이건 100% 틀린 말입니다. “오온의 집합을, 적취(積聚)를 ‘자아’라고 여기는 견해”가 유신견입니다. 가장 중요한 불교술어 중에 하나인데, 한자의 뜻으로만 보는 사람은 “몸이 존재한다는 견해”라고 단순하게 말해버립니다.
윤남진: 훈민정음 만든 이유가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國之語音 異乎中國)”라고 하잖아요. 문자 이전에 말이 있었죠. 우리말을 한자로 했을 때 잘 안되어서 한글 만들었다는 게 기본취지인데, 그래서 언해불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게 더 시원(始原)적일 수 있다, 한글이 원활한 소통을 위한 글자인데, 소통이 보장된 글자인데, 그 이전에 한자는 보장하지 못했다, 그런 취지가 있다는 거죠. 해석할 때 한자에 갇히면 뜻이 잘 안 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불교학이나 국어학 하는 사람들이 관심 가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학 하는 쪽에서 리더십이 있다면 국어학자들에게 이런 거 연구해봐라 할 수도 있겠죠.
김윤길: 고대 인도에서 성명(聲明), 인명(因明) 등등 오명(五明)으로 학문을 분류하는데 ‘성명’은 언어학이나 음운학(音韻學)이라고 할 수 있죠. 인도의 전통학문에서도 소리에 대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봐야겠죠.
권오민: 소리, 구절, 음의 굴곡, 이런 게 중요하죠. 제가 북인도 카슈미르에 다녀와서 여행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현장스님이 카슈미르 가서 2년 동안 공부한 것이 바로 성명과 인명입니다. 성명은 음운학, 문법이고, 인명은 원인을 밝히는 논리학입니다. 의학을 가르치는 의방명(醫方明), 기술 등을 가르치는 공교명(工巧明), 각 학파에서 전하는 내전(內典)의 철학적 교리를 가르치는 내명(內明), 이렇게 다섯 가지가 오명입니다.
▲ 현장법사가 카슈미르에서 첫날밤을 묵었던 바라물라의 후쉬카라(또는 우스쿠라) 승원의 스투파. (카슈미르-④ 현장의 카슈미르 순례, <법보신문> 연재 ‘권오민, 불교학의 고향 카슈미르·간다라를 가다’ 중에서 원문보기)
김윤길: 삼명(三明)이라는 건 어떤 겁니까?
권오민: 삼명이라는 건 또 다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로, 아라한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의 지혜, 즉,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입니다. 숙주지증명(宿住智証明), 사생지증명(死生智証明), 누진지증명(漏盡智証明)이라고도 하죠.
윤남진: 같은 말인데도 억양이나 강세에 따라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인 것들이 있잖아요. 경상도 말은 잘 들어야 하겠더라고요. 언어학이라든지 논리학, 심리학, 이런 건 불교학에서 외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불교학 교과과정 중에 꼭 필요한 외전이라고 생각해요. 최소한 개론(槪論)이라도 공부하도록 해야지요.
부처님 열반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모여 결집(結集)과정들을 거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자들 사이에 다른 견해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불전 편찬은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수백 년 동안 고대 인도논리학의 핵심적인 로직(logic)을 체계화한 불교논리학(因明)을 바탕으로 치열한 논쟁을 거치며 진행되었고, 언어학(聲明)적으로도 치밀하게 고찰되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서력기원 전후부터 일천여년동안에 인도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의 역경사업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문명교섭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10세기에 중국 북송(北宋)에서 간행된 한역대장경(漢譯大藏經)은 인도문화권과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을 통섭하여 인류지성사에 불후의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특히 그 지난한 경전 번역의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난제들을 풀기 위해서 7세기에 당나라 현장스님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인도를 비롯한 서역으로 구법(求法)여행을 떠나게 된다. 현장은 북인도 카슈미르에서 경론의 기본인 성명(언어학)과 인명(논리학) 등을 공부하였고, 나란타에서 유식(唯識) 등을 탐구하였다. 마침내 17년 동안의 유학생활 끝에 스님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 당시에 중국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경론(經論)들을 구하여 장안(長安)으로 돌아오게 된다.
드디어 당나라의 국가적 사업으로 역경(譯經)사업이 전개되면서 진정한 법사(法師)의 반열에 오른 현장스님을 중심으로 규기(窺基), 원측(圓測) 등 당대의 수승한 학승들이 함께 모여 방대하고 난해한 경전의 논리적 해석과 번역을 완성할 수 있는 학문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그 무렵 신라 원효 스님도 당나라로 유학한 신라 구법승들이 전해준 한역경론들을 공부하면서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찬란한 법화(法花)를 피울 수 있었다. 불교가 지성의 철학이라는 말은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서 나오는 지극히 당연한 언급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 현실의 불교는 이것을 인정하고 따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권오민: 저는 요새 경전에서 새로운 걸 많이 봅니다. 옛날에는 못 봤던 것이 보이더라고요. 평생 들여다봤는데도 그렇습니다. 학생 때부터 대학원 시절에 먹고 살기 어려우니까 경전번역 했는데, 그 당시 원고지 1매에 만원 준다고 해도 제 공부와 관계없으면 안했습니다, 인도불교사라든지 부파불교라든지 내 전공 쪽으로만 했지, 다른 건 안했습니다. 당시에 경량부(經量部)만 봤는데, 색다른 만큼 참 시간 투자도 많이 했습니다. 경량부라는 이름 자체가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는 학파’ 그런 뜻입니다.
그럼 남는 의문이 다른 학파에서는 과연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는가? 이에 대해서 어떤 일본 학자는 ‘경을 지식의 근거로 삼지 않는 불교학파가 어디 있느냐, 경량부라 하는 거 특정한 게 아니라 모든 거에 다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등 별의별 가설이 다 있습니다. 시간을 지나보니 아비달마불교나 유식에서는 진짜로 경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 거기선 뭘 지식의 근거로 삼는가하면, 로직(logic), 정리(正理), 론(論), 오로지 논리를 근거로 삼지, 경을 근거로 삼지 않습니다.
김윤길; 그 유명한 ‘불설비불설(佛說非佛說) 논쟁’과도 맞닿는 말씀이군요.
권오민: 그 논쟁은 아주 옛날부터 있던 겁니다. 제가 십년 전에 발표해서 약간 문제가 되었던 건 ‘불설이 무엇이냐’라는 겁니다. 불설이라는 게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아닙니다. ‘법성(法性)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법성은 인도어로 다르마타(dharmata)라고 하는데, 요즘 우리말로 하면 ‘진실’입니다. 진실이 뭐냐고 물으면, 유부 아비달마(有部阿毘達磨)나 유가행 유식학파(瑜伽行唯識學派)에서는 바로 ‘론(論)’이라고 합니다. 정리, 올바른 이치, 오로지 바른 이론만이 진실이라는 겁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리를 정리한 구사론에 대해서는 비판과 이론(異論)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중관, 유식, 여래장, 화엄, 천태 등 전부 그 계통입니다.
윤남진: 열거하신 대승의 계통들이 전부 일관되게 그렇다는 거군요.
권오민: 그렇습니다. 그 계통에서는 오로지 논리를 최고로 삼는 겁니다. 경이 아닙니다. 논리, 이론입니다.
김윤길: 기독교에서 그리스 플라톤주의의 로직을 받아들여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을 편찬하면서 신학이론을 완성한 것과 유사한 면이 있군요. 결국 서양에서 신학을 정점으로 수학과 법학의 기초이론이 정립되면서 현대학문이 시작된 걸 생각해보면 불교는 과거에 그렇게 못했지만 어쩌면 미래에는 더 큰 가능성이 있을 것도 같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논리가 중요한 게 아니다”
권오민: 김선생도 이제 퇴직하는 데 그 동안 경전 번역하는 일에 관여했던 건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불교를 이해하는 공부도 되고, 신행적인 면에서도 의미가 있는데, 그럼 앞으로 뭘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셔야죠?
김윤길: 고민하고 있습니다.
권오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요즘엔 우리나라 스님들이나 불교학자들까지도 이런 말 막합니다. “논리가 뭔데, 아비달마가 뭔데? 오로지 부처님이 중요하지.” 이건 굉장히 이단적인 말입니다. 인도에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유부에서 분파된 경량부입니다. 상당히 이단적인 겁니다. 유부에서 설정하는 모든 불교학 체계 자체를 허물어 버려요. 불교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처음부터 경량부라고 그러진 않았어요. 원래 이름이 비유자(譬喩者, Drstantika)라고 합니다. 비유(譬喩)는 메타포와는 좀 다릅니다만,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가 중요하지 논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세간의, 일상사의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거죠. 가장 좋은 예가 유행가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눈물의 씨앗이다.’ 논리는 없는데 통합니다. 정서가 통합니다. 그게 바로 비유예요. 인도어로 드르스탄타(Drstanta), 번역은 비유 또는 현유(現喩)라고 합니다. 세 가지 현유라고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까브야(kavya)죠. 그 당시 노래입니다. 노래를 가지고 불교의 이야기를 전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유행가 작사자인 셈이죠. 그 대표적인 분이 부처님의 생애를 노래한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을 지은 마명(馬鳴)입니다. 일련의 문학들, 《불소행찬경》에는 논리적인 것도 있지만, 세간의 이야기가 막 들어오기 때문에 부처님이 마야부인 뱃속에 들어올 때 코끼리를 타고 들어오고… 그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잖아요. 중음신은 다음 태어날 모습으로 가죠. 코끼리로 들어오면 코끼리로 태어나야죠. 만약에 그런 걸로 (설일체)유부하고 대화하면 그들이 대꾸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를 담론하는데 이미자 노래를 하면 그걸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불교의 중요한 장르가 됩니다. 초기불교에선 없었는데, 비유라는 장르가 생겨난 겁니다. 그래서 각종 경전이 만들어집니다. 비유경(譬喩經)만 해도 굉장히 많거든요. 요즘 어떤 방송에서 그런 비유를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던데, 아닙니다. 그들은 엄연히 하나의 학파예요. 다만, 진리를 나타내는 양식을 달리하는 겁니다. 불교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부처님 전생담에서, 제자들의 전생담에서, 위대한 불교도들의 전생담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윤길: 비유경과 같은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제2의 창작을 해보라는 말씀이군요. 불교가 스토리텔링할 콘텐츠로는 어마어마한 광맥입니다.
권오민: 예를 들면, 그 위대한 아소카왕도 말년에 비참하거든요. “내가 가진 것은 사과 반쪽밖에 없네.”라고 한탄합니다. 그 아들도 두 눈을 잃고… 아소카왕과 그의 아들 쿠나라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불교교향악단하는 사람이 얼마 전에 여기 와서 그런 소재를 가지고 베르디처럼 오페라 만들면 좋겠다고 합디다. 만약에 그런 걸 하시면 문학적으로 살붙여도 상관없습니다. 그 동안 살붙이는 게 아니라 원전도 안 읽고 일본책 가져다가 자기 모르는 건 빼버리고 대충 베껴서 진짜 어린이 수준으로 우스갯소리로 격하시켜버린 책들 많습니다. 절대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비유는 불교의 중요한 장르입니다. 12분교(十二分敎)라는 불교의 12가지 장르 구분이 있습니다. stura(經), gatha(偈頌), geyya(重頌), avadana(譬喩), jataka(本生) 등등 모두 불교의 중요한 경전 장르입니다. 사실 이런 걸 내가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기독교 성경은 한 글자라도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불교는 얼마든지 빼도 되고 가미해도 됩니다. 문학성이 중요해요. 우리가 사실 틀에 박혀서 여시아문으로 시작하는 한문 경전을 들여다봐야 제대로 압니까? 한 번도 경전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사실 풀어내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큰일입니다. 이런 것을 일상적으로 읽히고, 이해를 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우리 불교성전은 아예 읽을 생각도 않고, 읽히려고 노력도 않고, 문제가 많아요.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고 전해오더라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칼 같은 대승논사(大乘論師)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유행가나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고자 했던 비유사(譬喩師)들이 애초에 불전 편찬의 과정에서 서로 소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불전들은 다양성을 가진 콘텐츠의 보고(寶庫)로서 더 큰 가능성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광맥의 존재를 알면서도 제대로 원석을 캘 수 있는 사람도, 캐낸 원석을 가공할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우리 불교계의 현실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